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마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혹은 힐데가르트를 직접 겪어보지 못했더라면 말도 안 되는 착각이라며 웃어넘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의 언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나이대 소녀와는 결이 다른 구석이 있었다.
특히 저보다 나이가 많은 상대를 앞에 두었을 땐, 단순히 비범하다는 말로 넘기기엔 어려울 정도였다.
‘내 판단이 빗나간 걸 수도 있지만…… 상관없어.’
키스케는 손에 들고 있는 일기장을 꽉 쥐었다.
어쩌면 헛발질하듯, 판단이 빗나간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관한 평판은 최악이었다.
가족 대부분이 죽고, 벼랑 끝까지 몰린 가문을 끌고 간다는 건 그녀의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이 지워져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이 순간만큼은, 저택이 유독 넓고 어둡게만 느껴졌다.
키스케는 한참 동안 힐데가르트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 * *
이틀 뒤, 힐데가르트는 단기 노역 형을 선고받은 소매치기들의 소식을 아레스에게 알려주었다.
그녀가 오브론 대공에게 쓸 답장을 몇 번이고 다시 고치고 있을 때였다.
“힐데 아가씨, 황실에서 사람이 왔어요. 도련님도 함께 오셨고요!”
“도련님? 설마 미하일 오빠 말이야?”
“네!”
공회에 출석하기 위해 수도로 갔던 미하일이 열흘 만에 돌아온 셈이었다.
“키스케는?”
“노바 경께서 부르러 가셨어요.”
“나도 금방 내려갈게.”
창문 밖을 보자 혼자서 돌아온 게 아닌지 다른 가문의 마차도 보였다.
힐데가르트는 즉시 펜을 내려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빠!”
“힐데.”
아래층에 있던 미하일이 그녀를 발견하고 한껏 웃었다. 그의 곁에는 짙은 갈색 머리의 중년 남성도 함께였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간 힐데가르트는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하하, 안녕하십니까?”
남자의 녹색 눈이 반짝였다.
“과연 미하일 소가주께서 공작령으로 내려오시는 내내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한 공녀님답습니다.”
“백작님도 참.”
미하일을 향해 웃는 남자의 손에는 금박이 입혀진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힐데, 이쪽은 베르하임 백작이셔. 잠시 용무가 있으셔서 공작령에 내려오셨어.”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베르하임 백작님. 힐데가르트라고 합니다.”
베르하임 백작은 황제를 대신하여 축사를 전하는 측근이었다.
‘올 게 왔구나.’
힐데가르트는 재빠르게 판단했다.
“키스케 전하는…… 아, 저기 오시는군요.”
키스케는 단정한 예복 차림으로 아레스와 노바를 대동하고 다가왔다.
따뜻한 빛을 품고 있는 금발은 아레스의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확 튀어서 금방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야, 백작.”
“키스케 전하께서도…….”
베르하임이 말을 바꿨다.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간 무탈하셨던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키가 조금 크셨습니다.”
그는 짤막한 안부를 확인하자마자 두루마리를 노바에게 건넸다. 막시밀리언이 보낸 황명서였다.
노바는 정중한 손길로 두루마리를 받은 다음 키스케에게 건넸다.
겨울에 핀 장미처럼 눈에 띄게 붉은 눈동자가 서신을 빠르게 읽어내렸다.
“정식으로 황태자 즉위식이 열리는 건 봄이 될 겁니다.”
“백작이 멀리까지 내려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서신은 잘 받았다고 폐하께 전해줘.”
“예. 황궁으로는 언제 돌아오실 예정이십니까?”
“…….”
키스케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혹시 폐하께서 바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전하의 뜻을 가장 우선시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도 봄까지는 가야 하는 거지?”
“예.”
“…….”
키스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가르트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묘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
용무를 마치고 마음이 가벼워 보이는 백작과 달리, 키스케는 살짝 심란해 보였다.
힐데가르트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그보다도 먼저 미하일이 빨랐다.
“힐데. 베르하임 백작께 저택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점심은 다 같이 들자.”
“……알겠어. 공회는 어땠어? 잘 다녀왔어?”
“물론이지. 오빠랑 나중에 이야기하자.”
결국 키스케와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었다.
점심과 저녁 모두 떠들썩한 식사가 되었다.
베르하임 백작은 의외로 주당이라 호위 기사인 노바에게 술을 권했다.
그때마다 곤란해진 노바가 한 모금도 안 된다며 거절하느라 분위기가 어색해질 뻔한 걸 미하일과 아레스가 잘 무마했다.
‘키스케가 황태자라…….’
