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뭐라고?”
키스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카라딘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것 때문에 쫓아온 거거든요. 다른 사람 덫에 걸린 짐승을 사냥하는 건 반칙인 거 아시죠?”
카라딘이 사냥감 몰이 역을 맡았던 티리안을 냉엄하게 훑었다.
“저 멧돼지는 제가 놓았던 덫에 걸렸어요. 다리에 난 상처를 보시면 아실 거예요.”
“하, 하오나 카라딘 전하.”
화들짝 놀란 티리안이 황급히 해명했다.
“제가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덫에서 빠져나온 상태였습니다.”
티리안은 억울한 마음이 솟았다.
사냥 대회 중에는 덫을 놓는 일이 잦다.
남의 덫에 걸린 짐승을 잡는 건 당연히 반칙이지만, 반대로 허술하게 친 덫에서 빠져나온 놈은 처리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덫에 걸리지도 않은 상태였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사냥한 놈입니다.”
“그래요?”
웃으며 응수하는 카라딘의 눈매가 예리했다.
“하지만 내 덫에 걸려 있었던 게 맞고, 힘도 다 빠져 있는 상태였잖아요?”
“그건…….”
“난 그게 반칙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거든.”
티리안은 뒤늦게서 알았다.
한마디로 자기 덫에 걸렸던 사냥감을 잡았으니, 도로 내놓으란 소리였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 덫도 아니고 황태손 전하라니…….’
멧돼지는 오후 사냥에서 가장 큰 성과물이었다.
티리안을 비롯한 몇몇 조원이 속뜻을 알아채고 난처한 얼굴을 했다.
“카라딘. 설마 지금껏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사냥물을 요구한 건 아니겠지?”
“…….”
키스케의 물음에 카라딘의 표정이 마귀처럼 일그러졌다.
사냥 대회 내내 웃는 얼굴이었던 카라딘이 처음으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계속 그런 식으로 우길 거냐고.”
티리안은 기겁했다. 키스케의 물음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키, 키스케 전하……. 그걸 대놓고 물어보시면……!’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멧돼지를 몰아넣고 숨통을 끊은 건 우리가 한 일이다. 덫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건 네 잘못이지. 남의 사냥감에 대고 억지 부리지 마.”
“…….”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집계할 때 이의를 제기하도록 해.”
카라딘의 얼굴이 울분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당한 압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는 건 권력이 지닌 폭력성이다. 너도 나와 같이 공부했으니 알 텐데?”
“…….”
“황태손인 네 억지에 못 이겨서 사냥감을 바치는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빌지.”
키스케는 티리안에게 턱짓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티리안은 재빨리 짐을 챙기며 소리쳤다.
“이, 이동하겠습니다!”
카라딘의 아프게 말아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 * *
“첫날 결과를 발표합니다!”
티모시 남작은 집계 결과가 적힌 종이를 든 채 단상 위에 서 있었다.
“3위! 녹색 조!”
카라딘 황자가 속한 조였다.
“사슴 두 마리, 여우 한 마리! 이 중 카라딘 전하께서 사슴 두 마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리 나쁘지 않은 결과였으나, 손뼉을 치던 사람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카라딘 황태손이 결과를 듣자마자 표정을 구긴 탓이었다.
“2위, 청색 조!”
힐데가르트의 몸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레디스가 속한 조였다.
“사슴 네 마리, 오소리 두 마리! 이 중 사슴 세 마리는 레디스 공자께서 잡으셨습니다!”
“우와아아!”
“허어어어?”
“말도 안 돼……. 그렇게 많이 잡았는데 2위라니?!”
같은 조 내에서도 희비는 엇갈렸다.
레디스는 실망하는 이들을 위로하느라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고 있었다.
흐뭇해하는 건 힐데가르트의 몫이었다.
‘그렇지. 역시 레디스가 재능이 있지. 우리 애 천재라니까?’
비록 손수건을 안 줘서 삐지긴 했지만!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발표만 남아 있었다.
“1위! 적색 조! 사슴 세 마리! 여우 두 마리! 마지막으로 멧돼지 한 마리!”
이미 순위는 정해진 상황.
멧돼지라는 단어에 힐데가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두 키스케 전하께서 잡으셨습니다!”
“헉……!”
“모두? 전부 키스케 전하께서 잡으셨다는 건가요?”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 오가기도 전에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힐데가르트도 제법 놀랐다.
‘사냥 대회 첫날인데? 키스케가 마력을 거의 퍼붓다시피 했네.’
조원들과 함께 사냥하는 레디스, 혼자서 조원을 끌고 가는 키스케.
그 차이는 극명했다.
‘초반은 키스케가 유리하겠지. 다들 자기에게 맞춰 줄 테니까.’
하지만 사냥 대회는 2주 내내 지속된다. 계속 저 상태로 헤쳐나갈 수 있을까?
‘어려울 텐데.’
힐데가르트는 쓰게 웃었다.
마력 고갈에 시달리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드러누울 키스케가 눈에 보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올해 사냥 대회에서, 키스케는 3위 안에 들어가리라.
‘사냥을 좋아한다더니. 진짜였나 보네…….’
힐데가르트는 팔짱을 낀 채 키스케를 보았다.
키스케가 포함된 적색 조는 비록 첫날의 결과라지만 기쁨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키스케 전하!”
