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가르치는 사람의 의욕이 넘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나친 주입식 교육은 되레 좋지 못한 영향을 낳게 마련 아닌가.
레디스는 오죽하면 황태손이 수업을 거부했을까 싶었다.
사실 힐데가르트가 마법을 쓰는 걸 보았을 때만 해도, 그 또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조금은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사흘도 못 가 증발했다.
“아무리 그래도 도망치는 게 어딨어! 수업 거부는 너무하잖아!”
“아, 예. 한마디로 넌 자기 의욕이 과했다는 생각은 아예 안 한다 그거지?”
“쪼끔은 하지. 아주 쪼끔!”
“말을 말자.”
레디스는 그녀의 머릿속에 반성과 개선이라는 단어를 심어주길 포기했다.
물론 힐데가르트도 할 말은 있었다.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는 거 아니야! 재능이 없으면 아예 말도 안 한다고!”
그녀가 답답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키스케는 화염 속성 마법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마석으로 확인해 보았으니 틀림없었다.
최소한 화염 마법만큼은 바짝 공부한다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성취를 이룰 터였다.
“재능이 없으면 1년 내내 노력해야 겨우 할 수 있는 걸 한 달만 고생하면 되잖아. 아까워 죽겠어!”
“그래도 좀 천천히 가는 게 좋지 않아?”
레디스가 레몬주스를 마시며 타일렀다.
“이인삼각에서 한 사람만 빨리 달리면 엎어지는 거잖냐. 정작 키스케 전하는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
‘그래서 더 속 터진다고!’
힐데가르트가 마법을 배웠던 환경과 비교해 보면 키스케는 그야말로 호사를 누리는 상황이다.
책이든 마법이든 스승이든 직접 구해서 공부했어야 했던 그녀였다.
그에 비하면 키스케는 식은 수프를 마시듯 쉬운 일인데!
“네 마음은 알겠는데, 결국 흥미를 느끼고 배워야 기억에 남는 거잖아. 뛰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날아보라고 요구하면 안 되지.”
“그건 그렇지만…….”
“장담하는데, 그렇게 혹독하게 가르치면 나중엔 아예 흥미를 잃어버릴걸?”
체스를 배우는 모든 사람이 체스 마스터가 되겠다고 달려드는 건 아니다.
취미로, 혹은 적당히 게임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만 배우려는 사람도 있다.
“하……. 설마 이런 걸로 애먹게 될 줄은 몰랐어.”
생각해 보면 그녀가 가르친 제자들은 하나같이 학구열에 불타거나 오기를 부리며 달려드는 타입이었다.
승부욕에 불타던 막시밀리언.
마법과 연금술에 빠져서 밤낮도 잊고 연구실에 틀어박히던 플람.
그 둘에 비하면 키스케는 재능도 있고 이해력도 빠른데 미적지근한 태도였다.
요 일주일은 똑같은 마법이라도 배우는 자세가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어쩐지 노바가 내 손을 꼭 잡고 공녀님만 믿는다고 하더라니.’
정치나 외교, 역사, 외국어 같은 황족으로서의 기본 소양은 모두 익혔지만 그뿐이라던가.
열의 있게 배운 수업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냐? 포기할 거야?”
“……포기?”
그럴 수야 없지.
힐데가르트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 * *
레디스는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는 놀자며 그녀를 구슬렸다.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는 체스도 포커도 오셀로도 당구도 승마도 탁구도 싫다며 거절한 힐데가르트를 향해 대마법사나 되어 버리라며 꽥 소리친 뒤 온실을 떠났다.
‘그냥 차 한잔하자고 했으면 그러자고 했을 텐데.’
한 끗 차이로 어긋난 레디스가 들었으면 짜증을 부렸을 속마음이었다.
두 시간 뒤, 힐데가르트는 마음을 다스린 끝에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응? 피아노 소리?’
별채에 피아노가 있었던가?
단조롭지만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멈춰 선 그녀를 제일 먼저 발견한 건 노바였다. 그가 사과 바구니를 든 채 인사했다.
“공녀님.”
“안녕, 노바. 키스케는 별채에 있어?”
“계십니다. 역시 오늘 수업이 순탄치 않았나 봐요?”
“응. 좀 그럴 일이 있었어.”
“전하께서 일찍 돌아오시길래 그런 게 아닐까 예상했습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노바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웃었다.
“전하를 만나러 오셨나요?”
“맞아.”
“그럼 마침 잘됐네요. 이거 받으세요.”
노바가 그녀를 불러 세우더니 가지고 있던 사과 바구니를 건넸다.
빨간 사과는 하나같이 탐스럽고 알이 굵었다.
“웬 사과야?”
“전하께서 사과를 좋아하시거든요. 요즘은 잘 안 드시지만…….”