이런 날이 오는구나.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나도 모르게 플람처럼 오랫동안 곁에 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버렸네.’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미하일과 레디스는 계속 베르하임 백작을, 키스케는 아레스를 상대하고 있으니 저 혼자서 자리를 지키는 게 영 지루했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산책 좀 다녀오려고. 잠깐 온실이나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마.”
힐데가르트는 로빈에게 눈짓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본관 동쪽 회랑을 빠져나오면 바로 입구와 연결된 유리 온실이다.
겨울에는 꽃이 대부분 졌으나 여전히 사계 내내 피는 관목이 우거져 있었다.
‘키스케가 황궁으로 돌아가면, 여기서 수업할 일도 없어지겠다…… 쓸쓸해지겠네.’
격자무늬로 된 창문 앞에서 기지개를 켰을 때였다.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생각지도 못한 인기척에 놀란 힐데가르트가 몸을 비틀었다.
키스케가 저쪽에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키스케…… 놀랐잖아.”
“딱히 기척을 죽인 적은 없었는데…… 그렇게 놀라게 했어?”
힐데가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침 네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어쩐 일이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잠깐 빠져나왔어.”
“할 말? 매일같이 보는데 새삼?”
키스케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착실히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야 항상 많지. 네게 고마운 게 많으니까.”
작은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항상 곁에 있어서 몰랐는데…….’
베르하임 백작의 말처럼 키스케의 키가 제법 컸다. 봄에는 주먹 하나 차이 날 뿐이었는데.
키스케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너한테 진지하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갑자기 닭살 돋게 왜 그래?”
“고마워.”
낮은 목소리에는 힐데가르트가 처음 들어보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나한테 하나뿐인 할아버지를 살려준 일도, 마법을 진지하게 가르쳐 준 것도, 사냥 대회 때 손수건을 주었던 것도.”
“…….”
“무엇보다도 내 목숨을 구해주고, 내 편으로 남아주겠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키스케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제 손과는 달리 조금 거친 굳은살이 박여 있는 감촉이 남달랐다.
하지만 뜨거운 체온만큼은 똑같았다.
“돌아갈 생각이구나?”
“응. 할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차질 없이 황위를 물려받아야 하니까.”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아쉬움이 물신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힐데가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넌 내 스승이자, 은인이고 내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야. 네가 하는 말도 그만큼 내게 중요하고.”
“…….”
“솔직하게 알려줬으면 해.”
“뭘?”
“너한테 레온하르트 공작은 어떤 사람이야?”
예상 밖의 이름이 키스케의 입에서 나온 순간. 그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힐데가르트는 엉겁결에 그 손을 뿌리쳤다.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
키스케는 빠져나간 손을 억지로 잡지 않았다. 그는 그저 천천히,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바라보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힐데가르트의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놀라움과 혼란. 의아함. 그리고 희미한 기쁨과 신기함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게 분명했다.
예전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마법사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법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한참 뒤 대답했다.
“……응.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기대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
“어떻게 알았어? 아무도 몰랐는데.”
“별채에 있는 피아노에서 레온하르트 공작의 일기장을 발견했어.”
“……오빠가 일기를 남겨놨어?”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예전부터 말로 안 되면 글씨로 써서라도 잔소리를 남기는 사람이었다.
일기를 쓰는 모습은 종종 보았지만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는데.
그걸 하필 키스케가 찾게 될 줄이야. 얄궂은 일이었다.
“그래. 네가 예상했던 게 맞아. 나는 오래전에 마성신을 봉인하며 죽었고, 어느 날 묘지에서 눈을 떴어.”
“…….”
힐데가르트의 설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키스케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였구나.’
네 꿈은 널 즐겁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어깨에 짊어져야 하는 짐 덩이에 불과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모두 끝내면 죽은 듯이, 꿈도 꾸지 않고 영원히 잠들고 싶다고 말했던 것도 진심이었겠구나.
“넌 정말 진심으로, 가문 재건 말곤 아무래도 상관없고 미련이 없는 거였어?”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번 생에서 네가 얻은 것들은 너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
키스케는 그녀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무엇이든, 한가지라도 그렇지는 않다고 제 말을 부정해 주기를 원했다.
“레온하르트와 아카락시아 가문, 그걸 제외하면 네게 남는 건 뭔데?”
“없어.”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키스케의 기대를 정면에서 박살 냈다.
“아무것도 없어, 키스케.”
“나조차도 아무것도 아니야?”
“응. 너조차도.”
“…….”
“레온 오빠나 가문 재건에 비교한다면 내 새로운 삶조차도 그렇게 큰 의미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