“마법과 활을 적절히 쓰신 덕분에 피해도 적었어요!”
“영민한 방법이셨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기뻐하던 때, 한 사람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카라딘이었다.
그가 일부러 이목을 모은 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카라딘 전하? 왜 그러십니까?”
“마법을 이용한 사냥은 반칙이 아닌가요?”
순위가 가장 낮은 녹색 조의 분위기는 바닥을 달리고 있었다.
카라딘의 뒤편에 서 있는 조원 중 일부가 동의하듯 끄덕였다.
“우린 모두 지급된 화살을 이용해 사냥하고 있어요. 사냥에 마법을 쓰는 건 형평성에서 어긋나잖아요?”
티모시 남작은 난처한 얼굴로 하나씩 설명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마법을 이용한 사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째서죠?”
“마법뿐만 아니라, 호루라기를 불어서 사냥감을 몰거나 덫을 놓는 수단도 허락하고 있으니까요.”
카라딘은 당장에라도 폭포처럼 욕을 쏟아내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뭣보다 키스케 전하께서는 사냥감의 숨통을 화살로 끊으셨으니, 더욱 형평성 문제로 어긋날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법을 쓰는 건 형님뿐이니까, 이건 불공평……!”
카라딘이 대들 듯 따지려고 하던 그때였다.
태연한 남작보다도 그를 더욱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라딘 전하께서 화가 많이 났나 봐요.”
“그러게요. 사슴을 두 마리나 잡으셨는데.”
“저 나이 때는 순위에 집착하시니까요. 그래도 키스케 전하를 의식하실 건 없는데.”
“호승심이 있다는 건 좋은 일 아니겠어요?”
카라딘의 고개가 번개처럼 그쪽으로 돌아갔다.
“누가 감히 황족을 평가……!”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잡담을 주고받는 귀부인들은 부채 뒤에서 입을 가린 채 웃고만 있었다.
카라딘은 황태손이라지만 아직 어렸다.
사교계 실세인 귀족 부인들 앞에서 모욕죄를 운운하면 얼마나 입에 오르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저런. 상대가 안 좋았네.’
힐데가르트가 한가하게 혀를 찼다.
“……형평성에 어긋나는 게 없다면 됐습니다.”
결국, 카라딘은 이를 갈며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폭풍 같았던 발표는 그렇게 모두 끝났다.
각 조가 해산하자, 레디스도 어색한 얼굴로 힐데가르트를 향해 다가왔다.
“……어? 레디스 오빠, 다쳤어?”
“별거 아냐. 달리다 넘어져서 찧었어.”
“어…… 그래. 크게 안 다쳤으면 다행이고.”
“…….”
“…….”
손수건 때문에 다툰 여파로, 둘은 아직도 종종 불편한 티를 내곤 했다.
미묘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넌 심심하지 않았냐?”
“응. 유시스 영애도 있었고…….”
“공녀님! 공녀님!”
때맞춰 힐데가르트의 이름을 부른 이가 손을 흔들며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노바?”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노바, 왜 그래?”
“노바 경. 고생하셨습니다. 키스케 전하를 따라다니느라 힘드셨죠?”
“아뇨, 괜찮습니다! 아직 쌩쌩해요.”
보기에도 그렇긴 했다.
노바의 손에는 네모난 은색 통이 들려 있었다.
“공녀님, 전하께서 아직 토끼를 못 잡았다고 하셔서요.”
“뭐?”
“대신 이걸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노바가 은색 통을 내밀었다.
힐데가르트는 그제야 그 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와 오물거리는 입.
갈색 털, 봉긋하게 솟아오른 복슬복슬한 꼬리…….
“설마, 지금 토끼를 못 잡았으니 대신 다람쥐를 잡아 온 거야?”
“네!”
“…….”
아니, 그냥 답례로 한 마리 잡아달라고 한 건데 다람쥐는 왜 데려와?
힐데가르트는 시끄럽게 찍찍 우는 다람쥐를 난처하게 보았다.
“토끼도 꼭 잡아 줄 테니 기다려달라고 하셨어요!”
난처한 시선을 레디스와 교환한 것도 잠시.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얌전히 기다려 줄 테니까 꼭 토끼로 잡아 오라고 해줘.”
“예!”
노바는 씩씩하게 대답한 다음, 곧바로 키스케가 있는 적색 조로 돌아갔다.
졸지에 탈출을 꿈꾸는 다람쥐 한 마리를 손에 넣은 힐데가르트가 얼굴에 손을 얹고 웃어버렸다.
* * *
그 후로 사흘이 더 흘러, 사냥 대회 나흘째가 되었다.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사냥 대회는 갈수록 적색 조와 청색 조의 경합 구도로 치닫고 있었다.
적색 조에는 거의 모든 사냥감을 독식하는 키스케가 있었고, 청색 조에는 검술 대회 우승도 모자라 사수(射手)로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레디스가 있었다.
‘박빙이구나.’
그 무대에 끼지 못하는 조가 바로 녹색 조였다.
힐데가르트가 오늘도 불이 꺼질 듯 말 듯 한 녹색 조의 횃불을 바라볼 때였다.
“저기, 힐데가르트 공녀님!”
“아, 네?”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오늘도 솜사탕 같은 머리를 예쁘게 말아둔 사람이 있었다.
“왜 그러세요, 유시스 양?”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중요한 이야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