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힐데가르트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랑케르트 공작이 머물고 있다는 공관으로 향했다.
칼란도가 그녀를 반기며 웃었다.
“험한 일을 당하셨소.”
이 사람이 무슨 용건이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긴 했지만, 지금 같을 때는 아니란 말이지.’
그녀가 못마땅한 눈으로 칼란도를 보았다.
“오후에 있었던 일은 전해 들었소. 티모시 남작을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사람에겐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거 아니겠소?”
“무슨 일로 얼굴을 보자고 하셨나요?”
“티모시 남작은 보티네 백작에게서 많은 일을 배웠네. 백작의 억지를 들어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저는 용건을 여쭤보았습니다만.”
“공녀.”
칼란도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아카락시아 공작가로서는 다소 억울한 일을 겪고 있지. 내 그 마음 다 이해한다오.”
“이해를, 하신다고요.”
감싸줄 부모 하나 없는 공작가의 지주 상단을 위협했던 랑케르트가?
힐데가르트의 웃음이 싸늘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셋 사이에서 중재해 주겠소.”
“뭐라고요?”
“보티네 백작은 레디스 공자의 행실을 꼬투리 잡아 배상금을 요구할 모양이더군.”
“…….”
칼란도가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이대로라면 레디스는 사람에게 활을 쏜 미치광이로 기억될 거야. 그런 말을 가만 듣기보다는 내 도움을 받는 게 좋지 않겠나?”
이 사람이 무슨 속셈일까. 힐데가르트의 의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대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겠지.”
“바라는 게 있으신가 보네요?”
그는 힐데가르트의 싸늘한 대답을 다르게 해석했던 모양이다. 칼란도가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가 편지를 한 장만 써주면 된다네.”
편지?
“어려운 게 아닐세.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관리하는 캄파넬이라는 땅에, 우리 가문의 발굴 조사단을 파견하고 싶네.”
“……80년 전 마성신 전투가 있었던 땅에 말이죠.”
“그래. 아직도 신원을 알 수 없는 유해가 여럿 묻혀 있으니, 그것을 수습하고 싶다네.”
그럴듯한 이유, 제법 친절해 보이는 웃음.
“그러니 우리 조사단이 통과할 수 있도록 편지 한 장만 써주지 않겠나?”
하지만 그것들에 속을 만큼 힐데가르트는 녹록하지 않았다.
“싫다면요?”
“……뭐?”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
“그럼 그땐 저희가 억울한 일을 겪고 있는 걸 보고만 계시려고요?”
그녀가 사납게 웃자, 칼란도의 표정은 가면을 갈아 치우듯 순식간에 변했다.
“세상일이란 둥글게 넘어가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법이야. 반면 작정하고 발을 걸고 넘어뜨리려 하면 끝이 없지.”
“계속 넘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협조해라. 그런 말이신가요?”
“…….”
“훌륭한 협박이네요.”
얽혀 있는 두 시선이 한층 서늘해졌다.
“게다가 하필 캄파넬이라니.”
그녀의 웃음소리가 선명했다.
“재밌네요.”
“재미있다고?”
“네. 최근 제 귀에 캄파넬과 랑케르트의 이름이 자주 들려왔거든요. 그것도 아주 불온한 소문으로요.”
던질까?
아니면 조금 더 기회를 볼까?
힐데가르트는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여기서는 빙빙 돌리지 말고 물어볼 때다.
“랑케르트 공작가의 사주를 받은 흑마법사가 아카락시아 공작가를 음해한다……. 어때요? 이런 소문은 취향이신가요?”
힐데가르트는 상대방의 흔들린 눈빛을 보았다.
“아니지, 소문이라고 하기도 어렵네요. 수작이라 해야겠죠. 랑케르트 공작가에서 거는 수작.”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실 것 없어요. 랑케르트 공작가에서 지주 상단을 무너뜨리려 한 일, 저는 전부 알고 있거든요.”
“그게 무슨 억지인가!”
“억지라뇨. 저는 증거와 증인이 없으면 이런 말은 꺼내지도 않는답니다.”
순간, 칼란도는 눈앞의 작은 소녀에게 짓눌릴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랑케르트 공작 각하. 캄파넬에 그렇게 집착하시는 이유가 대체 뭐죠?”
“…….”
“설마…… 성검 때문인가요?”
칼란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드디어 보인다.
얼굴에 덮은 가면이 떨어져 나가고, 표정 아래에 숨기고 있던 감정.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는 경악.
“성검 때문이로군요. 이걸 위해서 레디스를 함정에 빠뜨린 거군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누가 그런 소릴 하던가?”
“제가 직접 알아본 거예요. 보아하니 진상을 깨달은 건 저 하나인 모양인데.”
속마음이야 뻔하다.
‘그런 걸 어떻게 이런 어린애가 알고 있을까, 그런 얼굴을 하고 있네.’
힐데가르트의 입가에는 의례적인 미소조차 걸리지 않았다.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힐데가르트 공녀!”
“애초에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레디스는 하지도 않은 짓을 덮어쓰는 꼴이잖아요?”