“그래?”
힐데가르트가 엉겁결에 사과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이거라도 먹이면 기분 좀 나아지려나?
“괜찮으시면 대신 전해주세요. 기분이 풀어지실 수도 있으니까요.”
힐데가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노바가 기다리겠다며 손을 흔들자, 그녀는 용기를 내서 별채로 들어섰다.
“키스케?”
별채의 문을 열자 힐데가르트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길게 늘어졌다.
“키스케! 나 들어간다?”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던 걸까. 피아노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발견한 키스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그의 연주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문가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커튼은 피아노 소리에 춤추듯 나부끼고 있었고, 부드러운 바람이 키스케의 앞머리를 스쳤다.
쨍한 루비처럼 색이 밝은 눈동자.
그의 붉은 눈은 오로지 건반에만 꽂혀 있었다.
넓은 창문으로 햇빛과 함께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햇살이 흡사 그를 위한 무대 조명 같았다.
‘손가락이 길구나.’
빼어난 얼굴이며 옆모습이 백금으로 빚어둔 조각상 같다.
차갑지만 진지한 시선이며 내리깐 눈빛과 긴 속눈썹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년미를 간직한 채였다.
한 폭의 명화 같은 외모였다. 무심코 그녀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듣기 좋다.’
재주가 많았구나. 외모만큼이나 뛰어난 연주 실력이라니. 힐데가르트는 조용히 감탄했다.
깊은 떨림을 지닌 다정한 선율이 바람을 타고 울려 퍼진다. 라일락 향기처럼 깊이 남아 애틋한 마음이 일었다.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던 그녀의 표정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
인기척이 느껴졌던 걸까?
연주가 끝나고,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키스케가 흘러내린 소매를 다시 걷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 수업 안 해.”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힐데가르트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주 실력이 정말 뛰어나구나.”
“노바인 줄 알았더니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키스케는 수업을 거부하며 온실을 나갔던 때처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수업하자고 온 거 아니야.”
힐데가르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과가 담긴 바구니를 내밀었다.
“일단 이거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할래?”
“…….”
“쫓아낼 거야?”
“……앉아.”
정말 사과를 좋아하나?
힐데가르트는 신기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내실 소파에 앉았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는 줄은 몰랐어.”
“어쩐지 조율이 덜 되어 있던데. 어제 손 봤어.”
“취미로 치려고?”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키스케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그녀가 내민 바구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웬 사과야?”
“내 마음이 담겼지. 키스케. 우리 이야기 좀 해야 할 거 같아.”
“무슨 이야기.”
“수업 말이야.”
힐데가르트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의외로 키스케는 사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아무래도 너랑 내 성향이 안 맞는 거 같아. 너도 그렇게 느끼지?”
“…….”
“그래서 수업을 거부한 거잖아. 아니야?”
“그래.”
키스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거든. 너랑 내게 필요한 게 뭘까 싶어서.”
“뭐였는데?”
“대화. 인간은 설득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열쇠다. 칼 펠레의 <인간론>이네.”
“맞아.”
“노바가 좋아하던 책이었지.”
이것 보라고.
이렇게 머리가 좋은 앤데.
수업 거부도 모자라 대낮부터 뚱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내 속이 타지.
‘잘생기지만 않았으면 두 배는 더 화냈다.’
그래도 대화를 시도한 보람이 있었다. 키스케의 미간은 제법 느슨해져 있었다.
“키스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수업 듣기 싫어?”
“…….”
“일주일 정도 들어보니 별로 재미가 없었어?”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와도 힐데가르트는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키스케는 분명 제 의지로 마법을 배우겠노라 말했다.
어차피 황성에서는 할 일도 없고, 할아버지의 권유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빈약한 다짐은 쉽게 휘발되게 마련이다.
배워보니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 수업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이제야 정답이 나오네.”
키스케의 시선이 그녀를 꿰뚫듯 선명했다.
“수업을 듣기 싫은 것도,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것도 아니야. 그보단 방식에 문제가 있지.”
“왜? 어떤 점이 싫었어?”
“그걸 몰라서 물어?”
키스케가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힐데가르트는 잠시 울컥했으나 곧바로 어른스럽게 타일렀다.
“알 리가 없잖아. 말해준 적 없으니까.”
“…….”
“반대로 물어볼게. 넌 내가 일주일간 왜 그렇게 가르쳤는지 알아?”
“날 괴롭히는 데 재미가 들려서.”
“아니야.”
“가르치는 데 요령이 없어서?”
“전혀 아니야.”
“네가 원래부터 이상한 괴짜 마법사니까?”
“아닙니다!”
“그럼 날 좋아해서 괴롭히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런 이유가 아니면 용서가 안 되는데.”
“꿈 깨세요!”
