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충격에 빠진 힐데가르트는 한동안 마법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면에 남아 있는 검은 마법진은 그녀가 익히 알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혼을 수집하는 마법과 비슷한 모양.
‘……소생 마법진……?’
그것은 검은 별 교단의 숙원이나 다름없는 흑마법이다.
제물을 바쳐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 소생 마법.
‘검은 별 교단은 이미 흩어졌어. 이런 걸 그릴 수 있는 건 흑마법사뿐일 텐데…….’
그 마법진에 왜 플람의 흔적이 남아 있단 말인가.
‘설마 이 마법을 플람이 그렸단 말이야?’
그럴 리 없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제자 플람은 흑마법사를 누구보다도 증오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 플람이 그린 거라면?
그가 살아 있다면?
힐데가르트는 누가 볼까 무서워져서 손으로 마법진을 지웠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레디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여동생을 흘끔 보았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힐데가르트의 발걸음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레디스는 크흠, 헛기침한 다음 그녀를 위로했다.
“힐데. 너무 걱정하지 마. 묘지는 오늘부터 잘 관리하면 되지. 묘비석 깨진 것도 없었잖아?”
“어…… 그렇지.”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기에, 레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무서워서 그래?”
“……아니야.”
“왜 부정하고 그러냐. 다 알아. 너 이런 거 무서워하잖아. 미신도 잘 믿고.”
레디스가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예전에 그거 때문에 편지도 했잖아.”
“……내가 그랬었나.”
“기억 안 나? 내가 아카데미에 있을 때,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편지 왕창 써서 보냈던 거.”
“……이상한 소리?”
힐데가르트의 걸음이 멈췄다.
“그거,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저택에서 매일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갓난아기 우는 소리랑 닮아서 무섭다.”
“내가 그런 편지를 했다고?”
“왜 모르는 것처럼 물어봐? 누가 지켜보고 있는 거 같아서 오싹했다며. 내가 그 편지 받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힐데가르트가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 뒤엔…… 뭐라고 했는데?”
레디스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구는 힐데가르트가 의아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다음 편지는?”
“있었겠냐? 내가 아카데미를 그만뒀는데.”
“설마…… 오빠 그거 때문에 아카데미를 그만뒀던 거야?”
“그래. 형이랑 너랑 로빈만 저택에 남겨둘 바에야 학업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
레디스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너 진짜로 하나도 기억 안 나? 고양이가 한참 동안 울고 나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고 그랬잖아.”
“…….”
“맨 처음 쓴 편지에서 그랬잖아. ‘시간이 됐다’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
“힐데가르트?”
우두커니 멈춰 선 힐데가르트는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 *
그녀가 플람을 만나게 된 건 은화 한 닢 때문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하염없이 사람을 지켜보던 그 아이에게 적선하고 돌아섰는데, 뜻밖의 말이 날아왔다.
“은화 다시 가져가세요.”
“뭐?”
“내가 거지로 보여요?”
앙칼진 목소리였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눈곱이 가득 낀 채 땟국이 잔뜩 낀 옷을 입은 소년이 다시 은화를 내밀었다.
“누나 외지인이죠?”
“응, 그런데?”
“난 거지가 아니에요. 이런 건 필요 없어요!”
플람은 처음 만날 때부터 남다른 녀석이기는 했다.
은화 한 닢으로는 커다란 빵을 두 개나 살 수 있고, 그걸 잘 쪼개 먹으면 열흘은 버틸 수 있다면서 적선을 바라던 아이들과는 달랐다.
그 애는 진심으로 힐데가르트의 동정을 싫어했다.
일주일 내내 한 푼도 못 벌어 왔다고 뒷골목 조장에게 죽을 만큼 얻어맞아도, 나는 거지가 아니라 연금술사의 자식이라면서 바득바득 이를 갈던 아이였다.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플람은 은화 한 닢 받지 않았다. 받기는커녕…….
“어젠 말려줘서 고마웠어요. 솔직히 좀 아팠거든요. 치사하게 때린 곳을 또 때려.”
“……플람.”
“이건 선물이에요. 네 잎 클로버인데 행운을 준대요.”
“이런 거 안 줘도 돼.”
“어차피 이거 말곤 줄 것도 없어요.”
플람은 꼬질꼬질한 손으로 그녀에게 네 잎 클로버를 건넸다.
“넌 계속 여기 남을 거야?”
“달리 갈 곳도 없는걸요.”
“…….”
“누나같이 예쁜 사람은 다신 이런 곳에 오지 마요. 안녕.”
그래서 믿었다. 우리의 만남이 서로에게 행운이라고.
“플람, 나랑 같이 갈래?”
그 믿음이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동정이든 우연이든, 행운처럼 찾아온 첫 번째 제자는 그녀를 많이 웃게 했으니까.
레온하르트만큼이나…… 아니, 어떨 때는 레온하르트 이상으로 곁에 붙어 있었던 제자.
“스승님, 이것 보세요! 엘릭서를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뭐? 그때 발견한 레시피는 반쪽짜리였다며? 나머지는?”
“제가 복원했죠.”
“……천재가 천재를 키운다지만, 넌 진짜 천재구나.”
“조합식을 개량할 필요는 있겠지만요. 어때요? 찰랑찰랑 흔들리는 게 꼭 밤하늘을 담아둔 것 같죠?”
“그러게. 예쁘네.”
“저 잘했죠? 그쵸?”
땟국을 지워내고, 잘 먹고 잘 자니 몰라보게 잘 큰 제자였다. 플람은 여우처럼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빨리 칭찬해 주세요, 스승님.”
