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제법인데?’
이건 힐데가르트도 놀랐다.
그녀가 아는 한, 황실에서 철광석의 거래량을 조절해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마법을 부리긴요. 최선을 다해서 황실을 설득해 본 것뿐입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이는 미하일의 겸손이었다.
미하일은 철광석이 무기의 재료로 쓰일까 봐 우려하는 황실 측으로 세 번이나 편지를 써 보냈다.
그는 무작정 떼를 쓰지 않고, 선박이나 마차 바퀴 같은 이동 수단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며 용도를 분명히 밝혔다.
거기에 허튼 마음을 품을 리 없는 힐데가르트가 아카락시아 공작가로 돌아왔다는 걸 막시밀리언이 알고 있었기에 허락된 경사였다.
“상단에서 힘든 일이 많으셨을 텐데, 이렇게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힘이 되고말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확히 한 달 전, 제발 좀 도와달라며 고개를 숙였던 라이그너 상단주는 이제 전혀 다른 이유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힘써주신 만큼 지주 상단 운영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이그너 상단주는 도움을 준 사람들을 전부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레디스와 노바를 만나서도 감사를 전했다.
황태손 또한 만나 뵙고 싶다 했으나, 키스케 본인이 거절해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어떻게 생각해?”
라이그너 상단주가 돌아간 뒤, 힐데가르트는 일부러 미하일이 머무는 서재로 돌아왔다.
“뭘?”
“랑케르트 공작가 말이야. 오빤 화 안 나?”
그녀가 랑케르트 공작가의 도장이 찍힌 편지 봉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 복잡하네.”
편지의 내용을 확인해 본 건 미하일도 레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 사람은 편지를 앞에 두고 길길이 날뛰지 않았다.
오히려 극도의 분노는 뜨겁기보다 차갑다는 걸 느꼈을 정도였다.
“분하지만, 당장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거야. 공작가를 지켜야 하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당장은 랑케르트에게 트집잡힐 일 없게 공회에 꼬박꼬박 출석해야겠지?”
옳은 판단이다.
미하일은 화가 나도 단호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내심 흐뭇하게 그를 보았다.
“힐데, 넌 어때?”
“나? 내가 뭘?”
“넌 그 편지를 보고 화 안 났어?”
“화나지. 진짜 많이 화났어.”
그래서 오히려 냉정해졌다.
아카락시아에서 랑케르트까지는 물리적인 거리가 있다.
추궁 겸 항의 서한을 보내봤자 답장이 날아올지도 모르겠고, 날아온다 한들 상당한 시일이 걸릴 테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무섭게 웃어?”
“오빠. 이건 만약을 가정하는 이야기인데 말이야.”
힐데가르트가 살짝 웃었다.
“수도와 아카락시아, 오브론, 이베르타, 몬테를로 공작령에는 설치된 이동 게이트가 딱 한 곳에만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야 소외된 공작령은 엄청나게 낙후되겠지.”
“그렇지?”
발프람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랑케르트는 제국의 천장이라고 불린다.
높은 산봉우리와 삼림이 존재하며 막대한 목재를 생산하는 곳.
그러니 이동 게이트의 필요성이 다른 곳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대되네. 랑케르트가 제국에 있는 광산을 모조리 사 와서 우리 앞에 엎드리는 날이.”
“힐데.”
“농담이야.”
“오빠가 네 농담이랑 진담도 못 알아들을까 봐?”
힐데가르트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복수는 취향이 아니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해야겠네.’
그녀는 배부른 맹수처럼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편지를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 * *
랑케르트 공작령.
본가의 공작저 식당에서는 오늘도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막내 공녀 틸리아는 식사의 절반도 먹지 못하고 자리를 피해야 했다.
소녀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칼란도가 소리를 질렀다.
“고작 땅 하나! 그깟 땅 하나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는 주제에 네가 랑케르트를 입에 담아?”
“아버님!”
제게 쏟아지는 욕설이 아니었음에도 틸리아는 주저앉고 말았다.
분노에 찬 칼란도의 목소리는 사냥감의 숨통을 옥죄는 맹견 같았다.
공작이 딸을 향해 폭언을 내뱉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특히 요즈음, 칼란도는 전보다 더 이성과 판단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저주에 걸려서 차분하게 미쳐가는 사람 같달까.
