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힐데가르트는 그가 꺼낸 말에 적잖이 놀랐다.
‘엘리사 일족이 쫓겨난다고?’
게다가 덤펠트 광산이라면, 이번 사냥 대회 우승 상품이 아닌가.
“저희 일족은 덤펠트 마석 광산을 관리하고, 마석을 팔며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사회에 녹아들지 못한 엘리사 일족은 정체를 숨긴 채 깊은 갱도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작스레 올해 겨울 안으로 광산을 떠나라는 말을 들었죠.”
“설마……. 퇴거 통보를 받은 거야?”
“예.”
이오타가 씁쓸하게 웃었다.
“마석 광산을 사냥 대회 우승 상품으로 내놓게 되었으니, 그곳에서 상주하고 있는 저희 일족도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어요.”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마석의 값어치가 떨어졌다.
즉, 마석 광산도 예전만큼 수익이 나질 않고 쓸모가 없단 소리였다.
‘우승 상품을 핑계로 필요 없는 마석 광산을 다른 곳에 떠넘기고 싶었던 거야.’
딸린 머릿수만큼 배급해야 하는 식량이나, 할당해야 하는 예산이 아까웠을 테지.
‘사냥 대회 우승 상품이니 거절하는 사람은 없을 거고.’
티모시 남작이 꾀를 쓴 셈이다.
“마석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나름대로 타개책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타개책? 어떤 방법인데?”
“마석으로 아티팩트를 만드는 겁니다. 간단한 마법을 새겨서요.”
“이오타 너도 마법사니?”
“대단한 실력은 아닙니다.”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오타는 품에서 마석으로 만든 아티팩트를 몇 개 꺼냈다.
“이건 저희가 만든 펜던트 목걸이입니다. 행운이 찾아오게 해주죠.”
펜던트는 네 잎 클로버 모양을 하고 있었다.
“행운의 주문이네? 왜 하필 이걸 만든 건데?”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서요. 낙석 사고 같은 게 없도록 기원하는 차원에서 만들어 본 겁니다.”
“아하…….”
힐데가르트는 클로버 펜던트를 살펴보았다.
“이런 걸 만들었구나…… 혹시 고위 마법도 가능해?”
“만들어진 술식이나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마석에 새기는 건 어렵지만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힐데가르트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그래도 이 아티팩트로는 이득 보기는 힘들었을 것 같아.”
펜던트는 좋게 말하자면 만든 사람의 성의가 보였다.
하지만 대놓고 말하자면, 조잡한 티가 났다.
이오타도 그걸 부정하진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좀처럼 팔기가 어렵더군요.”
그렇겠지. 브린힐데 상단도 활석으로 성과를 내는 게 쉽지 않았는데.
“타개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오타가 어색하게 웃었다.
“곧 겨울입니다. 갈 곳 없는 일족의 처지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해 봤으나, 티모시 남작이 거절하더군요.”
“엘리사 일족은 총 몇 명이지?”
“전부 합해 400명이 조금 넘습니다.”
400명.
생각보다는 많은 인원이라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대로라면 마석 광산은 문을 닫고, 엘리사 일족은 겨우내 눈밭을 방황할 확률이 높았다.
“저희에게 필요한 건 아주 약간의 유예 기간입니다.”
최소한 쫓겨나듯 떠나는 게 아니라 살림을 챙겨 이주할 수 있도록.
모두가 정착할 장소를 발견할 때까지만이라도.
“일구어 놓은 터전과 작별하고,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 수 있게 시간이 필요합니다.”
흔들리던 이오타의 눈빛이 몰라보게 선명해졌다.
“그래서 이 편지를 봤을 때, 공녀님께 도움을 청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찾아온 겁니다.”
“왜 하필 내 도움이 필요한 건데?”
“초대 마탑주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무지개의 아카락시아 공작가를 기억하니까요. ……게다가 공녀님께선 황태손 전하와 각별하신 사이라 들었습니다.”
이오타가 주먹을 꼭 쥐었다.
“황태손 전하의 힘을 빌려서 티모시 남작을 설득해 볼 수는 없을까요?”
“나와 키스케 전하의 손을 빌리겠다?”
힐데가르트는 픽 웃었다.
‘제법 영리한 방법이긴 하네.’
하지만…….
“네 뜻은 알겠어.”
