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키스케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던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환해졌다.
“짠! 어때? 놀랐어?”
“…….”
“농담이야, 농담! 어떻게 아무런 의미가 없겠어? 그래도…… 으음, 뭐라고 말해야 우리 전하께서 이해하실까?”
“얼버무리지 마. 농담이 아니잖아.”
“…….”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바보는 아니야. 마냥 어리지도 않고.”
“뭐라는 거야. 아직 한참 어리면서.”
“그래. 이렇게 습관적으로 나를 어린애 취급하던 것도 이젠 이유를 알게 되니 속이 시원하다.”
너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게 아카락시아 공작가였고,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이었기 때문에 부표처럼 그 근처를 떠돌고 있는 거구나.
키스케의 대답은 담담했다.
“네 마음을 알 거 같아.”
“…….”
“푹 잠들고 싶다던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겠어.”
힐데가르트는 뒤늦게 고개를 흔들었다.
“키스케. 그때 했던 말은 그렇게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어.”
“괜찮아. 네가 어느 쪽을 더 중요시하느냐를 따지고 싶은 게 아니야.”
이해하는 동시에, 인정하게 된다.
“난 너에게 레온하르트 공작이나 아카락시아 가문과 비교하기엔 보잘것없고 모자라겠지.”
“…….”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뭐?”
키스케는 80년 전의 그녀를, 레온하르트 공작을 모른다.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은 오직 현재를 사는 힐데가르트였다.
“넌 나에게도, 가문에도 중요한 사람이야. 그리고 너는 최선을 다했어. 그런 너한테 아무것도 안 남으면 그건 잘못된 거야.”
마음의 짐을 빨리 내려놓고 싶어 하는 그녀였다.
키스케는 그녀의 마음을 존중했으나, 동시에
“공작가가 옛날처럼 융성해지더라도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키스케는 이제 과거를, 저를 힘들게 한 사람에 대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가 원하는 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는 일뿐이었다.
곁에 남아준 사람에게 더 좋은 이가 되고 싶었다.
힐데가르트가 그녀 자신을 소중하게 돌보지 않는다면, 그녀를 아끼는 키스케 또한 슬픔을 느낄 것이다.
“나는 널 거두고 돌봐주었다는 레온하르트 공작처럼 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렇기에 이 순간, 키스케는 다짐했다.
“나만의 방식으로, 네가 나에게 안겨준 만큼의 행복과 평온을 건네주고 싶어.”
“키스케.”
“너를 좋아하니까.”
정말 좋아해. 네가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말이라는 걸 알지만.
문득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렇지 않다며 스스로를 다독일 때 오늘을 떠올려주길 바랐다.
너는 아직 어린애가 무슨 소리냐며 웃겠지.
그래도 이 마음은 진심이다. 네가 얼버무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전한다.
키스케의 예감은 적중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정신 차려!”
“…….”
“있잖아. 그런 말을 하기에는 네가 너무 어려. 내 눈에는 너나 미하일이나 레디스나, 다 똑같아.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그녀에게서 돌아올 반응을 알고 있었음에도 키스케는 입 안쪽을 꾹 깨물었다.
힐데가르트의 걸음이 그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가문이 옛 영광을 되찾는다면 내 역할은 끝나는 거지만, 그렇다고 죽거나 사라진다는 건 아니야. 우리 꼬맹이 전하가 걱정 많이 했구나?”
“…….”
“내가 벌인 일을 다 끝내면? 아마 온실에서 종일 게으름을 부리면서 낮잠이나 자겠지.”
키스케는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존중할게. 네가 바라는 대로 할 수 있게…….”
“말은 잘한다. 뭘 어떻게 해주시려고요?”
“네가 원하는 크기로, 세상에서 가장 크고 멋진 온실을 지어줄게.”
“그건 내 힘으로도 할 수 있는데?”
“……네 낮잠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대신 쫓아내 줄게.”
“그리고, 또?”
“푹 잠들 수 있게 네 곁을 지켜줄게.”
“고마워. 그렇지만…….”
“네가 날 외면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마지막까지 네 편이 될게.”
“…….”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예상 밖의 진지한 대답에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인간이었다.
‘진짜’ 힐데가르트가 아닌데다 흑마법으로 소생한 영혼이 어떻게 될지는 그녀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내일 당장,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고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예상 밖의 사태에 그녀는 입을 닫았다.
“키스케.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보장해 줄 수 없어. 보답해 줄 수도 없고”
“……그래도 괜찮아.”
키스케는 애원하듯 말했다.
“보답은 바라지도 않아. 그러니까 내가 한 말은 잊지 마.”
이 세상 어딘가에 너를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녀가 분명하게 기억해 주길 바랐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에게 애매한 대답조차 남기지 않았다.
