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힐데가르트가 개운해진 새벽하늘을 올려다보기 몇 시간 전.
비가 채 그치지 않은 시각, 아직 깜깜한 사냥터 숲에 숨어든 노바는 키스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키스케 전하, 제발 돌아가요. 이 시간에 숲에 들어오다뇨!”
“조용히 해.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숨어든 의미가 없잖아?”
노바는 팔짝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소 무모하게 구는 일 없었던 키스케가 이러니 불안이 하늘로 치솟았다.
울창한 숲은 한낮에도 나무 그림자 때문에 어둠이 낮게 깔린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운 밤에 숲을 헤매고 다닌다니!
게다가 여긴 오솔길도 없는, 짐승들이 사는 숲 한가운데다.
밤눈이 밝은 짐승에게 잘못 걸리기라도 했다간…….
“정 무서우면 너 먼저 돌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시면 화낼 거예요. 제가 무서운 건 숲이 아니라 전하가 다치시는 거라고요!”
“…….”
그 말에 키스케의 걸음이 멈췄다.
로브를 걸친 키스케는 램프를 튼 채 노바를 돌아보았다.
“위험하다는 건 나도 알아.”
“아신다고요? 그럼 왜…….”
“똑똑히 봤으니까. 레디스의 화살통에 화살이 한 발밖에 없었던 거.”
‘사냥에 정신이 없나 보지? 남은 화살이 한 발밖에 없잖아.’
‘전하께서는 아직도 토끼 찾느라 사냥은 뒷전이시고요?’
키스케는 레디스와 마주쳤을 때의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까 레디스가 그랬잖아? 화살이 참나무에 박혔다고. 그럼 증거가 남아 있을 거야.”
“그럼 날이 밝으면 다시 와요. 지금은 어둡잖아요! 비도 오고!”
“괜찮아. 이렇게 하면 되잖아.”
키스케가 들고 있던 램프를 높이 올리며 주변을 비췄다.
“그러다 팔 빠집니다! 밤새 램프 들고 다니실 생각이세요?”
“화살을 못 찾는 거보단 나으니까.”
“…….”
“아침부터 찾기엔 시간이 부족해. 손 놓고만 있을 순 없잖아.”
키스케의 완강한 고집에, 결국 노바가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 대신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치기예요!”
로열 가드인 노바의 실력을 잘 아는 키스케다. 그는 어두운 숲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진정 두려워하는 건…….
‘후회 안 하게 해준다고 했지? 믿고 기다릴게, 키스케.’
그녀의 웃음이 사라지는 일이다.
‘나도 알아. 이렇게 나돌아다니는 게 위험하고, 무모하다는 걸.’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걱정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날 선 눈을 하고 등을 돌릴 때, 힐데가르트는 레디스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지.
주변을 밝히는 촛불이 흐물흐물 녹아서 사라지듯, 그녀도 가문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을 사람이었다.
‘이상하지.’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하고, 가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 애정과 관심의 한 조각이라도 떼어서 간직하고 싶단 욕심이 일어난다.
우주가 넓은 자는 외롭지 않다던가?
역설적이게도 키스케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제 우주가 외로움에 비좁아진 사실조차 몰랐다.
외로움과 서글픔은 견디는 게 전부였다. 황족의 삶이란 건 그런 건 줄 알았다.
‘전부 짊어지고 가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부터,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봄과 여름, 가을.
계절이 선명한 저택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황족인 제게도 편히 말을 걸어준 사람.
그녀는 어둡고 비좁았던 키스케의 우주를 확장하고 더욱 멀리까지 볼 수 있게 해줬다.
그런 사람의 주눅 든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더 많이, 정말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퍽!
“전하?! 괜찮으세요?”
키스케가 굵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기울어진 몸이 수풀 안쪽으로 굴러갔다.
“너무 어두워서 발밑도 안 보이는데……. 이만 돌아가는 게.”
“조금만 더 찾아보자.”
“손이 얼음장 같으시잖아요!”
“괜찮아.”
그는 긁힌 뺨을 쓸어낸 뒤 일어났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은 키스케가 무릎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다시 등을 펴 일어났을 때.
“……아.”
그가 입을 벌렸다.
* * *
이른 아침.
힐데가르트는 아직 땅이 다 마르지 않은 시간에 공관을 나섰다.
아니, 정확히는 나서려고 했다.
“키스케?”
힐데가르트의 걸음이 멈췄다.
“너 왜 그래? 얼굴이 새빨갛잖아!”
“그래? 모르겠는데.”
키스케는 밤새 비를 맞은 꼴이었다.
옷은 물론이고 머리카락도 젖어 있었고, 머리카락 사이에는 나뭇잎 쪼가리가 섞여 있었다.
“난 괜찮아. 그보다…….”
키스케의 손에는 천과 가죽끈으로 둘러싸인 길쭉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이것부터 받아.”
“……이게 뭔데?”
“화살.”
힐데가르트는 눈을 깜빡이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레디스가 빗맞혀서 나무에 꽂혔다고 했던 그 화살이야.”
