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누구시죠?”
“이거 소개가 늦었습니다.”
사내의 노란 눈이 보석을 발견한 까마귀처럼 반짝였다.
“저는 베가 상단의 주인, 레이븐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내일부터는 도미닉 양조장의 주인이기도 하고요.”
“뭐라고?!”
라이그너 상단주가 펄쩍 뛰었다.
“도미닉이 자네에게 양조장을 팔았단 말인가?”
“그래. 오늘은 그 소식 때문에 찾아온 거야.”
“말도 안 돼. 그 양조장은 4대째 이어져 온 가게라 죽어도 팔지 않겠다고 했는데!”
“사람 사정이라는 게 다 돈 앞에서는 무색해지는 거 아니겠어?”
레이븐은 적의를 모르는 천진한 얼굴로 미하일에게 악수했다. 그가 몸을 반쯤 틀며 말했다.
“뭐 그렇게 됐으니, 밀린 양조장 대금을 한 번에 치러 주시죠.”
힐데가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일부러 상단이 빚을 지고 있는 가게를 인수한 건가?’
자금을 조달하려는 걸 방해하려고?
“정확히 400만 케루블입니다.”
“이…… 이……!”
“참, 그간 대금을 미뤘으니 2할 5푼의 이자도 함께 내시고.”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건가! 우리 상단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만일 대금을 못 내겠다면.”
딱, 소리가 나도록 지팡이를 짚은 레이븐 상단주는 잠시 미하일 쪽을 힐끔 보았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다른 방법?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캄파넬.”
“……뭐?”
“캄파넬 지방 말입니다. 그 땅을 주신다면 대신 갚은 셈 쳐 드리죠.”
라이그너 상단주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또 한 명, 말문이 막힌 사람이 있었다. 바로 힐데가르트였다.
‘캄파넬?’
단순한 우연인가?
그 땅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저자가 알 리 없다.
하지만 왜 하필 캄파넬을 딱 짚어서 말하는 거지?
“이 염치 없는 작자가 어떻게 감히 캄파넬을 들먹이나!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알지요. 선선대 공작께서 노다지 광산을 주고 사 온 거지 같은 땅이라면서?”
“입조심 하게!”
“거, 빚을 땅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남는 장사 아니오? 빚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는 돈으로 돌려드리리다.”
레이븐 상단주는 태연한 얼굴로 귀를 후볐다.
“나름 제안하러 온 거니 그렇게 도끼눈 뜨지 마시고…….”
“돌아가게.”
라이그너 상단주가 딱 잘라 말했다.
“그 땅은 선선대 공작께서 형제분의 유해를 발굴하면 모셔오는 걸 조건으로 지주 상단에게 맡기신 땅이야. 우리가 관리한다지만, 소유권을 가진 건 아니네.”
“거참…….”
“뭣보다! 지주 상단의 책임자로서 공작가와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네!”
“어차피 공작가에서도 필요 없을 땅 아닙니까? 상단주께서도 함께 설득해 주시면 잘 풀릴 일인데, 이렇게 완고해서야.”
레이븐 상단주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라이그너 상단주를 흘겨보았다.
“마침 이렇게 뵈었으니 참 잘된 일입니다, 소공작님.”
레이븐 상단주는 곧바로 미하일을 설득하려 했다.
“아카락시아 소공작님, 잘 생각해 보시지요,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땅만 있으면 잘 사는 시절은 곧 끝날 겁니다.”
그의 시선이 금방 미하일에게 돌아갔다.
“캄파넬은 농사도 못 지을 땅 아닙니까. 그런 곳을 계속 가지고 가실 겁니까? 차라리 저희 상단에 넘기시지요.”
“레이븐 상단주님.”
미하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죄송하지만 저도 라이그너 상단주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얼라리오?”
“그곳엔 실종되신 대고모님의 유해가 묻혀 있습니다. 돈이 아무리 궁해도 팔 수 없습니다.”
라이그너 상단주가 맞는 말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이븐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쳤다.
“소공작님, 세상은 돈이 전부입니다. 고결한 선대께서 고집 피우신 걸 80년이나 감당하셨으면 이제 도리는 다하지 않았습니까?”
“아뇨.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을 모르시나 봅니다?”
레이븐 상단주가 고개를 내저으며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당장 밀린 대금 때문에 지주 상단이 파산하면 공작가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하일은 상대를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느라, 제 여동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예? 생각해 보십시오. 지주 상단이 파산하면 앞으로 영지가 어떻게 될지.”
“레이븐 상단주님.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죠.”
미하일의 분노는 너무 차분하고 고요해서, 힐데가르트가 아닌 다른 사람은 뒤늦게 깨달을 정도였다.
화들짝 놀란 라이그너 상단주가 무섭게 소리쳤다.
“돌아가게, 레이븐. 이 무슨 무례인가?”
“두 분 다 좋은 제안을 하러 온 사람한테 이러는 걸 보면 앞날이 뻔합니다, 그래.”
“이, 이……!”
“그래요, 돌아가지요. 마침 입구에서 뵈었으니 시간 낭비는 덜었네.”