황태자가 된 사람의, 사탕처럼 달콤한 말은 단잠에 빠진 소녀들이 꿈꾸는 말들일 테다.
그리고 힐데가르트는 결코 꿈조차 꾸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말이 한때의 철없는 감정을 먹고 자란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때때로 날카로울 정도로 맞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녀가 사랑했던 날들은 결국 과거였다.
지금 힐데가르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현실이 그녀가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날이었다.
“……어쩌자고 나를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걸 해?”
언젠간 내가 누구인지 알아봐 준다면 기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키스케가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곧 떠나야 하잖아. 그렇지만 영원히 멀어지고 싶진 않아”
“…….”
“내가 나에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기억해야 해.”
키스케는 그녀의 손등 위에 자그마한 입맞춤을 남겼다.
자그마한 새 한 마리가 남기는 키스처럼 간지러워서, 힐데가르트는 그 손을 뒤로 숨겼다.
* * *
노바를 통해 그에게서 레온하르트의 일기장을 돌려받은 힐데가르트는 차마 그것을 펼쳐보지 못했다.
펼쳐보는 순간, 영원히 그녀가 사랑했던 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계속 그 시절에 얽매이게 될 것 같았다.
그녀는 키스케가 한때의 철없는 감정으로, 치기 어린 말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날들이 과거라는 걸.
지금 내 눈앞에 실재하고 있는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걸.
‘그걸 인정하는 순간…… 진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진 않아.’
정말이지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힐데가르트는 손을 등 뒤로 숨긴 자신을 가만 바라보던 키스케를 떠올렸다.
매번 툴툴거리거나 시비조로 말하던 키스케는 어젯밤만큼은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어휴, 이런 생각 그만하자. 어차피 나중엔 부끄럽다면서 지우고 싶은 역사가 될 텐데.”
키스케는 너무 오랫동안 저 아닌 다른 또래 여자아이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 생긴 착각이 분명했다.
힐데가르트는 뺨을 톡톡 두드린 다음, 다 쓴 편지를 들고 미하일을 찾아갔다.
“오빠, 혹시 바빠?”
서재에 앉아 있던 미하일이 그녀를 발견하고 방긋 웃었다.
“바쁘긴, 왜 그래, 힐데?”
“편지를 쓰고 있네? 무슨 연락이라도 왔어?”
“응. 리브 백작가에서 혼담이 왔어. 힐데 너도 알지? 유시스 백작 영애.”
힐데가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홍색 머리의 솜사탕 같은 소녀는 가을 사냥 대회 때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을 가지게 한 상대였다.
“당연히 기억하지. 설마 리브 백작가에서 혼담이 온 거야?”
“응.”
“뭐,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지자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정식으로 들어온 혼담 제안은 아니고, 영애 측에서 그럴 의사가 있다는 연락이야.”
“유시스는 나랑 거의 비슷한 또래잖아. 벌써 혼담이라니…….”
가만. 레온 오빠가 약혼했던 것도 이쯤이던가?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지켜보던 미하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놀랐어?”
“레디스는 뭐라고 해? 이거 레디스 오빠도 아는 거 맞아?”
“어, 알고 있어. 좀 당황하긴 하더라. 그래도 영 싫은 눈치는 아니던데?”
“허……. 그럼 설마 혼담을 받아들이는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시스 영애가 적극적인 데다 레디스도 마음이 없는 거 같지는 않으니까…… 조금씩 교류 범위를 넓혀보면 좋을 거 같아. 힐데 넌 반대야?”
“아냐! 그렇지는 않아.”
레디스 본인이 싫다고 하면 모를까, 쌍방이 서로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다면 축하할 일이었다.
‘게이트 사업이 두각을 드러냈을 때 혼담을 빌미로 다가오는 가문보다는 백 배 낫지.’
힐데가르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미하일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나중에 작위 계승식 때 초대해야겠다. 그렇지?”
“응. 나도 찬성이야. 참, 요전에 말했던 오브론 대공 각하와의 협상이 다 끝났거든?”
“벌써?”
“응. 오브론 대공령에 이동 게이트를 설치하기로 했어.”
“……힐데. 내 동생이지만 정말 못 하는 게 없구나?”
“칭찬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내년 봄이나 여름쯤에 오브론 대공령에 한 번 다녀오려고. 마법진을 설치하는 건 내가 제일 잘하니까.”
“…….”
미하일의 표정이 묘해졌다.
“오빠?”
“으음, 아니. 힐데 네가 원하는 거라면 당연히 찬성이지만…… 너무 거기에만 매달리는 거 아니야? 겨울엔 추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던 내 동생은 어디로 갔지?”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