“정말이세요? 그럼…….”
“뒷말도 마저 들어. 미안하지만, 그게 모든 해결책이 되지는 않을 거야.”
힐데가르트는 적당한 대답은 이오타를 더욱 힘들게 만들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냉정하게 말해서, 설사 키스케 전하를 설득한다 해도 티모시 남작은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걸?”
“어째서입니까?”
“생각해 봐. 티모시 남작은 이미 덤펠트 마석 광산을 사냥 대회 우승 상품으로 내걸었어.”
힐데가르트는 그를 앉혀둔 채 말했다.
“엘리사 일족이 아무리 딱해도 이제 와서 우승 상품을 바꿀 수도 없는 상황이란 거지.”
“하지만…….”
“우승 상품으로 내놓은 마석 광산에 일족의 거취 문제가 얽혀 있다. 이걸 인정하고 상품을 바꿀 바에야, 너희를 빠르게 쫓아내려 할걸?”
“…….”
“티모시 남작 가문에게는 위신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
아마 순순히 인정하고 물러나지는 않을 테다.
키스케의 설득에 고분고분하게 응하는 척, 뒤에서는 엘리사 일족을 못살게 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힐데가르트의 말에 이오타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결국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
“그건 네게 달린 게 아닐까?”
하지만 그 광경을 계속 보고 있을 힐데가르트가 아니었다.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 보는 건 어때?”
“예?”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즐겁게 들리기까지 했다.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카락시아의 공녀야. 난 다섯 별 공작가 사람이지.”
그녀는 가라앉는 종이배처럼 안색이 무거워진 이오타에게 말했다.
“땅이라면 우리 가문에도 얼마든지 있어. 400명이 이주할 만한 땅이야 거뜬하지.”
“……!”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한 다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곧게 등을 편 소녀는 더는 그 나이대 소녀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난 사업을 도와줄 마법사가 필요해. 내 사업을 돕겠다면, 일족 모두가 이주할 땅을 구해줄게. 어때? 나와 거래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힐데가르트의 머릿속에는 이미 완벽한 이정표가 떠올랐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여 마석 광산을 손에 넣는다면.
‘이오타와 엘리사 일족을 통해 마석을 채굴하고, 게이트를 관리하는 거야.’
과거에는 마탑에 합류하는 걸 거절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게 틀림없다.
그녀가 눈을 빛냈다.
“물론 어중이떠중이 마법사로는 안 돼. 내 사업에 도움이 되진 않을 거니까.”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사를 원하십니까?”
“그걸 지금부터 알려줄 겸, 네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데, 어때?”
힐데가르트가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걸려도 좋아.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을…….”
“좋습니다.”
그러나 이오타의 반응은 그녀가 생각하던 것보다 뜨겁고 확실했다.
“공녀님이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눈빛이 좋구나.
힐데가르트는 상황도 잊고 픽 웃을 뻔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그만큼 진지합니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오타의 눈빛에서 초조함을 읽은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각오가 되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 * *
똑똑.
비토는 노크하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관을 방문한 손님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연 순간, 기겁하며 튀어 올랐다.
“힐데는 안에 있나?”
“키, 키스케 전하?!”
언제 보아도 남다른 금발 머리와 빛나는 적색 눈동자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노, 노바 경…….”
“이런 곳에서 다 만나네요.”
노바가 온순한 양처럼 웃었다.
저절로 주눅이 들었던 비토가 허겁지겁 말했다.
“공녀님은 안에 계십니다. 지금은 잠시 손님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세요.”
“손님?”
힐데가르트를 찾아온 손님이 있단 말인가?
키스케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그런데 손님이라는 건 누구지?”
“아……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군.”
키스케는 별생각 없이, 비토가 안내한 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소파에 앉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오타! ……내!”
“공녀님……!”
“조금만 더……!”
키스케는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네?”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키스케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남자가 우는 목소리가 왜 들려오는 거야?
“어떤 놈이지? 안에서 누구랑 대화하는 거야?”
그때였다.
출렁이는 마력의 파동이 방 안에서 느껴졌다.
힐데가르트에게 온 신경이 몰려 있던 키스케의 머릿속 어딘가가 뚝, 하고 끊겼다.
그는 버벅대는 비토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했다. 거침없이 걸어간 키스케가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