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칼란도 랑케르트 공작이 여길 왔다고?’
고개를 돌려보니, 저편에서 두 명의 기사를 대동한 중년의 공작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기사들의 갑옷에 음각으로 새겨진 가문의 표식.
손가락에 낀 가주 인장 반지.
조금 해쓱하지만 당당한 걸음걸이의 사내는 칼란도 랑케르트가 분명했다.
내내 공작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던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공작 각하!”
“이비스 부인. 이거 오랜만입니다.”
칼란도가 사람 좋은 웃음을 띠었다.
“정말 얼마 만인가요? 그동안 뵙지 못해서 아쉬웠답니다.”
“황자비 전하께서 오랜만에 랑케르트에 돌아오셔서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머, 그러셨군요. 혹시 황자비 전하도 같이 오셨을까요?”
칼란도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마무리 축제 때만 잠시 얼굴을 비치실 예정입니다.”
“그거 아쉽네요, 함께 사냥 대회를 즐기셨으면 좋았을 텐데.”
황자비가 마무리 축제 때 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랑케르트 공작이 올 줄은 몰랐다.
칼란도의 등장으로, 휴식을 지루하게 보내던 이들이 꽃에 날아드는 벌처럼 모여들었다.
“뤼디언 소가주의 약혼 소식도 들었습니다. 참석하지 못해 죄송하군요.”
“아니에요. 대신 다음 연회 때는 꼭 와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몸이 아프니 연회가 얼마나 간절하던지…….”
대화는 선명하게 들렸다.
힐데가르트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설마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지만……. 마침 잘됐어.’
이때가 아니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
이오타 곁에 비스듬히 선 그녀는 재빨리 눈을 감고 마력을 거미줄처럼 퍼뜨렸다.
보이지 않는 마력이 지면으로 푸르게 뻗어 나갔다.
마침내 먼 거리의 랑케르트 공작에게 마력이 닿았을 때.
‘……어?’
힐데가르트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서는 흑마법사 특유의 묵직하고 검붉은 마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근방에서 가장 마력이 강한 사람이라 해봐야,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오타뿐이었다.
‘랑케르트 공작은 흑마법사가 아닌 건가?’
그녀가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공작은 왜 사냥 대회에 온 걸까.
그렇게 생각한 힐데가르트가 눈을 떴을 때.
‘뭐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칼란도 또한 그녀가 있는 천막 쪽을 바라보았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분명 눈이 마주쳤다.
‘왜 이쪽을 보고 있던 거야?’
가슴이 기묘하게 술렁였다.
* * *
“헉, 헉……!”
붉은 깃 화살이 화살통에서 정신없이 들썩였다.
사냥감 몰이 역을 맡았던 적색 조 일원, 티리안이 무아지경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수풀 저편에서는 아직도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키스케 전하, 역시 한 번에 몰아넣기보다는 나누어서 잡는 게……!”
“괜찮으니 뒤로 물러나 있어.”
“전하! 키스케 전하!”
쫓기던 티리안이 악을 쓰듯 큰소리로 외쳤다.
“몰이는 실패입니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멧돼지가……!”
뀌애애액!
괴성을 지르는 멧돼지가 그를 쫓아 달렸다.
티리안은 죽을힘을 다해 수풀을 헤치고 뛰었다. 사슴 한 마리를 몰 생각이었던 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크헉……!”
그렇게 한탄하기도 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데굴데굴 구른 순간.
퍼엉! 펑!
커다란 화염구가 연이어 빠르게 날아가더니, 그를 쫓던 멧돼지에게 직격했다.
꽤애액! 뀌익! 끼이익이!
멧돼지가 통구이 체험을 겪으며 내뱉는 비명은 굉장했다.
짐승의 괴성이 잦아들 무렵.
“허억, 허억, 헉…….”
“괜찮나?”
“괜, 괜찮습니다…….”
간신히 숨을 고른 티리안이 땅을 짚고 일어섰다.
여차하면 다시금 화염 마법을 날리려 했던 키스케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토끼였으면 좋았을 텐데.”
“예?”
그러는 사이 불길에 휩싸인 멧돼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날뛰듯 몸부림쳤다.
비틀거리던 녀석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또다시 사람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전하! 피하세요!”
그러나 키스케의 길고 고운 손가락에는 이미 붉은 깃의 화살이 감겨 있었다.
활시위를 당긴 눈에서 망설임이 사라진 순간.
팟!
끼이이이!
화살을 맞은 짐승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활을 내리는 키스케의 행동은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차분했다.
“굉장하십니다!”
“섣불리 다가가지 마라.”
키스케는 침착하게 노바를 데리고 사냥물 근처로 다가갔다.