“당신?”
칼란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가 뒤집어쓴 상식인의 가면이 땅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게 느껴졌다.
공작의 분노가 화산처럼 터졌다.
“무지렁이나 다름없는 공작가 계집년이 누구를 마구 불러! 배워먹은 것도 없는 게 감히!”
“……하.”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내 경고를 넘기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경고는 나도 하는 중이야, 칼란도 랑케르트.”
그러나 칼란도의 기세가 아무리 사나워도, 힐데가르트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공작의 분노와 정면으로 맞섰다.
“랑케르트는 내 가족과 가문을 건드렸어.”
레디스의 명예를, 레온하르트의 간절함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남의 마음을 이용했다.
편지를 써 달라고?
웃기는 소리.
그 대가는 곱절로 치르게 하겠어.
“그러니 당신을 시작으로 랑케르트가 몰락하는 걸 내 눈으로 봐야겠어.”
서슬 퍼런 눈빛이 타오르듯 빛났다.
* * *
칼란도 랑케르트는 미친 계집과는 할 말이 없다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가 떠나는 뒷모습은 제법 초조해 보였다.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키스케에게 찾아갔다.
“키스케,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그러나 키스케 대신 시종이 나왔다. 그는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갔나 싶었지만 무작정 없는 사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차라리 증거를 찾으러 갈까?’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화살이 빗나가서 나무에 맞았다고 했지? 그 흔적이라도 제대로 찾을 수 있다면…….’
하지만 티모시 남작이 배치해 둔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공녀님.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숲에 들어가기엔 위험한 시간입니다!”
“저 마법사예요! 내 한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열두 살짜리 어린애다.
한밤중에 사냥터로 들어가겠다고 하는데 주변에서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는 상황.
결국 힐데가르트는 내일 아침 일찍 오면 들여보내 드리겠다는 말만 듣고 공관으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온 그녀는 조심스레 레디스의 방문을 열었다.
“오빠. 자?”
“…….”
레디스는 돌아누워 있었다.
“레디스 오빠.”
“…….”
“레디스.”
“난 그런 짓 안 했어.”
역시 억울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걸까.
레디스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사람한테, 화살이나 쏘는…… 그런 짓 안 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당연하지!”
힐데가르트는 황급히 그를 위로했다.
“알아. 오빠가 그런 거 아니라는 거.”
“…….”
“난 오빠를 믿어. 알잖아?”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 그 한마디가 사람을 구하는 순간이 있다.
힐데가르트의 말에 레디스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녀는 억지로 말을 걸기보다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방에서 빠져나왔다.
쉽사리 잠들 수 없는, 유독 긴 밤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몇 가지 부탁을 했던 이오타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제법 차분해 보였지만, 머릿속은 이미 끓어 넘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칼란도 랑케르트를 다시금 떠올렸다.
‘흑마법사가 아니었지, 그 사람.’
공작에게는 마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아니라면, 왜 성검을 노리는 걸까.
‘레온 오빠도 참……. 골치 아픈 땅을 사 왔네.’
보석 광산을 주고 캄파넬을 가져왔을 정도라면, 성검처럼 귀찮은 건 얼른 신전에 돌려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
심란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레온하르트가 떠올랐다가, 플람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족이란 뭘까?
힐데가르트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피가 이어져 있다면 모두 가족일까?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피를 나눈 형제까지만 가족일까?
그렇지 않다. 힐데가르트는 그 질문의 대답을 오래전 내렸다.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하며 아끼고 함께하고자 하는 상대라면 가족이라고.
힐데가르트는 미하일과 레디스를 떠올렸다.
‘처음엔 그냥, 조카나 다름없는 애들이었는데.’
그녀를 걱정하고,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을 보고 있으면 애정이 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창문 밖에서 슬그머니 사람이 나타났다.
“이오타!”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힐데가르트가 창문을 열어주자, 그가 시종의 눈을 피해 방 안으로 훌쩍 들어왔다.
“공녀님. 말씀하셨던 대로예요! 틀림없습니다!”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새벽 내내 감시했던 보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흥분에 찬 이오타가 제가 직접 보았다는 광경을 늘어놓았다.
이오타의 보고를 들을수록, 힐데가르트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갔다.
“역시 그랬단 말이지…….”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 당장 보티네 백작을 찾아갈까요?”
“아니야. 이 일은 그렇게 풀어선 안 돼. 내일 아침에 해결해야지.”
레디스의 잘못된 소문이나 의혹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게 우선이다.
“이오타. 그때 보았던 추적 아티팩트 좀 빌려줄래?”
“네, 여기 있어요.”
“고마워. 내일 돌려줄게.”
이오타가 눈을 빛냈다.
“디안 소백작이 순순히 털어놓으려 할까요?”
“털어놓게 만들어야지?”
“보티네 백작이 태도를 바꿀 수도 있는데…….”
“그건 괜찮아. 어차피 결정적 증거가 우리 손에 있으니까.”
힐데가르트는 씩 웃으며 어느새 갠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일은 맑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