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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52)화 (52/166)

51화

힐데가르트는 오히려 그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었다.

“오해? 오해애? 어떤 식으로 오해했는데?”

“몰라!”

“나도 아무한테나 그런 말 안 해. 키스케니까 한 말인데?”

“고개 돌려. 이쪽 보지 마!”

“싫어, 계속 말해줄 거야. 멋진 왕자님 키스케.”

“하지 말라고 했어!”

오늘 밤, 키스케가 받았던 상처를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런 웃음으로나마 나쁜 기억이 조금씩 잊히기를 바랐다.

힐데가르트는 그 후로도 키스케를 놀리는 척 너스레를 떨며 활짝 웃었다.

“참, 황실에서 연락받았어. 마법 배울 생각 한 거지?”

“……그래.”

키스케는 지치지 않고 웃으며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힐데가르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환한 웃음이 마르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좀 전까지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드는 것 같았다.

“용케 배울 생각을 했구나?”

“그냥…… 황궁에서는 할 일도 없으니 할아버지 말마따나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거야.”

“네 의지야?”

“내 의지야.”

“그건 다행이네. 난 대환영이야!”

힐데가르트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진 걸 깨달았다.

‘다행이다.’

심지어 키스케는 제 쪽에서 먼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좀 전에 네가 나비를 만든 마법도 배울 수 있어?”

“물론이지. 대신 기초 수련부터 차근차근해야 해.”

“아카락시아 공작령은 어떤 곳이야?”

“…….”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앞으로 지내게 될 곳이면 알아두는 게 좋잖아.”

“누가 뭐라니?”

기특해서 봤더니만.

힐데가르트는 속으로 투덜댔다.

그래도 직접 물어본다는 건 최소한 관심은 있다는 소리니 좋은 징조였다.

그녀가 대답을 골랐다.

“으음, 좋은 곳이야.”

그녀가 키스케와 마찬가지로 난간에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의 어깨가 살며시 맞닿았다.

“물론 내가 좋다고 해도 넌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아마 너도 우리 영지가 마음에 들 거야.”

“어떤 점이?”

“일단 황궁보다는 훨씬 편하게 뛰놀 수 있다는 점?”

“내가 망아지냐. 그런 걸로 좋아하게.”

힐데가르트는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본가 저택은 바람이 잘 들어. 여름에는 선선하게 낮잠 자기 좋을 거야.”

그 대신 겨울에는 그만큼 추워서, 다 함께 벽난로 주변으로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거나 오셀로를 두기도 해.

“주변에는 나무가 많아. 특히 언덕 꼭대기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거긴 네 마음에도 들 거야. 한가하게 시간 보내기 좋거든.”

정말 근사한 곳이라 나는 지금까지 그곳을 싫어하는 사용인을 본 적이 없어.

정원도 멋진 곳이야. 곧 봄이니까 정원에는 고르키파크 장미와 프리지어가 필 거야.

향기가 꽤 진해서 머리가 아플 수도 있겠다. 만약 싫으면 테라스 문을 닫도록 해.

대신 커튼은 치지 마. 저택은 채광이 좋아서 햇살 들어오는 시간이 가장 따뜻하거든.

“그리고 또…….”

“또?”

“…….”

힐데가르트는 하던 말을 멈췄다.

난간 밖으로 향해 있던 키스케의 시선이 어느새 제게 꽂혀 있었다.

너무 혼자서 떠들었나.

그래도 의외로 키스케는 지루하지 않았는지 그녀의 말을 꼬박꼬박 듣고 있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얘 방금 웃었지?’

착각이 아니라면 잠깐 웃었는데.

키스케의 웃음은 참새처럼 조잘거리던 힐데가르트에게서 비롯되었으나,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다.

“어…… 으음, 나머지는 내려가서 직접 소개해 줄게.”

“소개할 게 더 남았어?”

“당연하지!”

키스케는 못 말린다는 듯 그녀를 보았지만, 입꼬리는 조금 말려 올라가 있었다.

어쩌다 이 이상한 마법사에게 익숙해져 버린 걸까?

‘저 웃음을 계속 보고 싶어.’

사소한 이야기도 제법 즐겁고, 무너질 것 같았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져.

‘이 마음은 대체 뭘까.’

키스케는 자신의 비좁은 우주에 누군가가 소리 없이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새 예년보다도 훨씬 따뜻해질 봄날이 그의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 * *

쨍그랑!

꽃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마우제네 랑케르트는 겁을 먹은 시녀에게 문틈으로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말 해봐요!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요!”

“입 닥쳐!”