마침내 완전히 숨통이 끊어진 걸 확인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 말고…….”
“전하! 엄청난 솜씨 십니다!”
“방금 그건 마법이었나요? 굉장하세요!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키스케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감격에 찬 눈빛이 따라붙고 있었다.
특히 방금까지 멧돼지에 쫓기며 사색이었던 티리안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을 배우고 계신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런 거였군요! 정말 신기한 능력이네요?”
“저도 놀랐습니다. 할아버님께서 마법이 위험한 거라고 극구 말리셨는데 이제 보니 정말 대단하네요.”
“저희도 배울 수 있을까요?”
노바가 수레에 사냥감을 싣는 동안, 키스케는 물어보는 말에 하나씩 대답했다.
“마력 친화도가 높고, 마력을 꾸준히 모으고, 마력 다루는 연습을 한다면 가능하겠지.”
사냥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키스케는 거칠 게 없는 사람처럼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청색 조가 레디스의 제안으로 조원 모두가 힘을 합해 사냥 중이라면, 적색 조는 키스케를 단독으로 앞세워 사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주변은 토끼가 별로 없나 보군.”
“저희가 우르르 몰려다녔으니까요. 뿔뿔이 흩어진 것 같습니다.”
키스케가 그 대답에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티리안 그레이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혹시 토끼를 찾으시는 거라면 제가 한번 찾아볼까요?”
“그렇게 해주겠어?”
티리안은 당연히 눈앞의 황태손이 화염 마법 하나로 잡을 수 있는 짐승을 찾으리라 여겼다.
“토끼굴을 찾아보겠습니다. 몇 마리만 남겨두고 사냥하면…….”
“아니,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생포할 거야.”
“네?”
처음이었다.
내내 무표정한 황태손의 입가에 처음으로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린 건.
“이왕이면 하얗고 작고 귀여운 거로 생포할 해야 기뻐할 테니까.”
티리안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도 웃으실 줄 아는 분이었구나.’
얼음을 깎아 만든 소년 같았는데, 없으면 다람쥐라도 잡아야 한다며 주변 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모습이 신선했다.
짝짝짝짝.
등 뒤에서 박수와 함께 칭찬이 날아왔다.
“정말 대단하신데요, 형님?”
“……카라딘?”
상대를 확인한 키스케가 사촌 동생을 빤히 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머리카락을 귀로 넘기며 그가 곁으로 다가왔다.
“카라딘. 조원들은 어딜 가고 너 혼자 사냥하고 있는 거야?”
“따라오지 말라고 해산시켰어요. 별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카라딘은 같은 사냥감을 쫓아 왔던 건지, 손에 활을 들고 있었다.
황태손의 화살통에는 녹색 조에게 지급되는 녹색 깃 화살이 스무 발 남짓 들어가 있었다.
“카라딘 황태손 전하를 뵙습니다.”
티리안이 정중하게 인사했으나, 카라딘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난데없이 마법을 배우신다기에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더니.”
갸름한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방금 그거 짐승 말고 다른 것도 태워 죽이기 좋아 보이네요.”
“…….”
“혹시 그런 목적으로 배우신 건가요? 좋아 보이긴 하네요. 증거도 남지 않을 테니…….”
“그런 목적이라는 건 정확히 어떤 목적을 이야기하는 거야?”
키스케의 목소리는 턱 밑에 댄 날붙이처럼 서늘했다.
“증거가 남지 않게 사람을 화염 마법으로 공격하고, 위협하는 목적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
“…….”
“네가 할 법한 발상이네.”
카라딘의 미간이 찰나에 일그러졌다.
“난 그런 목적으로 마법을 배운 적 없어.”
키스케는 힐데가르트를 떠올렸다.
티모시 영지로 내려오는 내내, 마법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거라며 주장하다 못해 열변을 토하던 그녀를.
카라딘의 손이 활을 세게 쥐었다.
“아쉽네요. 제가 배웠다면 형님보다는 유용하게 썼을 것 같은데.”
그의 얼굴에 불쾌함이 서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형님도 아시죠? 이번 마무리 축제 때 어머니가 오시는 거.”
“…….”
키스케의 얼굴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전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절대 못 져요. 또 형님이랑 비교당하기는 싫거든요.”
“……나라고 그걸 좋아할 것 같아?”
“왜요? 당연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카라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형님은 항상 뭘 해도 저보다 잘하시니까, 폐하께서 그렇게 아끼시는 거잖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좋은 경쟁을 하자는 거죠. 공정한 경쟁.”
카라딘의 오른손 검지가 노바의 짐수레를 가리켰다. 발목에 상처가 나 있는 멧돼지를.
“그런 의미로 제 덫에 걸렸던 사냥감은 노리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