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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96)화 (96/166)

93화

랑케르트 공작이 머무는 공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릴 만큼 조용했다.

하지만 카라딘이 공관을 방문한 순간부터, 소란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다 공작 때문이에요!”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사용인은 냉큼 서재에서 멀어졌다.

“내일 어머님이 오시면 전부 말할 거예요, 공작 때문에 사냥 대회를 망쳤다고! 다 말할 거야!”

이어서 테이블이 뒤엎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딘은 레디스 아카락시아에게 본인의 사냥감을 넘기게 된 일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얼마 후 카라딘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부딪힌 문은 한 번 튕기며 반쯤 문턱에 걸치듯 애매하게 닫혔다.

카라딘이 떠나자, 시종 한 명이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저대로 보내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신경 쓸 것 없다. 원래부터 제 어미를 닮아 사나운 녀석이니까. 그보다 알아봤나?”

“예. 확인했습니다.”

노쇠한 시종의 웃음에는 철판을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그 멍청한 놈들이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외지인에게 캄파넬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한 번 입을 열었으면 앞으로도 열겠지. 당장 그것들의 숨을 끊어놔라.”

“알겠습니다. 공작령으로는 언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랑케르트 공작은 대답 대신 코앞에 놓아둔 단검을 뽑았다.

“며칠 뒤에.”

‘성검 때문이로군요. 이걸 위해서 레디스를 함정에 빠뜨린 거군요?’

저를 보고 확신을 가지던 힐데가르트를 떠올리며, 공작의 눈이 차가워졌다.

“계집 하나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말이야. 처리하고 돌아가야겠어.”

“직접 나서실 생각입니까?”

“그게 깔끔해.”

공작이 다시 단검을 검집에 넣었다.

“노스웬, 자네는 내일 티모시 남작의 시종인 척 계집을 유인하게. 예네스에겐 내가 말해두지. 종유 동굴에 붉은색 수정을 보면 왼쪽으로 오도록 안내를…….”

두 사람이 신중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붉은 눈의 고양이 한 마리가 뒤편에서 흥미롭다는 듯 귀를 쫑긋거렸다.

대화는 오랜 시간 이어졌다.

그 때문에 둘 중 누구도 고양이의 눈이 붉어졌다가 노랗게 변하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 * *

키스케는 힐데가르트와 단둘이서 거리 축제에 나왔다.

‘뭐? 축제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이야?’

‘왜 불쌍하다는 눈으로 사람을 보는 거야? 어쩔 수 없잖아. 내 정체가 밝혀지면 큰 소란이 일 테니까.’

혼자서는 물론, 호위를 데리고도 거리 축제에 가본 적 없는 키스케였다.

황제인 막시밀리언은 정무를 보기 바빴고, 로바르네 2황자비도 외출하는 건 자중하라며 항상 꾸짖었다.

‘그래도 한 번도 못 가보는 건 인생의 손해야!’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말도 안 된다며 방방 뛰었다.

고민하던 그녀가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하며 가져온 게 바로 이 안경이었다.

“혹시 모르니 머리 색도 바꾸자. 어떤 색이 좋아?”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게 제일 어려운 요구란 말이야. 확 눈에 띄는 빨간색으로 바꿔버린다?”

“……그럼 검은색.”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힐데가르트의 마력이 은은하게 그의 머리카락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눈부신 금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다른 빛을 띠었다.

키스케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신기하네, 이런 것도 마법으로 가능하단 말이야?”

“…….”

“……힐데?”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키스케는 그녀를 보았다.

“힐데, 왜 그래?”

“아니…… 머리카락 색을 바꿔놓고 보니 참…….”

새삼 얼굴은 중요하구나.

잘생긴 게 최고구나 싶다.

‘플람도 머리카락이 어두웠지만 이거랑 다른 느낌이었지.’

묘하게 퇴폐적인 느낌이었던 플람에 비하면, 키스케는 훨씬 더 번듯한 인상이었다. 미래가 기대되는 제자다.

힐데가르트는 제 손으로 마무리한 완벽한 변장을 만족스럽게 보았다.

“자, 다 됐으니까 가자!”

“야! 손 좀…….”

“왜, 더 꽉 잡아달라고?”

“반대야, 놓아 달라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키스케는 크게 소리쳤으나, 힐데가르트는 깔깔 웃기만 했다.

축제 한복판에 뛰어든 키스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만큼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건 할아버지의 생일 연회 이후로 처음이었다.

‘시끄럽고 떠들썩하고…… 귀가 먹먹해.’

으레 그런 자리로 나가면 키스케는 쏟아지는 시선이 거북해서 자리를 피해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장담했던 대로였다. 시선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 축제가 열리는 곳은 길을 헤매더라도 큰길만 따라가면 광장 한복판으로 나올 수 있는 구조였다.

광장 쪽으로 갈수록 더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여행자와 거리 예술가, 상인, 평민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한데 섞여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종이 꽃가루와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키스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축제용 가면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

“키스케, 너 줄 서본 거 태어나서 처음이구나?”

“……어떻게 알았어?”

“자꾸 사람이 언제 줄어드나,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니까 알았지.”

“기, 기다리기 힘들단 말이야. 다른 의미는 없어.”

키스케는 살짝 부끄러워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거리를 돌아다니며 노상 연극과 악기 연주를 구경했다.

가장 좋은 좌석에서 합창이나 오페라를 보았던 키스케조차도 코앞에서 느끼는 생동감에 놀랄 정도였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키스케의 바짓단을 잡아끌었다.

“오빠! 꽃 주께!”

시선을 돌려보니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아이가 하얀 꽃을 내밀고 있었다.

비엔나소시지처럼 오동통한 손가락에는 하얀 패랭이꽃이 감겨 있었다.

“꽃! 꼬옥! 바더!”

