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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10)화 (110/166)

107화

“와, 이거 엄청난데요?”

시계탑에 올라온 아레스는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레벤의 시가지는 간판과 지붕 색을 파란색으로 통일했기에, 지금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오밀조밀하고 귀여웠다.

“꼭 장난감 미니어처 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아. 그거 뭐였더라, 흔들면 눈이 내리는 거!”

“스노우 볼.”

“맞아! 꼭 그거 같네요!”

힐데가르트는 아레스의 반응을 보며 흡족스레 웃었다.

“한눈에 보니 예쁘죠? 눈이 내리면 도시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시계탑이 미어터질 만큼 붐벼요.”

백색 도시 화이칼이 웅장하다면, 라벤은 사람이 살고 싶어지는 아기자기함을 간직한 도시였다.

힐데가르트는 이 정경을 사랑했다. 특히 무지개가 뜬 날에는 어느 영지도 부럽지 않을 만큼 예뻤으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에요.”

난간을 꼭 잡은 채 시계탑 아래로 목을 쑥 내민 아레스는 고소공포증에 걸리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힐데가르트는 아레스가 물어보는 건물을 전부 대답해 준 뒤, 몬테를로가 있는 남쪽 방향까지 가르쳐 주고 나서야 시계탑을 내려올 수 있었다.

아레스는 내려오는 동안에도 쉴새 없이 말을 걸었다.

“키스케, 근데 정말 그 안경을 쓰고 있으면 사람들이 널 못 알아봐? 난 너 알아볼 수 있는데?”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통하지 않는대. 처음 보는 사람한테만 해당하는 거지.”

“진짜 신기하네…….”

힐데가르트가 로빈의 손을 잡고 계단을 끝까지 내려왔을 때였다.

거리에 들어선 힐데가르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라, 소매치기인가?’

나이는 저보다 두세 살쯤 어린 것 같은데, 셋이나 되는 아이들이 몰래 뒤를 밟고 있었다.

‘나름대로 발소리를 줄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노바와 로빈, 아레스의 시종을 포함해 여섯 명이나 되는 조합은 한눈에 보아도 독특했다.

누가 봐도 시종을 끌고 다니는 귀족가 자제이기에 피해 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시계탑에 내려온 뒤부터 계속 졸졸 쫓아오고 있으니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소매치기치곤 담이 큰걸?’

노바도 뒤따라오는 아이들을 눈치챈 듯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혹시 가보고 싶은 곳이 더 있으면 안내할게요.”

“그럼 선물을 사기 좋은 가게로 안내해 줄 수 있을까요?”

“좋아요. 마침 적당한 곳이 있어요. 로빈. 아레스 공자님을 토리움 상점가로 가자.”

“……아! 네, 알겠습니다!”

로빈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앞장섰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키스케가 물었다.

“아레스, 너 정말 선물 사러 들른 거 맞아?”

“그렇다니깐. 왜 자꾸 물어보냐?”

“선물을 사러 왔으면 뭘 살지 정하고 와야 하는 거 아냐?”

“그을쎄에? 몬테를로로 내려가는 길이면 고양이 간식 샀을 텐데 아쉽다!”

엉뚱한 대답을 하는 아레스를 키스케가 묘하게 보았다.

힐데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틈을 타 노바에게 다가갔다.

“있잖아, 노바. 미안한데 가게에 도착하면…….”

“네. 따라오는 아이들은 제가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겠습니다.”

“고마워. 역시 노바가 있으면 든든하다니깐.”

“아닙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힐데가르트는 가게 앞에 도착했다.

“여긴……”

“아카락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상, 클레망스 악기점이에요.”

힐데가르트가 먼저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몬테를로 공작가에서는 모두 악기를 필수로 배운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바다 위에서 무료할 때 악기만큼 심심함을 달래기 좋은 물건은 없으니까요.”

아레스는 천장에 매달아 건조 중인 바이올린 부품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놀랍다는 얼굴로 힐데를 빤히 보았다.

“힐데, 몬테를로에 대해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네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힐데가르트는 악기점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는 키스케를 흘끔거린 뒤, 아레스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 굳이 악기를 살 필요 없어요.”

“…….”

“아카락시아에 온 건 키스케가 걱정되서잖아요?”

아레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얼마 후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당할 사람이네요, 힐데. 눈치가 얼마나 빠른 거예요?”

“제가 빠르기보단 키스케가 느린 거라고 생각해요. 천천히 구경하세요.”

“고마워요.”

힐데가르트는 악기점 특유의 윤활제 냄새를 킁킁 맡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로빈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좀 전에 노바 경께서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뒷골목으로 가셨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응? 아냐, 그거 신경 쓸 필요 없어. 곧 정리될…….”

퍼억!

자그마한 체구의 아이가 로빈을 뒤에서 힘껏 밀쳤다.

“꺄악!”

로빈의 몸이 난간에 부딪혔다.

중심을 잃고 돌계단에 머리가 부딪치자 쿵,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로빈!”

놀란 힐데가르트가 그녀를 부축했다.