“당장 꺼지게!”
“비앙카! 아버지는 괜찮으시냐?”
“네, 네?”
수다스럽게 떠든 남자가 지팡이를 짚은 채 빙글빙글 웃으며 비앙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친구분들께서 사이 돈독하게 지내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마음이 무거우시겠지.”
“……그게 무슨 소리세요?”
여태 함부로 나서지 못했던 비앙카가 눈을 크게 떴다.
라이그너 상단주의 눈도 솔방울만큼 커졌다.
“아직 듣지 못했니? 안토니오 씨도 다음 달부터 베가 상단으로 출근하기로 했는데.”
“네?!”
“뭐, 뭐라고!”
“자세한 건 집에 가서 아버지께 물어보고.”
툭툭.
레이븐이 비앙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음 달부턴 네 아버지가 대신 양조장을 맡아주실 테니 안심이구나. 베가 상단으로 놀러 오거라. 너라면 언제든 환영하마.”
그 순간 힐데가르트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까만 장갑과 소매 틈새.
레이븐의 손목 안쪽에는 까마귀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 * *
돌아오는 마차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미하일은 레이븐 상단주에게 들었던 말 때문에 화가 나 있는 눈치였다.
평소라면 그를 달랬을 힐데가르트였으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이유는 당연히 브린힐드 지주 상단과 캄파넬 활석 채석장 때문이었다.
‘복잡하네.’
힐데가르트는 한숨 쉬었다.
80년 전, 힐데가르트는 마성신을 봉인하기 위해 제자 플람은 물론, 많은 다섯 별 공작가의 기사와 함께 그곳을 습격했다.
위험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죽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채.
‘레이븐 상단주는 무슨 속셈이지?’
캄파넬을 본거지로 삼았던 검은 별 교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마성신이 봉인당했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언에게 들은 말이니 틀림없었다.
그곳에 흘렀던 막대한 피에 상인은커녕 잘 훈련된 기사도 발 들여놓고 싶어 하지 않는 땅이다.
그런데 왜?
왜 활석밖에 없다는 땅을 왜 요구하는가.
고민은 갈수록 깊어져 갔다.
하지만 무엇 하나 경쾌하게 결론 나는 건 없었다.
결국 힐데가르트는 이유를 찾는 걸 멈췄다.
‘일단, 냉정하게 생각하면 레이븐 상단주의 제안은 나쁘지 않아.’
그녀가 미하일을 보았다.
‘고결한 선대께서 고집 피우신 걸 80년이나 감당하셨으면 이제 도리는 다하지 않았습니까?’
미하일은 그 말에 화를 냈으나, 힐데가르트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 시체는 어차피 거기 없어. 넘겨준다 해도 큰 문제는 없지.’
마성신 봉인과 함께 일어난 마력 폭풍으로 그녀의 몸은 먼지가 되었다.
동생의 유해를 찾으려고 보석 광산을 내놓은 레온하르트에게는 면목 없는 일이지만, 땅을 파헤쳐봤자 뼛조각 하나 건지지 못하리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땅을 넘기고 지주 상단을 지키는 게 맞지 않을까?
“힐데. 오늘 저녁은 레디스랑 전하랑 셋이서 먹도록 해.”
“오빠는 어떡하려고?”
“난 바로 황실에 편지를 써야 할 거 같아.”
“철광석 때문에?”
“응.”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가르트는 복잡한 눈으로 그를 본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응?”
“난 레이븐 상단주의 말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은데, 오빤 어때?”
“…….”
“사실, 그 땅이…… 그, 80년이면,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
“80년이야 오빠. 대고모님 유해가 남아 있었다면 진작 발견…….”
“힐데.”
“아니면, 최소한 어, 유해를 발견하면 꼭 넘겨달라고 약속하고 거래하는 건…….”
“힐데!”
힐데가르트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처음이었다. 미하일이 그녀에게 언성을 높인 게.
“그건 안 돼.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놀란 힐데가르트는 하려던 말을 잊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대고모님의 유해가 묻힌 땅은 팔아도 되는 거야? 그럼 그다음은?”
“…….”
“할머니의 목걸이까지는 넘겨도 되는 거야? 아버지의 초상화는 넘기면 안 되고?”
“……오빠.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어.”
우리에게 급한 건 지주 상단을 지키는 거라고, 거긴 그리 가치 있는 땅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미하일의 시선은 그녀의 말을 막았다.
“힐데, 사람에게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게 있어.”
미하일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우리가 그 선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한 번 넘으면 그다음에 넘는 건 더 쉽기 때문이야.”
“…….”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안 했으면 좋겠어.”
힐데가르트는 묘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뭐라고 말하면 미하일이 알아들을까?
있잖아, 미하일.
사실 그 땅을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는 건 그렇게 큰 의미가 없어.
네겐 미안하지만 유해는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거야. 레온 오빠는 괜한 짓을 한 거야.
“…….”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치게 많았다.
하지만 그건 힐데가르트의 입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쁘지만, 어쩐지 안타깝고 미안한 기분이라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