명령조였다. 키스케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자 소녀의 엄마가 옆에서 대신 사과했다.

“어휴, 미안해요. 우리 애가 너무 들떠서.”

“……괜, 괜찮습니다.”

“꽃 안 받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키스케를 대신해서, 무릎을 굽히며 소녀와 눈높이를 맞춘 건 힐데가르트였다.

“와, 꽃 진짜 예쁘네! 직접 꺾은 거야?”

“웅! 요기는 부농색이야!”

“바깥은 하얀색이고 안쪽은 핑크색이네! 받아도 될까?”

힐데가르트가 아이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조아! 예쁜 언니 공짜로 다 주께. 우리 집에서 꺾어온 거야!”

“진짜? 그렇게 소중한 꽃이야? 고맙게 받을게!”

“우히힉!”

힐데가르트는 머리카락을 귀로 넘기며 꽃을 귓바퀴에 걸쳤다.

꽃을 준 아이와 엄마가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탁탁 털던 힐데가르트가 키스케에게 물었다.

“어때? 잘 어울려?”

“……예쁘긴 하네. 꽃 말고, 네가.”

“뭐?”

“아니, 아니! 너 말고 꽃이! 반대로 잘못 말한 거야!!”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진심이 담겼다.

키스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자, 힐데가르트는 실컷 웃었다.

두 사람은 공중그네 묘기와 저글링, 불놀이를 구경했고 그러다 비겁하게 야바위를 치는 노름꾼을 만났다.

키스케가 은화 세 닢을 연달아 잃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금화 두 닢을 따냈다.

“저건 비겁하잖아!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왈칵, 화를 낸 키스케는 놀이판에서 멀어지는 동안 드물게 흥분했다.

“키스케, 길바닥에서는 속이는 사람보다 속는 사람이 나쁘다는 말이 있어.”

키스케는 연신 속임수만 아니었다면 돈을 잃지 않았을 거라며 투덜거렸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야 키스케의 시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귀에 꽂아둔 꽃 없어졌다.”

“알아. 아까 사람들이랑 부딪쳤을 때 흔들려서 떨어졌나 봐.”

힐데가르트는 별 미련이 없는 듯했으나, 키스케는 아쉬워졌다.

‘예뻤는데.’

그가 힐데가르트의 옆모습을 빤히 보고 있을 때였다.

장신구를 파는 상인 한 명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세요! 예쁜 게 많아요! 거기 귀여운 아가씨한테 어울릴 만한 머리 장식도 있습니다!”

“전 괜찮…….”

“보고 가자.”

“뭐어?”

키스케는 무작정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매대에는 머리 장신구를 비롯해 각종 액세서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반지, 귀걸이, 목걸이를 쭉 훑던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어라? 이건 마석으로 만든 거잖아?’

힐데가르트는 녹색 반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오타가 만든 마석 아티팩트와 비슷한 물건으로, 기억에 관한 마법 주문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뭐예요? 직접 만드신 거예요?”

“아, 그건 예전에 저희 할머니가 만드셨던 거예요. 마음에 들면 싸게 줄게요.”

“싸게요? 여기 마법이…….”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잡상인은 반지에 새겨진 마법 주문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다.

‘이오타에게 연구 자료 겸 선물로 줘야겠다.’

힐데가르트는 값을 치른 뒤 반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동안 키스케는 매대에 진열된 머리 장신구 중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다.

“힐데.”

키스케는 푸른 끈이 흘러내리는 하얀 꽃 모양의 장신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잘 어울리겠다.”

“받아도 돼?”

“마석 광산 대신 주는 거야.”

“엄청 비싼 장신구네!”

힐데가르트가 웃는 사이, 키스케는 장신구의 값을 치렀다.

“잠시만 기다려. 지금 꽂아볼래.”

힐데가르트는 거울을 보며 장신구를 머리에 꽂았다.

장신구가 단단하게 고정되자, 흘러내린 파란색 끈은 머리카락과 함께 꼬아 내렸다.

“어때? 어울려?”

“……응. 꼭 하고 다녀.”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들뜨는 하루였다.

‘이래서 사람들은 축제를 좋아하는 거구나.’

키스케는 깨달았다. 황제가 된다면, 이런 순간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거구나.

먼 곳에서 둥실둥실, 바람을 타고 온 비눗방울 하나가 퐁 터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왜 웃음이 나오는 건지.

“힐데? 어디 가는 거야?”

“저쪽에 과일 꼬치가 있어. 가자!”

힐데가르트가 그의 손을 잡고 마구 뛰었다.

키스케는 경악했다.

“과일 꼬치?! 설마 이 먼지 날리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과일을 잘라주는 데 그걸 그대로 먹는다는 건 아니겠지?”

“과일은 다 씻어 온 거야. 그보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사람들이 다 듣잖아!”

힐데가르트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줄 서기를 통해 순서가 돌아왔을 때였다.

“오늘 만난 손님 중 제일 어린 친구들이네요. 데이트하러 왔어요?”

키스케의 혀가 빳빳하게 굳었다. 데이트? 데이트라니!

“어…….”

“안녕하세요! 네, 저희는 1번이랑 3번으로 주세요!”

“야, 너……!”

“어머, 귀여워라. 선물로 파인애플 꼬치 하나 더 줄게요!”

“감사합니다!”

뒷사람을 위해 빨리 대답한 힐데가르트가 키스케의 등을 떠밀었다.

“왜 멍하니 서 있기만 해. 그럴 땐 얼른 받았어야지.”

“그게 문제가 아니었잖아!”

키스케는 왠지 억울해졌다.

난 온종일 가슴이 뛰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왜 너는 속도 모르고 멀겋게 웃기만 하지.

‘불공평해.’

마음이 울렁이는 건 저뿐인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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