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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64)화 (64/166)

63화

어?

레이븐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사태를 다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퍼억!

“컥……!”

뒤로 굴러간 레이븐의 몸이 담벼락에 부딪혔다.

숨 막히는 고통이었다. 그가 무심코 무기를 놓쳤다.

‘이게 무슨 일이지?’

레이븐이 기대한 상황은 이런 게 아니었다.

뒤이어 퍽, 퍽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숨을 꺽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눈을 뜬 레이븐의 눈앞에 보인 광경은 가발을 벗어 던진 은발의 소년이 서너 명을 한 번에 제압하는 모습이었다.

‘아뿔싸!’

가까이에서 보니 알겠다.

비앙카인 줄 알았던 소녀는 조금 더 큰 키의 소년이었다. 여장한 상대에게 꼼짝없이 놀아난 것이다.

머리에 피가 몰린 레이븐이 악을 질렀다.

“안토니오, 너 이 망할 자식! 함정을 팠구나!”

“뒤로 물러나세요, 안토니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 직후였다.

“경비대! 이쪽이에요!”

기다렸다는 듯 경비 대원을 부른 소녀가 도망치려 하던 레이븐의 퇴로를 막았다.

“큭, 제길……!”

현장에서 붙잡히는 한 형벌은 피할 수 없다.

레이븐은 그녀를 밀치며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힐데가르트가 아니었다.

퍼엉! 펑!

“흐아아아악!”

“힐데!”

“괜찮아! 내가 한 거니까!”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난데없이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도 모자라 레이븐의 가랑이 사이로 화염구가 내리꽂혔다.

혼비백산한 레이븐은 유리컵에 갇힌 개미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멈춰 섰다.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겁니까.”

레이븐은 자신과 마주한 안토니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상단을 나간다고 하면 내가 실력 행사를 할 거라고 예상해서……!’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무기를 든 경비대원이 그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븐 상단주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죄목은 폭행이었는데, 그것도 조직적인 행동이란 점에서 죄질이 몹시 나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레이븐 상단주가 아닌 다른 사람의 분노가 더 컸으니.

“젠장, 이런 꼴을 하고 밖을 돌아다니게 되다니……!”

바로 힐데가르트의 부탁에 못 이겨 여장을 했던 레디스였다.

“힐데! 너 나를 물 먹이려고 작정한 거지?”

“아니야. 왜 그런 소릴 하고 그래?”

힐데가르트가 히죽 웃었다.

“엄청나게 잘 어울려. 내 언니 할래?”

“그게 오빠한테 할 말이냐!”

비앙카의 안 입는 옷을 빌려와 몸에 맞게 수선해 입혔다 해도, 레디스는 누가 봐도 여장한 남자였지 절세 미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람한 어깨를 감싸는 연노란색 리본이 괴이한 인상을 주면서도 잘 어울렸다.

힐데가르트는 그를 놀리고 싶어지는 마음을 꾹 참았다.

“이런 건 내가 아니라 미하일 형이 해야 잘 어울린단 말이야!”

“그렇지만 미하일은 이럴 땐 도움 안 돼. 오빠처럼 두들겨 패긴커녕 얻어맞을걸?”

“큭…….”

차마 반박하지 못하는 레디스가 입술을 꽉 물었다. 대놓고 말은 못 해도 동의하는 모양이다.

사실 진심으로 이 역할을 맡겨보고 싶은 건 키스케였지만, 농담으로 권해봤다가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이 쏟아졌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걸로…….’

힐데가르트는 몸이 밧줄로 묶인 레이븐 상단주에게 다가갔다.

레이븐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다…… 당신은…….”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무릎을 꿇은 레이븐의 눈에 힐데가르트가 비쳤다.

“아카락시아의 막내 공녀예요.”

“그럼, 그때…….”

“네. 당신이 미하일에게 귀족의 도리는 다 지키지 않았냐며 설교했을 때 옆에 있던 꼬마애요.”

레이븐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겨우 기억났다. 소공작 미하일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그 꼬마였다.

그런데 그 쪼그마한 솜뭉치가 왜 여기 있냔 말이다.

“당신이 왜……?”

“궁금해요?”

경비대원을 뒤로 물린 힐데가르트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허업……!”

“나도 궁금해요. 랑케르트 가문과 당신이 무슨 관계일까 싶어서요.”

힐데가르트는 레이븐의 손목 안쪽을 확인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까마귀 모양의 문신.

마우제네 랑케르트에게서 본 것과 똑같다.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한층 싸늘해졌다.

“랑케르트에서 지시했나? 아카락시아 지주 상단을 몰락시키라고?”

“나, 난 아무것도…….”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손가락이 하나씩 부러져서 포크도 쥐기 힘들어질걸?”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였다.

“이미 증언은 받아놨어. 레이븐 상단주. 돈으로 회유하지 못한 직원들은 쫓아다니며 협박했다며?”

“……!”

“곧 베가 상단의 사무실을 수색할 거야.”

파랗게 질려 있던 레이븐의 얼굴은 이제 새카맣게 변했다.