오가는 노성은 계속되었다.
주저앉은 소녀가 양팔로 귀를 틀어막으며 소망했다.
‘제발……. 제발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어.’
그때,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날렵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가면 안 돼. 아버지가 싫어하실 거야.”
틸리아는 고양이를 재빨리 품에 안았다.
고양이는 의외로 얌전히 안겼다.
그녀는 검은 털에 살짝 보랏빛이 감도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기다려. 밥은 조금만 있다가 챙겨줄게. 조금만 더 조용해지면 가자.”
야옹.
고양이가 대답하듯 울었다.
따뜻한 온기는 제법 위로가 되었다. 마치 따뜻한 물이 담긴 주머니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뒤 식당에서의 소란이 멈췄다.
쿵쿵대는 걸음 소리와 함께 칼란도와 로바르네가 자리를 뜨는 게 느껴졌다.
틸리아는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예상대로 깨진 식기와 쏟아진 음식으로 식당은 엉망이었다.
“……틸리아.”
“언니, 괜찮으세요?”
“식사를 새로 준비하라고 이르마. 나 때문에 제대로 먹질 못했겠구나.”
“아니에요, 아녜요. 전 괜찮아요.”
이미 식욕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틸리아는 극구 사양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 대신, 이 아이 먹이라도 챙겨줄까 해서…….”
“그 고양이 말이냐?”
“네. 요즘 돌봐주는 고양이예요.”
하루 대부분을 저택에서 보내는 틸리아였다.
마우제네는 막냇동생을 안쓰럽게 보며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이름은 지어주었니?”
“네!”
틸리아가 고양이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플람이요! 이 고양이가 직접 꿈에 나와서 알려줬어요!”
* * *
며칠 뒤, 힐데가르트는 지주 상단을 찾았다.
“비토라고 합니다.”
라이그너 상단주가 소개해 준 청년은 여동생인 비앙카보다 밝은 적갈색 머리였다.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침착하고 차분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라이그너 아저씨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이 크게 신세를 졌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힐데가르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비토라고 했지?”
“네. 브린힐드 상단에서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있습니다. 마차를 관리하기도 하고요.”
“직접 마차를 모는 건 아니고?”
“몰기도 하고 수리도 합니다. 실력은 자신 있습니다. 이베르타의 제방까지 다녀온 적도 있거든요.”
“자신 있을 만하네. 좋아. 비토, 앞으로 너에게 정보 수집을 맡길 거야.”
비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가 필요하신가요?”
“캄파넬 지방에 대한 소문이나 정보가 필요해.”
“활석 광산이 있는 그곳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그리고 랑케르트 가문에 대해서도 알아봐 주겠어?”
힐데가르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베가 상단의 뒤에는 랑케르트 공작 가문이 있었어.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캄파넬을 노렸는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어.”
“알겠습니다. 빠를수록 좋으신 거죠?”
“정확하면 더 좋고.”
힐데가르트는 비토의 빠릿빠릿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비토도 귀족 특유의 강압적인 면모가 없는 그녀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럼 우선 상단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전반적인 조사가 끝나면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줘.”
두 사람의 대화는 원만하게 마무리되었다.
비토가 나가고 얼마 안 가 라이그너 상단주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네.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요. 똘똘한 친구이니 무슨 일을 맡겨도 잘할 겁니다.”
“일이 바쁘신가 봐요.”
힐데가르트는 듬성듬성 나 있는 수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상단 일에만 신경 쓰시는 거 아니에요?”
“몸이 고생하는 게 낫습니다. 마음이 고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이 좋지요.”
힐데가르트가 제안한 베이비 파우더 사업 덕분에 상단은 뜻밖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까요.”
“사업이 잘되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하지만 상단주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해요.”
힐데가르트는 조곤조곤 말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요.”
우연한 기회로 발견한 상품 하나만 믿고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라이그너 상단주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녀가 본론을 꺼냈다.
“저하고 사업 하나 하시는 건 어떤가요, 라이그너 상단주.”
“사업이요?”
“네. 활석 말고 다른 사업이요.”
“…….”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아마 마음에 드실 거예요.”
힐데가르트는 눈을 깜빡거리는 상단주에게 영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