“어휴, 알았다. 알았어.”
플람은 쓰다듬어줄 때마다 가느다란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꼬리 달린 요물 같은 자식이라며 레온하르트가 노려볼 때면, 힐데가르트의 등 뒤로 몸을 숨기며 피했다.
어느 때는 같이 빌어달라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엘릭서가 실패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플람의 키가 힐데가르트보다 커지고, 손도 커졌을 때.
기르면 예쁘겠다며 칭찬해 준 머리카락이 허리를 훌쩍 넘겼을 때.
아주 많은 순간에 그는 힐데가르트를 눈동자에 담았다.
심지어 막시밀리언이 엘릭서를 만들어달라고 울었을 때조차.
“저는 물약도, 엘릭서도 모두 스승님만을 위해서 만들 거예요.”
“플람. 네 부모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드셨죠. 그래서 검은 별 교단이 납치하려다 죽인 거고.”
“…….”
“저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흑마법사 따위 전부 죽이고, 스승님과 마탑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거예요. 마음이 내킬 때는 막시밀리언도 좀 끼워줄게요.
그러니까…….
“플람! 그만두라는 소리 못 들었어?”
“왜 이런 놈들을 살려두시는 거예요, 스승님. 죽여도 상관없는 놈들인데.”
검은 별 교단의 신도가 도망치는 아수라장 속에서, 힐데가르트가 플람의 팔을 붙잡았다.
열아홉. 힐데가르트를 따라 마성신 토벌에 나선 제자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녀를 바라볼 때는 여전히 상냥하게 웃는 제자였다.
“괜찮습니다. 이런 벌레들은 제가 다 치워버릴게요.”
“그만해! 난 널 살인자로 만들고 싶어서 마법을 가르친 게 아니란 말이야!”
“이런 놈들은 안 변해요. 차라리 죽이는 게 낫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차분하고 온순하다 믿었던 제자는 미친개처럼 날뛰었다.
“스승님은 이딴 것들을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다 끝내면 칭찬 한 번만 해주세요, 네?”
가족을 잃었던 증오가 그렇게 컸던 걸까?
플람은 스스로 목숨을 버려서 제물이 되겠다는 사람들까지 공격하려 했다.
결국 본거지를 습격하기 직전, 그녀는 플람을 막사에 세워놓고 언성을 크게 높였다.
“내일 있을 전투에서 너는 빠지는 게 낫겠다.”
“어째서요?”
“몰라서 묻는 거니? 네 증오는 비정상적이야, 플람.”
“제가요? 아뇨, 이상한 건 제가 아니라 스승님입니다!”
다가올 파국을 몰랐던 최악의 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약혼자를 골라볼 거라는 힐데가르트의 말에 플람의 눈이 돌아갔다.
그가 초조한 낯으로 따졌다.
“제 부모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스승님까지 공격하는 놈들을 왜 살려둬야 해요?”
“무작정 네 손을 더럽히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걸 알잖아!”
“스승님껜 애초에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운 좋게 입양아로 자라셨으니, 저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 말 당장 사과해.”
“싫습니다.”
“내가 입양아라 해도, 너와 다를 건 없어. 내 가족은 너와 오빠이고 숙부님이야. 그거론 부족하니?”
“…….”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진심으로 널 가족으로 생각하며 아끼고 위했고.”
“…….”
“그게 네가 가진 증오를 버릴 이유로는 모자라?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증오를 지울 순 없겠어?”
“하하. 하, 아하하…….”
플람이 손을 뻗었다. 그의 엄지가 힐데가르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한때는 저에게도 스승님이 가족일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
“눈치채셨던 거 아니셨나요? 제가, 스승님을…….”
“그만해.”
“당신을 얼마나…….”
플람의 애정이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는 걸 알게 된 밤.
고별이 그림자를 타고 넘어와 두 사람을 껴안았다.
“스승님께 마법을 배우는 게 아니었어요. 가족이었다면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
“매일 밤 웃으며 키스해 주실 게 아니라면, 제게 간섭하지 말아주세요. 스승님.”
플람에게 소리 없이 스며든 사랑을 진작 눈치챘으면 좋았을 것이다.
열한 살 때 만났던 꼬질꼬질한 소년은 어느새 훌쩍 커서 그녀를 욕망했다.
하지만 최악의 방식으로 관계의 변화를 인식한 힐데가르트는 플람의 팔을 쳐냈고, 막사를 떠났다.
다음 날, 플람은 끝내 흑마법사를 죽였다.
불행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플람이 죽였던 흑마법사의 피가 제단으로 튀었고, 그건 천 명째 제물이었다.
힐데가르트가 멍청한 제자를 구하며 치명상을 입는 동안, 제단에 그려둔 마법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성신이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마성신이 만들어 낸 아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가장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기에.
“안 됩니다, 스승님! 가시면 안 됩니다!!”
뒤늦게 플람이 그녀를 말렸으나, 힐데가르트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성검을 쥐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암흑뿐인 마성신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검을 마성신의 몸에 박아 넣으며 봉인에 성공했지만, 마력 폭풍과 함께 그녀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 최후였다.
레온하르트와 나누었던 약속 따윈 머릿속에 스치지도 못했던 마지막 순간…….
* * *
“그럴 리가 없어.”
누구보다도 흑마법사를 싫어했고, 그래서 싸우며 헤어졌는데.
이제 와서 네가 흑마법사가 되었을 리 없잖아.
“네가 나를 살렸을 리 없어. 그렇지?”
손바닥으로 파고드는 손톱이 날카로웠다.
힐데가르트는 저를 향해 한 아름 웃던 플람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