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정신을 되찾은 키스케가 방으로 찾아온 힐데가르트를 만난 건, 그가 눈을 뜬 지 한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키스케!”
힐데가르트가 벌컥 문을 열고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정신이 좀 들어?”
“……힐데?”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키스케는 눈을 깜빡였다.
그가 시계를 흘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안 잤어?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평소였다면 힐데가르트는 물론 키스케도 자고 있을 시간이건만.
힐데가르트는 지금 그게 문제냐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일이 좀 있었어. 그보다 몸은 어때? 안색은…… 낮보다는 훨씬 괜찮네. 이거 몇 개인지 알겠어? 어때? 잘 보여?”
“두 개. 시력엔 아무 문제 없어.”
“그럼 그 밖엔? 더 아픈 곳은 없고?”
“속이 좀 안 좋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아. 아까 의원도 다녀갔어.”
키스케가 작게 심호흡하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힐데가르트가 곧바로 그를 말렸다.
“계속 누워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완전히 회복되려면 더 걸릴 거야.”
“이 정도는 움직여도 괜찮다고 했어. 게다가 오래 누워 있었잖아.”
힐데가르트가 찾아오기 전, 정신을 되찾은 키스케는 테리오 총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테리오 총괄은 그가 쓰러져 있는 동안 벌어진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숙모가 구금당했으며, 황실에서 수사관이 내려왔단 것까지.
보고하는 사이에 의원이 도착했고 키스케는 진찰을 받았다.
다행히 로바르네가 구한 독이 즉사하는 극독(劇毒)이 아니었다.
의원은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키스케는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흐릿했던 기억과 억눌러둔 감정은 수면 위로 부상하듯 천천히 선명해졌다.
요동치던 맥박, 갈기갈기 찢기듯 아프고 뜨거웠던 가슴과 불길 속에서 보았던 로바르네의 얼굴.
그리고 쏟아지던 뇌우 속에서 나타난 힐데가르트의 모습까지도…….
기억은 떠올리기 무섭게 가슴 한가운데를 날붙이로 쭉 찢어 놓은 것처럼 서늘했다.
키스케는 애써 울렁이는 감정을 무시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미간을 일그러트린 힐데가르트가 한눈에 들어왔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눈뜬 건 참 다행인데, 일단 선택권을 줄게.”
“선택권?”
“다 낫고 크게 혼날래, 아니면 안 나았을 때 조금만 혼날래?”
어느 쪽이든 혼은 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키스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혼날 이유가 있어?”
“당연하지! 설마 없다고 할 생각이야?”
기어코 힐데가르트의 눈썹이 하늘로 향했다.
“황자비를 조심하라고 말했잖아. 알아들었다면서! 별일 없을 거라며!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날 밤에 황자비랑 단둘이서 만나? 심지어 나한텐 말도 안 하고!”
“조용히 몇 마디만 나누고 돌아올 생각이었어. 딱히 위험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바랑 내가 엇갈렸으면, 너 정말 큰일 날 뻔했단 말이야.”
“아카락시아 공작가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키스케의 침대 옆 의자에 앉은 힐데가르트는 허락된다면 그를 한 대만 쥐어박고 싶단 표정이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쥐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해.”
“한밤중에 의원을…… 뭐?”
“내가 잘못했어. 미안.”
“…….”
힐데가르트의 말이 뚝 끊겼다.
그녀의 표정이 묘해진 건 조금 재미있었지만, 이상하게 웃을 기운이 나질 않았다.
“너도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
“알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넌 더하겠지.”
키스케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설핏 스쳤다.
“네 경고를 듣지 않은 것도, 황자비 전하를 쉽게 믿은 것도 남들이 보기엔 한심하고 멍청해 보일 거라는 거…… 알아.”
“키스케.”
“그래도 내가 보고 겪었던 숙모님을 믿고 싶었어. 네가 경고했는데도.”
이런 한심한 꼴을, 너절한 속내를 다른 사람에게 터놓게 될 줄이야.
쥐구멍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독을 마시고 쓰러진 뒤, 몇 번이고 꿈과 현실을 오가며 허우적거렸다.
열에 들뜬 머리로 헛소리를 했던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힐데가르트가 이 손을 잡아주었던 걸 기억한다.
“이런 말도 한심하게 들릴 거 아는데 그래도…….”