태우라던 명령을 어기고 보관하고 있었던 마우제네의 편지가 생각나서였다.

“아, 안 돼! 수색은…….”

“다시 묻겠어. 아카락시아의 지주 상단을 몰락시키라고 한 건 랑케르트야?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지?”

레이븐 상단주는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질끈 감았다.

절망의 빛이 역력하던 얼굴에 서서히 체념이 드리워졌다.

“지주 상단을 몰락시키란 명령은 없었소.”

“그러면?”

“……수단과 방법은 묻지 않을 테니 캄파넬 지방을 아카락시아 가문에게서 빼앗아와라.”

“…….”

“내가 명령받은 건 그것뿐이오.”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자, 자세한 이유는 나도 모르오. 다만, 공작인 칼란도 랑케르트가 그 땅에 유독 집착하고 있단 말만……. 헉…….”

그렇게 말하던 레이븐 상단주가 당장에라도 토할 것처럼 헐떡였다.

“으헉. 컥……!”

“잠깐!”

놀란 힐데가르트가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예기치 못한 광경을 보았다.

‘문신이…… 타들어 가고 있어?’

까마귀 모양의 문신은 불 속에서 타들어 가는 종이처럼 소리 없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봐요! 정신 차리라고요!”

힐데가르트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레이븐은 그녀의 손을 피해 몸부림치더니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숨이……!”

경비대원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들을 살폈다.

이변을 파악한 레디스도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힐데! 무슨 일이야? 괜찮아?”

“난…… 괜찮아. 나한텐 아무 일도 없었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어디 아프대?”

입을 뻐끔거리며 몸을 경련하던 레이븐 상단주를 바라본 것도 잠시.

“……저주야.”

“뭐?”

“기억을 지워버리는 저주에 걸려 있었어, 저 사람.”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

레이븐 상단주는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기억을 잃었다 해도 그 흔적까지 전부 지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경비대장은 계속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며 횡설수설하는 레이븐을 강하게 추궁했다.

그러나 레이븐의 태도는 여전했기에, 그를 잡아 가둔 뒤 폭행에 가담한 사람들을 심문하고 단의 사무실을 수색했다.

레이븐이 쓰던 책상에서는 수상한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힐데가르트는 그 편지를 제일 먼저 입수하여 읽어 볼 수 있었다.

‘지주 상단을 몰락시키란 명령은 없었소.’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말마따나 랑케르트 측 편지에는 지주 상단을 직접 파산시키라는 명령은 없었다.

편지를 태우라는 말이 적혀져 있는 걸 보면, 증거가 남길 바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왜?’

레이븐 상단주를 추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내내 의문이었다.

‘이제 와서 랑케르트가 캄파넬을 원하는 이유가 뭐지?’

그녀가 아는 한, 캄파넬은 값어치 있는 땅이 아니다.

서부 남단의 외진 구석에 있는 땅.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하기 좋은 땅.

성기사단의 감시를 피하던 검은 별 교단은 그 이유로 캄파넬에 숨어들었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았다.

힐데가르트가 잃어버린 보석 광산을 생각하면 속이 뒤집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캄파넬은 검은 별 교단의 본거지가 됨으로써 끔찍한 땅이 되었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사자소생(死者蘇生).

그 소원을 이루고자 수많은 광신도가 스스로 목을 매고 목숨을 제물로 바쳤다.

게다가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아무런 상관 없는 이들까지 제물로 바쳤기에, 수도 없이 많은 피가 흘렀다.

그런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땅이니 보석 광산 열 개를 주고 사 올 만한 곳이 아니었단 소리다.

그런데 레온하르트가 피눈물을 흘리며 사 왔을 땅조차 80년 후 다시 빼앗으려 든다고?

‘제정신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토니오에게 물어보았지만, 여전히 캄파넬은 활석 말고는 얻을 게 없는 땅이었다.

그렇다는 건…….

‘뭔가가 있어.’

랑케르트가 단순히 마음보가 사나워서 그렇게 구는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굳이 상단주의 기억을 지울 필요까지는 없다.

‘아무래도 정보를 더 모아봐야겠어. 사람을 알아봐야겠네.’

힐데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우두머리가 구속당한 베가 상단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무리해서 농장과 양조장을 인수하고, 지주 상단과 출혈 경쟁을 했던 여파로 납품일을 지키지 못했다.

그 결과 엄청난 위약금을 물게 되었고, 레이븐의 협박에서 벗어난 직원들은 상단의 분위기를 파악한 즉시 일을 그만두었다.

그사이 브린힐드 지주 상단은 베이비 파우더 사업과 함께, 활석 가루를 종이 공장에 납품하는 등 착착 활로를 찾아갔다.

희소식은 하나 더 있었다.

“소, 소공작님! 정말이십니까?”

라이그너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듭 물었다.

흥분한 그와 달리, 미하일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네. 방금 황실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여기 읽어보시죠.”

미하일이 라이그너 상단주에게 내민 것은 바로 철광석의 판매량을 늘려도 좋다는 허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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