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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78)화 (78/166)

76화

레디스는 그렇게 말한 뒤 얼마 안 가 아차 했다.

제 말이 너무 심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너무 어이없는 말을 듣자 오히려 할 말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녀가 마주 화를 내긴커녕 차갑게 바라보자, 레디스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버럭 성을 냈다.

“아, 몰라! 주든가 말든가 네 마음대로 해!”

쾅!

레디스가 문을 부서지게 닫고 나갔다.

“와…… 와!”

힐데가르트는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머리에서 자글자글 졸여진 분노가 튀어나왔다.

“어이없네! 내가 나 혼자 좋자고 마석 광산 필요하단 소리를 한 줄 알아?!”

졸지에 키스케에게 손수건으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이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죄 없는 쿠션을 퍽퍽 쳤다.

‘나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진지하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으아아! 정말!’

그놈의 손수건이 뭐라고 이러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손수건을 못 받을까 봐 저러는 거라고?

‘키스케도 그렇고, 레디스도 그렇고 애들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결국 찝찝한 싸움을 하고만 힐데가르트는 온종일 기분이 좋지 못했다.

레디스가 다시 돌아온 건 그날 밤이었다.

“……야.”

“…….”

그래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아는지, 레디스는 시선을 마주치자 피해 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것도 잠시.

“……낮에 한 말은 미안했다.”

“레디스.”

“손수건은 네 마음대로 해.”

레디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힐데가르트는 닫힌 문을 황당하게 바라보며 또 한 번 쿠션을 쳤다.

‘하아…….’

그놈의 천 쪼가리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지!

이제 와서 둘 모두에게 ‘사실은 너한테만 주는 거야’라며 손수건을 내밀면 그건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번지겠지.

‘이러지도 못하겠고 저러지도 못하겠고……. 답답하네, 정말.’

은근하게 불편한 분위기는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다.

두 사람이 말 한마디 없이 산책 겸 사냥터를 둘러보던 때였다.

힐데가르트는 저편에서 다가오는 또래 소녀 세 명과 마주쳤다.

양산을 쓴 소녀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용기를 내서 외쳤다.

“검술 대회 우승자이신 레디스 공자님이시죠?”

“……네. 처음 뵙겠습니다. 레디스 아카락시아입니다.”

“저는 유시스 리브라고 해요!”

“에이브릴 백작가의 달리아입니다.”

“클로디아 페르체입니다!”

그들이 힐데가르트를 흘낏거렸다.

소녀 중 한 사람이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어라?’

아무래도 함께 산책 타이밍을 잘못 고른 것 같다.

‘인기 폭발이네, 우리 둘째.’

레디스를 알아보는 사람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거 봐. 나 말고도 손수건 받을 사람 많으면서.’

힐데가르트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보트를 타고 호수로 나갈 걸 그랬나.

“저, 레디스 공자님! 이 손수건 받아주세요!”

“어…….”

손수건을 건넨 건, 폭신폭신한 솜사탕 같은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의 유시스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실은, 검술 대회 때 공자님께서 활약하시는 걸 봤어요. 정말 멋있으셔서 꼭 건네드리고 싶었어요!”

“저도 봤어요! 특히 결승전이 엄청나게 멋있었어요!”

“아, 어, 음……. 감사합니다.”

졸지에 오도카니 서 있게 된 힐데가르트의 속마음도 모르고, 무작정 기뻐하던 소녀들이 레디스의 주변을 둘러쌌다.

레디스는 엉겁결에 힐데가르트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역시 이번 사냥 대회 때도 참여하시는 거죠? 활도 잘 다루시나요?”

“그냥저냥 쓸 만한 실력, 이라고 해야 할 거 같아요.”

“괜찮으시면 저희랑 함께 산책하시지 않겠어요?”

“아, 그게 전 여동생이랑 같이 산책하기로 해서…….”

힐데가르트는 레디스의 도와달라는 눈빛을 모른 척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녀와, 레디스 오빠. 난 돌아갈 거야.”

레디스가 경악에 찬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날 이런 곳에 혼자 버리고 갈 셈이냐는 눈빛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힐데가르트는 손으로 하품을 가리며 말했다.

“갑자기 낮잠이 자고 싶어졌어. 이따 봐.”

“야, 히, 힐데!”

레디스가 당황하며 그녀를 몇 번 불렀지만, 저를 향한 시선이나 관심을 완전히 뿌리칠 수는 없었는지 뒤따라오지는 않았다.

‘곤란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나 연구서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어딜 가든 시선이 모일 키스케나 레디스를 생각하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어디서 얼굴도 잘생기고 이야기도 잘 통하는 사람 하나 뚝 떨어지면 좋겠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걸어왔던 산책로를 다시 밟아 돌아왔을 때였다.