키스케가 한참 말을 고를 때였다. 힐데가르트가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네가 한심해도 난 널 아끼니까.”
“…….”
그 순간, 억지로 꽉꽉 담아서 눌러 참았던 감정이 터질 듯이 솟았다.
키스케의 눈에서 미처 해소하지 못했던 감정이 눈물로 변해서 뚝뚝 떨어졌다.
“키스케?”
처음 겪은 독살에 대한 공포,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숙모가 미웠지만 동시에 제가 뭔가를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키스케는 뒤늦게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힐데가르트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키스케.”
“너…… 그런 말 좀 함부로 하지 마. 자꾸…….”
자꾸 널 믿고 싶어지잖아.
너한테 기대고 싶어지잖아.
내가 나약하고 한심한 인간이 될 것 같잖아.
키스케는 하려던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창피한 마음에 눈물을 훔치던 그에게 힐데가르트가 팔을 뻗었기에.
“키스케.”
소스라치게 놀란 키스케가 움찔거렸지만,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예언가가 아니지만 딱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
“지금까지 네가 겪은 모든 일이,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면서 웃으며 말할 날이 반드시 올 거야.”
그리고 그날이 오면.
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쁜 빛과 고운 향기를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지.
다른 사람을 믿고 도움으로써 네 마음을 따뜻하게 지피는 법을 알게 될 거야.
지독했던 날들이 네게 끈적하게 달라붙어도, 코웃음을 치겠지.
너를 넘어지게 만든 장애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무릎을 툭툭 털며 이야기하는 날이 반드시 올 거야.
그러니 괜찮아.
“사람을 믿고 사랑하게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마. 모두가 널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야.”
“…….”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해서 키스케는 흐트러진 숨소리를 감춰주었다.
“네가 겪은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면서 웃어넘기게 될 그때까지 곁에 있어줄게.”
“너…… 진심이야?”
“응.”
맥박치는 심장 소리가 먹먹했던 귓속으로 파고든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진심이니까 그렇게 두 번 세 번 확인 안 해도 돼.”
저를 끌어안은 힐데가르트는 따뜻했다.
그녀가 몸을 떼어내려 하면, 아쉬워질 사람은 키스케가 될 게 분명했기에 그가 느슨하게 마주 안았던 팔에 힘을 주었다.
“너…… 오늘 한 말 농담이라고 얼버무리지 마.”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분명하게 변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겨주는 상대가 있다면, 그건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겠지.
그럼 네가 나의 신이 된 거구나.
그런 말을 하면, 힐데가르트는 웃으면서 저를 하루 종일 놀려대겠지.
하지만 그거 말곤 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힐데가르트가 주눅 들지 않았으면 했고,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다.
“무르면…… 안 돼. 그럼 정말 나쁜 거야.”
“안 그런다니깐.”
힐데가르트 낯설고 어색하며 엉뚱했다.
세상에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만큼 특이했다.
이제는 그 특이함이 특별함으로 변해 버렸고, 힐데가르트에게 저 또한 특별한 이가 되고 싶었다.
비좁았던 우주에 들여놓고 싶은 단 한 사람이 제 품에서 빛나고 있었다.
키스케는 둘도 없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 * *
수도에서 내려온 사람은 황실 수사관뿐만이 아니었다. 황실 소속 의원도 함께였다.
키스케의 건강이 다 회복되기까지는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에 신문이 얼마나 시끄러워졌는지, 키스케는 물론 힐데가르트까지 티모시 남작이 마련한 성내 별관에 따로 묵어야 할 정도였다.
키스케의 독살 소식 때 한 번, 랑케르트 공작의 실종 소식으로 두 번 뒤집힌 신문은 어제부로 세 번째 뒤집힌 참이었다.
뒤늦게 올봄에 있었던 황제인 막시밀리언의 저주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복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더니……. 이렇게 한 번에 다 터질 줄은 몰랐는데.’
힐데가르트는 신문을 접으며 조용히 혀를 찼다.
미리 입수해 놨던 정보를 이때다 싶어서 터뜨린 건지, 취재 경쟁을 하면서 알아낸 건지.
어느 쪽이든 로바르네에게는 안 될 일이었다.
그녀를 향한 비판이 연일 폭우처럼 쏟아지며 지면을 채우고 있었으니까.
정작 힐데가르트는 황자비의 독살 사건은 막시밀리언이 결정할 문제이기에 그리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건 오히려 다른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