문을 잠근 마우제네가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랑케르트 공작가의 가주, 칼란도 랑케르트.

그리고 조용히 궁을 빠져나온 로바르네 2황자비였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여동생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악을 쓰고 있었다.

“우리 잘나신 황자비께선 아버지인 나를 개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하더니, 기어코 일을 망치는군!”

“말 다 했어요?”

로바르네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일이 잘못될 리 없다고 호언장담한 게 누군데! 무슨 일이 있으면 다 책임진다고 했잖아요!”

“제물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게 누굴 향해 소리치는 거야!”

마우제네는 골치 아픈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칼란도의 침대 발치에 앉아 있는 고양이도 흥미롭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해, 이딴 아버지가 사는 랑케르트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니……!”

칼란도가 또다시 물컵을 던졌다.

그러나 박살 난 유리컵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도, 로바르네와 마우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건방진 년들! 후계자로 삼을 아들 하나만 있었다면 너희 모두 길가에 내다 버렸을 거다!”

“아버님.”

“딸이라는 것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나 있어서 짐짝밖에 안 되는 것들이!”

마우제네는 피곤한 얼굴로 그를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우선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는 이 꼴이 괜찮아 보이느냐? 응?”

그가 사납게 치켜뜬 눈을 부라렸다.

칼란도의 상태는 심각했다.

이름 모를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피부는 까맸고 드문드문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저주를 알아 오신 겁니까? 얼마나 더 그런 상태가 계속되는 거고요?”

“네가 알 것 없다. 마우제네 넌 잠자코 하인들 입단속이나 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우제네와 달리, 로바르네는 아버지의 몸을 보고도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카라딘을 황태손으로 밀기 위해, 끔찍하게 싫어하는 아버지와 공모해서 이번 저주를 꾸민 로바르네였다.

순조롭게 일이 흘러가면 대주교와 귀족들을 설득한 뒤, 공회를 열어 카라딘을 황태자로 밀 생각이었건만.

“이젠 끝이야, 흑, 흐윽…….”

“시끄럽다! 앵앵 우는 소리도 듣기 지겨워!”

“진정해 로바르네. 아버님도 그만하시고 천천히 대책을 세워보죠.”

가문의 번영과 영광에만 집착하는 칼란도.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는 로바르네.

서로를 지독하게 증오하는 부녀는 입에 칼을 품은 채 손을 잡았고, 일이 틀어지기 시작하자 거침없이 서로를 난도질하려 했다.

불행히도 셋은 한배를 타고 있었기에, 누군가는 노를 저어야 했다.

랑케르트 공작가의 차기 가주인 마우제네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당분간 랑케르트 공작령으로 돌아가 상황을 조용히 살피기로 하죠.”

“언니!”

“진정하고 들어, 로바르네. 급한대로 카라딘 전하는 내가 황성에 드나들며 돌보마.”

로바르네는 서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마우제네는 진심으로, 황제를 저주한 여파가 이 정도 선에서 그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칼란도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수도를 떠야겠으니 채비해라.”

“알겠습니다.”

“아카락시아는 어떻게 됐지?”

예리한 시선이 마우제네를 압박했다.

“이미 상단 쪽에 손을 써두었지만,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멍청한 것. 애새끼들밖에 안 남은 집안을 밀어버리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서 질질 끌어?”

“거듭 진행하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같은 다섯 별 공작가인 만큼…….”

“변명은 필요 없다. 반드시 내년까지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그 땅’을 되찾아오도록 해.”

칼란도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칼날을 씹듯 말했다.

“못 하겠나?”

“……아닙니다. 조금 더 강력하게 압박을 넣어보겠습니다.”

마우제네는 현명한 딸이라면 아버지를 포기하고도 남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이 꼴을 보아왔다.

그녀가 무심한 눈으로 제 부친을 흘겨보는 동안, 검은 고양이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역시 이상한데.’

마우제네는 그 고양이에게 묘한 느낌을 받았다.

칼란도가 무섭게 소리치고, 로바르네가 울어도 미동조차 없는 고양이.

울기는커녕 혀를 날름거릴 뿐,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들을 빤히 지켜만 본다.

똑똑똑.

때마침 문밖에 있던 시녀가 조심스레 노크하자, 눈물을 훔치던 로바르네는 로브를 뒤집어썼다.

황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버님. 언제부터 고양이를 키우셨습니까. 그것도 검은 고양이를.”

“네가 알 것 없다.”

마우제네의 물음에도 칼란도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로바르네 밖으로 나가고, 마우제네가 한숨을 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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