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정원으로 돌아온 힐데가르트는 예상 밖의 대답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정말이야?”
“왜 그렇게 놀라. 네가 같이 가겠냐고 물어봤으면서.”
“아니……. 설마 받아들일 줄은 몰라서.”
매번 함께 외출하자던 말에 거절하던 키스케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그가 함께 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야말로 오빠들에겐 허락받은 거야?”
“물론이지. 저녁 식사 전에만 돌아오라고 했는걸. 그보다 저녁에 비 올 거 같은데 같이 가도 괜찮겠어?”
“어차피 마차로 가는 거니까.”
키스케는 옷매무새를 고친 뒤 턱짓했다.
좀처럼 마음을 읽어내기 어려운 눈동자였다.
힐데가르트는 이 나이대 소년의 마음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상회로 향하는 동안에도 힐데가르트의 마음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옛일에 마음을 쓸 때가 아니다.
랑케르트 가문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반드시 가문을 재건해야 했다.
하지만 드문드문 그런 생각이 든다.
가문의 옛 영광을 되찾는다면, 내 할 일은 전부 끝나는 게 아닐까.
레온 오빠가 죽었는데, 그런 게 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힐데가르트는 텅 비어서 차가워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힐데가르트?”
그 순간,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덜컹, 소리가 나기 무섭게 힐데가르트의 몸이 앞쪽으로 쏠렸다.
“어……!”
양팔을 뻗은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키스케를 박력 있게 덮치는 자세가 되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햇살과 금으로 치장해 둔 것 같은 머리카락과 속눈썹이 코앞이었다.
당혹스러운 건 키스케도 마찬가지였다.
연한 색의 입술과 식은땀을 흘리는 뺨이며 이마가 지척이었다.
“너…….”
힐데가르트는 놀란 키스케가 떨어지라며 당연히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어진 키스케의 행동은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키스케?”
“가만히 있어.”
키스케는 힐데가르트를 부축하더니 옆자리에 눕혔다. 그가 힐데가르트의 머리를 허벅지에 기대게 했다.
“가, 갑자기 왜 그래?”
“버둥거리지 말고, 그냥 누워 있으라고.”
긴 손가락이 식은땀에 젖은 힐데가르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넘겼다.
“방금 건 그냥 중심을 잃어서 그랬던 거야.”
“알아.”
“그럼 왜…….”
“눕혀놓는 게 낫겠어. 또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날 덮치면 곤란하니까.”
“뭐라는 거야!”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힐데가르트가 그를 올려다보자, 뾰족한 시선을 눈치챈 키스케가 냉큼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바닥이 힐데가르트의 눈가를 덮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덮쳤다고 표현하면 이상하잖아…….”
“그럼 싸움을 건 거야?”
“넌 꼭 한마디를 해도 밉상으로 하네. 그거 노력하는 거야?”
“그런 노력을 왜 해. 솔직하게 말해도 별로 효과가 없길래 내 마음대로 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못 알아들었으면 됐어.”
그가 물처럼 흘러내리는 힐데가르트의 은발을 눈에 담았다.
‘얘는 환자다. 그래서 신경 쓰이는 거뿐이다. 원래 아픈 사람은 신경 쓰이는 거잖아.’
힐데가르트의 눈가를 덮은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눈동자는 흡사 은하수를 담아둔 수정구 같았다.
그래서 키스케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를 어루만지듯,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눈을 깜빡이던 힐데가르트는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그녀는 불편한 마음에 꼼지락거렸지만, 얼마 못 가 얌전해졌다.
안 그래도 몸이 무거운 데다, 눕고 보니 의외로 편안해서였다.
요 며칠간 플람에 대해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쳤던 여파가 밀려오는 듯했다.
‘……따뜻하네.’
하긴, 원래 사람과 기대고 있을 때는 이렇게 따뜻했지.
상대한테서 느껴지는 아늑한 미열은 그녀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사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새침한 말투가 밉지 않았다.