놀랍게도 그 안에 든 건 청색 조가 사용하는 화살이었다.
화살 깃이 파란색인 데다, 살대 부분에 적어둔 날짜를 보니 어제 지급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그건 힐데가르트가 이른 아침부터 찾아 나서려고 했던 물건이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찾아온 거야?”
“콜록, 콜록…….”
“잠깐, 너 이걸 찾으려고 밤새 숲을 돌아다녔어?”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못 찾으면…… 상심할 거잖아.”
“…….”
“너랑 레디스 둘 다.”
입가를 손으로 막은 키스케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그녀가 레디스의 손을 잡은 채 비를 맞던 모습이 떠올랐다.
빗줄기는 그녀의 좁은 어깨를 쉴 새 없이 때렸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의연하고 늠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키스케는 우산부터 씌워주고 싶었다.
네 애정을 인내와 고통으로 증명하지 않았으면 했다.
“다시는 그렇게 서 있지 마.”
“키스케!”
“그냥 그럴 땐…….”
키스케의 몸이 휘청였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이 힐데가르트를 향해 쓰러졌다.
“다시는…….”
정신을 잃은 키스케를 받아 든 힐데가르트는 곧장 큰소리로 시종을 불렀다.
소란스러운 아침이었다.
* * *
“어째서 저흴 이곳으로 불러 모으신 겁니까?”
티모시 남작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밤새 추적추적 내린 빗줄기와 전날 발생한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사냥 대회는 오후부터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게다가 진실을 보여주시겠다니요?”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보티네 백작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려고요.”
힐데가르트는 사람들이 다 모인 걸 확인하자마자 이오타에게 눈짓했다.
“범인 가려내고, 따지고, 사과받고. 그러고 싶으신 거잖아요?”
“공녀!”
보티네 백작이 그녀를 나무라듯 지팡이 끝을 흔들었다.
“되는대로 지껄일 생각일랑 말고 똑바로 말하게! 대체 뭘 하려는 게야?”
그녀가 턱짓하자, 이오타가 준비해 두었던 화살을 꺼내 들었다.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저건 설마…….”
“청색 조 화살 아니에요?”
“네, 맞아요.”
힐데가르트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당당히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사냥 대회에서 쓰이는 화살은 매일 새로, 스무 대씩 지급되고 있죠. 저건 어제 레디스가 사용한 화살이에요.”
이오타가 든 화살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일 만큼 깨끗했다.
거기다 화살대에 적힌 날짜를 보니 어제 지급된 게 확실했다.
“그리고 레디스가 말한 대로, 이 화살은 나무에 꽂혀 있었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적당히 땅에 떨어진 걸 아무거나 주워서…….”
“이 화살은 제가 아닌, 키스케 전하께서 밤새 비를 맞으며 찾아오신 겁니다.”
“……!”
벼락같이 소리를 치려 했던 보티네 백작의 입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리고 이 화살이 정말 나무에 박혀 있었는지, 그 흔적은 리브 백작 영식이 증언해 주실 겁니다.”
“수사관 리브? 수도에서 유명한 그 테리오 리브 총괄 말인가?”
“네, 그 리브입니다.”
테리오 리브는 유시스의 오빠였다.
유시스는 기꺼이 레디스를 위해 제 오빠에게 달려갔다.
리브 총괄은 수도의 이름난 수사관 총괄답게, 화살과 나무에 난 흠집 자국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걸 감식해 주었다.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들의 관심은 다시금 진실 공방으로 옮겨져 갔다.
“이 넓은 숲을 키스케 전하가 직접 뒤지셨다고요?”
“정말 레디스 공자의 화살통에 화살이 한 대 있었던 걸까요?”
“하지만 디안 소백작은 화살 두 대가 날아왔다고 했잖아요.”
“그럼 화살은 누가 쏘았다는 거죠?”
힐데가르트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관심을 이용하고, 레디스의 오명을 깨끗하게 씻는 게 우선이었다.
“하! 그럼 키스케 전하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열이 올라서 공관에서 쉬고 계세요. 밤새 고생하셨으니까요.”
“결국 이 자리에는 안 계신다는 소리가 아닌가!”
보티네 백작이 씨근덕거렸다.
“난 인정할 수 없네. 디안을 쏘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수작을 부리는 모양인데…….”
“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차가운 눈으로 보티네 백작을 응시했다.
“그래서 이곳, 연못가 근처로 모여달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품에서 아티팩트를 꺼냈다.
이오타에게 빌린 그 물건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품에서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지금부터, 기억 추적 마법으로 이 화살에 담긴 기억을 보여드릴 겁니다.”
일전의 다과회 때 뿌렸던 아티팩트가 제법 화제가 되었는지,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따지지 않았다.
“연못의 수면을 잘 보세요.”
힐데가르트는 아티팩트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리고 제 손을 연못 수면 위에 살짝 얹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린 그 순간.
“앗, 레디스 공자의 모습이 나와요!”
천천히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