울컥한 키스케가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힐데가르트는 콧바람을 뀌었다.
“네가 가진 재능이 아까워서야.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게 마법을 익힐 수 있으니까.”
“내가?”
“막…… 폐하께 듣지 않았어? 난 네가 재능이 있다고 말했는데?”
“딱히 그런 말씀은 하신 적 없어.”
막스 이 녀석은 그럼 무슨 말로 설득한 거야?
힐데가르트는 속으로 툴툴댔다.
“네가 그랬잖아. 네 의지로 마법을 배우겠다며. 그러니까 이만큼 굴려도…… 아니, 흠. 가르쳐도 따라올 줄 알았지.”
“…….”
“마법 배우는 거 힘들었어?”
“…….”
키스케는 또다시 습관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조금만 난처해지면 입 다물어버리는 게 습관인가?’
그녀가 제자를 응시하던 것도 잠시.
이내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따끔한 한마디가 나왔다.
“키스케. 마법을 배워보고 싶었다며.”
“…….”
“도망치거나 입을 다물기만 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줘야지. 그래야 네 마음을 알지.”
“알면 뭐가 달라진다는 거야?”
생각보다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온 건 그때였다.
“어차피…….”
키스케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어차피 진심으로 내 심정이 어떤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어. 나는 황태손이고, 내가 겪는 고통은 전부 당연한 거잖아?”
활 쏘는 법을 배울 때는 손가락이 갈라졌고, 수영을 배울 때는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로바르네 2황자비가 고른 선생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아픔 없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내셔야 합니다, 전하.’
키스케를 죽은 아버지와 비교하고, 사촌 동생과 비교하는 선생 앞에서 그는 통감했다.
이 괴로움도, 고통도 결국엔 남에겐 얼마나 잘 버티는지 평가받는 항목에 불과하다고.
힘들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저를 깎아내릴 이유로 변할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던 키스케가 고개를 돌려버리려 할 때였다.
“그렇지 않아. 많은 게 달라질 거야.”
차분한 목소리가 그를 타일렀다.
“키스케. 난 네 말을 무시하지 않을 거야. 가까이에서 듣고, 네 마음을 생각하고, 널 이해할 거야.”
힐데가르트는 다정한 말만큼이나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힘들 때는 힘들다고 해도 돼.”
“…….”
“나는 네 스승이잖아. 내가 아니면 누가 네 편이 되겠어?”
찰나의 순간, 키스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간격을 두고, 그가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적당히 듣기 좋은 말 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얘 또 삐딱하게 나오네. 내가 왜 거짓말을 해?”
“난 싫다고 했어. 수업 따라가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무시한 건 너였잖아.”
“으…… 그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힐데가르트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했다.
“난 그냥 네가 게으름 부리고 싶어서 떼쓰는 줄 알았지. 진짜 힘들어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몰랐다고?!”
“싫다고 투덜거려도 잘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네 할아버지처럼!
차마 마지막 한마디는 덧붙이지 못한 힐데가르트가 슬며시 눈을 피했다.
그러자 키스케의 불만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어지간히 해야 따라가지. 네 사전에는 ‘적당히’라는 단어가 없어?”
드디어 말문이 트인 키스케가 본격적으로 불평을 쏟아냈다.
“누가 일주일 내내 하루도 안 쉬고 여섯 시간 동안 마도학만 공부해?”
“수업이 너무 길어서 싫었어?”
정확하게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던 키스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넌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가르치잖아. 배우는 나는 안중에도 없던데.”
“……내가 그랬나?”
“그랬어. 너 좋을 대로 지식을 쑤셔 넣듯 가르쳤잖아!”
“그렇게 느낄 줄은 몰랐는데…….”
멋쩍어진 힐데가르트가 뺨을 긁적였다.
“내 욕심이 과했나 봐. 미안해.”
“…….”
“진심으로 미안해. 널 통해 내 욕심을 채우려 해서.”
키스케가 수업에 삐딱한 태도를 보이는 걸 깊게 받아들였어야 했나 보다.
힐데가르트는 크게 반성했다.
“앞으론 이렇게 하자. 지금 여기서 우리끼리 약속하는 거야. 앞으로는 어떻게 수업할 건지.”
“그걸 이제 와서 하겠다고?”
“더 늦어지는 것보다는 낫잖아.”
“…….”
“종이랑 펜 있어?”
키스케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으나 곧 필기구와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왔다.
“이건 우리끼리 하는 약속이나 마찬가지니까, 서로 반드시 지키는 거야. 알았지?”
“네가 지킨다면, 나도 그럴 거야.”
“난 약속은 반드시 지켜.”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한 뒤, 변명하듯 덧붙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못 지킨 약속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
“한 번 어기기는 했나 보지?”
“그런 게 있어.”
힐데가르트가 펜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