키스케의 딱딱한 언행은 황족이 감정을 숨기려 익히는 방법의 하나였다.
키스케는 경계심이 많기는 해도 타인에게 폭압적으로 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심코 눈가를 가린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놓자, 키스케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허벅지를 빌려준 상대의 몸이 뻣뻣하게 굳은 걸 깨닫자 힐데가르트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키스케.”
요행을 두 번 바랄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주어진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아마 오빠만큼 저를 소중하게 여겨줄 사람은 다신 만날 수 없겠지만.
“그럼 조금만 기대서 쉴게.”
“……그래.”
텅 비어서, 축축하고 차갑게만 느껴졌던 손바닥이 조금은 따뜻해졌다는 게 위안이었다.
그녀는 잠깐이나마 복잡한 생각을 모두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 * *
상단에 도착하기 무섭게,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어떠십니까, 공녀님? 마음에 드십니까?”
“세상에……. 이건…….”
“어마어마한 양의 마석이네요.”
마부석에서 내린 노바조차도 깜짝 놀랐다.
그들은 짐마차에 실린 산더미 같은 마석 자루를 보며 입을 벌렸다.
“두 분께서 마법을 배우고 계신다기에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구하셨어요?”
“상인끼리는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라이그너 상단주가 뿌듯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힐데가르트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던 일을 제치고 달려온 그였다.
비토가 마차에서 자루 하나를 꺼내서 내려놓았다.
그러자 라이그너 상단주가 자루의 끈을 풀어 보였다.
“최상등품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쓸 만한 마석이라고 합니다. 저야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거의 최상등품이나 다름없네요.”
자루 안에 담겨 있는 마석은 모두 작지만 영롱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품질이 상당했다.
힐데가르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요. 이런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이건 사실 저 혼자서 준비한 게 아닙니다.”
라이그너 상단주는 그녀와 키스케에게 가장 반짝이는 마석 하나를 건넸다.
“두 분께 의미 있는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지주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서 골랐습니다.”
“상단분들이요?”
“예!”
그 말은 정말이었는지, 힐데가르트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슬금슬금 모여든 상단 사람들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럼요! 고마워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마석이 이만큼이나 있으면 이동 마법을 연구하는 동안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다.
키스케도 떨떠름한 얼굴을 했으나 차분히 선물을 받았다.
“……잘 쓰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공녀님!”
때마침 상회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던 비앙카가 달려와 힐데가르트를 얼싸안았다.
그녀는 한 박자 늦게, 힐데가르트의 곁에 선 사람을 보고 얼어붙었다.
“키, 키스케 전하를 뵙사옵니다!”
엉망진창인 예법이었지만 키스케는 실소를 흘릴 뿐, 그녀의 엉터리 인사를 잠자코 받았다.
“비앙카! 살이 엄청나게 빠졌네?”
“공녀님은 왜 이렇게 야위셨어요?”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하얀색 리본을 고쳐주며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키스케는 그동안 노바와 함께 상단을 둘러보았다.
“와아! 전하, 이것 좀 보세요. 이런 거 보신 적 있으세요? 어제 막 딴 눈송이 버섯이라는데요?”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저쪽에 계신 분이 주셨습니다. 가져가도 괜찮대요.”
“돌려드리고 와.”
“가지고 가면 안 될까요? 전하도 버섯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돌아가서 맛있게 구워드릴게요.”
노바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힐데가르트가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우연히 고개를 돌린 키스케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키스케의 시선이 경악으로 물든 건 그때였다.
“힐데! 피해!”
“공녀님!”
순식간이었다.
힐데가르트의 뒤에 있던 짐마차에서, 식자재 포대를 묶어둔 삭은 밧줄 하나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끊어졌다.
“꺄아아악!”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외기보다 먼저 비앙카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자루가 둘을 향해 떨어지던 그때.
파앙!
키스케가 외운 화염 마법이 커다란 호박이 담긴 자루를 완벽하게 깨부쉈다.