로빈의 호주머니를 갈취한 갈색 머리 소년이 쏜살같이 달리더니, 기다리고 있던 검은 머리 소년에게 호주머니를 던졌다. 동시에 황급히 악기점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이런, 괜찮으세요?”

키스케와 아레스가 동시에 고개를 내밀었다.

“소매치기야! 로빈이 다쳤어!”

둘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눈빛을 주고받았다.

“내가 쫓아갈게!”

“아레스, 넌 갈색 머리 꼬마를 맡아!”

두 사람이 뛰어나가자 힐데가르트는 로빈을 가게 계단 앞에 앉혔다.

“아가씨, 저는 괜찮…….”

“억지로 움직이지 마.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 같아.”

로빈의 팔꿈치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나마 많은 양이 흐르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소란을 눈치챈 주인이 가게 앞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매치기와 부딪쳐서 계단을 머리에 찧었어요. 죄송한데 손수건이나 상처에 댈 만한 걸 받을 수 없을까요?”

“이런…… 들어오시지요. 천천히 부축하시고요.”

다행히 로빈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악기점 주인이 뜨거운 물수건을 건네주자, 로빈은 연신 감사하다며 중얼거렸다.

“로빈.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아가씨, 전 괜찮으니 무모한 행동 하시면 안 돼요…….”

“내 걱정은 하지 마!”

힐데가르트는 치안대를 불러달라고 말한 다음 가게를 나왔다.

‘하필이면 오늘…….’

다른 영지, 그것도 공작가에서 온 손님을 데리고 다니는 날이니 가능하면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소란을 피우면 아레스 공자에게 ‘우리 영지에 소매치기가 있어요’ 라고 광고하는 꼴이니까.

‘조용히 타일러서 돌려보내 주려 했더니!’

마음을 곱게 쓴다 해도 언제나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힐데가르트는 소년들이 뛰어갔던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여차하면 마법을 써서라도 찾아낼 생각을 하던 때였다. 키스케와 노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아아! 아파! 아파요!”

“그렇게 세게 잡아당기지 않았어요. 엄살 부리지 마세요.”

“진짜 아프단 말이야! 아파! 아프다고오!”

“키스케, 벌써 잡은 거야?”

노바가 검은 머리 소년을 붙든 채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아까 돌려보낸 아이들 말고도 따로 한패가 있었나 봐요.”

키스케는 로빈의 호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지갑은 무사해. 나머지 한 명은 아레스가 데려올 거야.”

“괜찮을까? 뛰어서 잡긴 힘들 텐데. 이곳 지리도 모르잖아.”

“괜찮을 거야. 아레스가 이 녀석들 수법을 잘 알고 있으니까.”

“수법?”

설마, 하던 힐데가르트가 검은 머리 소년에게 다가가 그의 소매를 걷어보았다.

소년은 몇 번 반항했지만, 노바가 힘을 단단히 주자 몸부림치기를 포기했다.

소년의 팔목에는 자그마한 문신이 찍혀 있었다.

‘역시.’

문신 모양은 바다에서 산다는 괴물, 시 서펜트(Sea serpent)였다.

힐데가르트는 이 문신을 꽤 잘 알고 있었다.

“치안대에 넘길 거지?”

“응. 그래야 할 거 같긴 한데…….”

다친 로빈을 위해서라면 당장 넘겨야겠지만, 너무 어린아이들이다.

힐데가르트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할 때였다.

얼마 후 시종과 함께 돌아온 아레스의 등 뒤에는 갈색 머리 남자애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 대여섯 명도 함께였다.

“늦어서 미안해요, 힐데.”

“아레스. 다친 곳은 없어요?”

“전 멀쩡해요. 그보다…… 그게, 음, 여기 있는 녀석들 말인데…….”

아레스는 힐데가르트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알아요. 몬테를로에서 자리 잡지 못한 좀도둑 꼬맹이들이죠?”

“아, 알아봤어요?!”

“몬테를로의 범죄 조직 레비아탄의 표식이잖아요. 유명하죠.”

“하아…….”

아레스는 깊게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공작가에서 관리를 잘해야 했는데.”

몬테를로 공작령은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뛰어난 목수가 배를 만들고, 항해사는 지도를 만들며, 파편처럼 인근 바다에 존재하는 섬에서는 황실에 바치는 소금을 채취했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짙은 법이다.

몬테를로 공작령에는 밀항하려는 범죄자, 염전 노예가 되는 부랑자, 목수나 선원 같은 직업을 가지고 싶어 하는 고아들이 가장 많은 땅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카락시아 영지에도 미치곤 했다.

바다로 나가는 데 실패하거나 텃새를 이기지 못한 꼬마들이 다시 내륙으로 올라올 때 아카락시아 공작령에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아니에요. 저야말로 모처럼 영지를 안내하는 날 못 보일 꼴을 보였네요.”

“다치셨던 분은 괜찮나요?”

“네. 클레망스 악기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곧 치안대가 올 거고요.”

아레스는 착잡한 얼굴로 한 무더기나 되는 아이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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