저택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라?”

“안녕하세요, 공녀님!”

“비토? 네가 여긴 어떻게?”

비토가 모자를 벗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비토의 뒤편.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힐데가르트 공녀님.”

처음 보는 소년이 후드를 뒤집어쓴 채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 * *

“혹시 쉬시는 걸 방해한 건 아니죠?”

“방해하기는. 마침 심심한데 잘 왔어.”

힐데가르트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 아카락시아 공작령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마침 티모시 영지로 내려오셨단 소식을 들어서요.”

“일부러 찾아와 준 거야?”

“네. 이왕이면 빨리 보고드리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최고야. 바로 그거지.”

라이그너 상단주가 소개해 준 청년은 제법 똘똘한 구석이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안녕하세요, 이오타라고 합니다.”

소년은 미하일보다 조금 많고, 노바보다는 약간 앳된 나이로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잿가루 위에서 뒹군 것처럼 회색이었다.

하지만 진한 보라색 눈동자는 특유의 우아함이 살아 있었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힐데가르트는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가워.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라고 해.”

“이오타에게는 이번 조사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움?”

“네. 랑케르트 지방 사람들은 외지인에게 경계가 심하더라고요. 안면을 트고 정보를 모으던 때 이오타가 도와주었죠.”

힐데가르트가 흥미롭다는 듯 이오타를 바라보자, 이오타는 그저 웃기만 하며 바닥을 응시했다.

“공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이오타가 공손한 태도로 예의 바르게 말했기에 힐데가르트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따로 듣지.”

“감사합니다. ……비토, 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응.”

이오타가 방을 나섰다.

마침내 방에는 힐데가르트와 비토,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비토는 제일 먼저 그녀에게 사과부터 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도 않고 외부인을 데려와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좀 놀랐을 뿐이야.”

“실은 이오타가 공녀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서요. 마침 저하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나 할까…….”

“부탁? 어떤 일인데?”

“자세한 건 제가 아니라 이오타가 직접 이야기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비토는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힐데가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들어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궁금해진 힐데가르트는 잠시 이오타가 나간 문을 흘끔 보았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그녀가 곧장 비토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사는 어땠어?”

“힘들지만 성과가 있었습니다.”

비토는 뿌듯하게 말했다.

“랑케르트가 캄파넬에서 뭘 찾으려고 했는지 알아냈거든요.”

힐데가르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랑케르트 가문이 고용한 사람 중 한 명에게 캐물어 봤어요. 공녀님. 믿기 힘드시겠지만…….”

비토는 마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드는 시늉을 했다.

“랑케르트 가문이 캄파넬 땅에 묻힌 검을 찾아오라고 했다네요.”

“검?”

“네, 검이요. 크기는 이 정도라고 하는데…….”

비토가 두 손을 어깨너비보다 넓게 벌렸다.

“하얀색 검이고, 중앙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나 봐요. 자세한 생김새는 그쪽도 말로만 들어서 모르는 눈치…….”

“그거 정말이야?!”

힐데가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시피 했다.

그녀의 기세에 놀란 비토가 한 발 물러났다.

“왜, 왜 그러세요?”

“그 말 정말이냐고! 정말 랑케르트 가문에서 콕 집어서 그 검을 찾아오라고 한 거야?”

“네, 확실해요.”

비토는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하고 곧바로 대답했다.

“돈을 줄 테니까, 캄파넬의 출입 금지 구역에서 검 한 자루를 찾아와라. 절대 남에게 발설하지 마라. 그런 말을 들었다는데…….”

“…….”

“들켜서 쫓겨난 사람에게 크게 화를 내면서 약속했던 의뢰비도 절반밖에 안 줬대요. 굉장히 화를 내며 말하던데요?”

“무슨 검인지는 알아? 어떻게 생긴 것만 알려준 거래?”

“생긴 것만 알려줬다고 해요. 다른 정보는 일절 들은 게 없다고…….”

“허.”

이거였구나.

무릎에 힘이 빠졌다.

힐데가르트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풀썩, 소파에 앉았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비토.”

힐데가르트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신전에…… 성검이 봉납된 적 있니?”

“예? 무슨 검이요?”

“성검 말이야. 80년 전 마성신을 봉인하는 데 쓰였던 검.”

비토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알기론, 80년 전 마성신 토벌 때 쓰인 성검은 유실된 상태예요.”

성검 아스톨.

마성신을 봉인하는 검.

한때 힐데가르트가 쥐었던 그 검이 여전히 캄파넬에 있다는 뜻이다.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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