코앞에서 일어난 충격에 힐데가르트의 몸이 들썩였다.
“힐데!”
그녀는 자신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오는 키스케를 눈에 담은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언제쯤 플람을 내보낼 생각이지?”
꿈인지 생신지는 모르겠지만 주마등은 아니겠네.
힐데가르트는 무의식 속에서 답을 찾았다.
이건 꿈이다.
레온하르트가 나온다는 점에서, 조금 운이 좋은 꿈.
“응? 내보내다니?”
“그 녀석도 이제 다 컸잖아.”
“오빠. 플람은 아직 열여섯이야.”
“그 정도면 다 큰 거지.”
레온하르트는 예의범절이 철저해 뒷담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방적으로 등 뒤에서 헐뜯을 바에야, 앞에서 당당히 비난했다.
아마 플람이 이 자리에 있었어도, 그는 언제 내보낼 거냐며 무섭게 다그쳤으리라.
“애초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겠지?”
“오빠. 길고양이 한 마리도 길들이면 책임져야 하는데 사람은 어떻겠어. 내가 거둔 거니 당연히 책임져야지.”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대체 언제까지 책임질 건데!”
“그거야 내 마음이지. 갑자기 왜 그래?”
힐데가르트가 별스럽다는 듯 그를 보았다.
“오빤 참……. 왜 그렇게 플람을 싫어하는 거야?”
“내가 뭘!”
“시치미 떼지 마. 항상 플람한테 박하게 구는 거 다 알거든.”
“걘 너한테 흑심이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소리라서 할 말도 없네요.”
“내가 가주 반지 끼는 손가락을 걸고 장담하는데, 그놈은 네가 밀어내기 전까지 네 곁에 붙어 있을 거야.”
“그럼 나야 좋지.”
“안 돼! 나만큼도 못 하는 놈은 네 곁에 세워둘 수 없어.”
레온하르트가 으르렁거렸다.
“특히 플람처럼 자기 마음만 들이대고 보는 녀석은 안 돼.”
“아니, 플람은…… 걘 그냥 진짜 짝을 못 만나서 그러는 걸 거야. 사랑을 모르잖아.”
“그러는 넌 알고?”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던 레온하르트가 플람의 공방 쪽을 바라보며 짜증을 냈다.
“그런 놈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제 마음부터 챙기려 들 거야. 네가 어렵게 마음을 줘도!”
“반응이 유별난 거 알지?”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팔짱을 낀 그녀가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그럼 어떤 사람이면 두 발 들고 환영해 줄 건데?”
“두 팔이 아니라?”
“그건 당연히 들어줄 거잖아?”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곤 한참 뒤 말했다.
“너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
“뭐?”
“네가 가장 외롭고 힘들 때, 하던 걸 전부 내던지고 너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 자신보다 네 마음을 우선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딨어.”
“여기 있잖아.”
레온하르트가 으르렁거렸다.
“어떤 놈이든, 최소한 나만큼은 하는 놈이어야지!”
그 전에는 어림도 없다며 그가 으름장을 놓았다.
기가 막히는데 왜 눈물이 나올까.
“오빠.”
힐데가르트가 그를 불렀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꿈속의 광경은 서서히 멀어졌다.
“레온 오빠, 가지 마.”
오빠밖에 없어. 나한테 그런 사람은 다시 안 생겨.
알잖아, 내가 이런 상황을 바란 적은 없다는 거.
오빠가 있었으니 가문이든 세상이든 내겐 의미가 있었어.
나는 오빠 하나만 있으면 남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는걸.
그래서 새삼 알게 된 거야.
오빠는 내 광막한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단 하나의 언어였어.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제발 나를 혼자 남겨두지 마.
“힐데.”
반짝하고 정신이 들었다.
눈앞이 짧게 점멸하더니 시야에 키스케가 들어왔다.
동시에 힐데가르트의 눈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