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Chapter 10. 비즈니스를 시작해 볼까요?
“할아버지! 할아버지이!”
“일리야.”
유독 하늘이 푸른 가을이었다. 일리야는 정신없이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잡아 든 채 계단을 내려왔다.
“할아버지, 벌써 가세요?!”
“뛰지 말고 천천히. 그러다 넘어지겠구나.”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오브론 대공의 표정이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부드러워졌다.
오브론 대공은 저에게 달려오는 일리야를 와락 안아 들어 한 바퀴 돌린 다음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아직 미하일 소공작의 계승식까진 이틀이나 남았잖아요. 그런데 벌써가시는 거예요?”
“이 할애비는 미하일 소공작의 후견인이니까 말이다. 나름대로 할 일이 많단다.”
“그럼 언제 돌아오세요? 오래 걸리시는 건 아니죠?”
“금방 돌아올 게다.”
“……안 가시면 좋겠는데…….”
일리야는 말꼬리를 흐리며 오브론 대공을 흘끗 보았지만, 할아버지는 인자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일리야도 알고는 있었다.
오브론 대공가에서 아카락시아 공작가까지는 꼬박 닷새가 걸리는 거리였다.
원래라면 훨씬 더 일찍 출발했어야 하는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이틀 전에 출발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알았어요. 곤란하게 굴지 않을게요. 전 할아버지의 착한 손녀딸이니까!”
“고맙구나.”
“저도 다 알아요! 이동 게이트인가 하는 걸로 순식간에 공작령까지 갈 수 있다면서요?”
“호오. 알고 있었느냐?”
“그럼요. 소문 들었거든요.”
일리야가 가슴을 쭉 내민 것도 잠시. 그녀가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진짜예요? 정말 그 장치…… 이동 게이트를 쓰면 한 번에 아카락시아 공작령까지 갈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하더구나. 직접 이용해 보는 건 이 할애비도 처음이다만.”
“그럼 저도 가면 안 돼요?”
“……일리야.”
“궁금하단 말이에요! 네? 가서 얌전히 있을게요! 게다가 힐데가르트 공녀님이면 제 은인이잖아요.”
오브론 대공은 필사적으로 조르는 일리야의 모습에서 카유크를 겹쳐 보았다.
그가 무심코 웃으며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녀에게 인사를 할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거란다.”
“그래도…….”
“일리야.”
“……진짜 빨리 짐 쌀 수 있는데. 옷이랑 모자만 챙기면 되는데…….”
그러나 일리야는 더 떼를 쓸 수 없었다.
때마침 대공가에 시간 맞춰 도착한 사람 때문이었다.
바깥에서 마차가 멈추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안 가 저택 현관이 열리며 로브를 쓴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가 로브를 벗자, 겨울 들판을 누비는 회색 늑대 같은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말 잘생긴 사내였다.
“어서 오게. 이오타.”
“오브론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일리야는 방금까지 조르던 것도 까맣게 잊고 상대를 보며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이오타의 눈부신 외모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그에게 순식간에 푹 빠지게 했다.
“일리야, 이 할애비가 나중에 꼭 데려가 주마.”
“……앗, 네, 네에. 죄송해요, 자꾸 졸라서.”
오브론 대공은 모자를 쓰며 물었다.
“한데 일리야, 혹시 카유크에게 연락이 온 적은 없느냐?”
“오빠요? 한 번도 안 왔어요. 지금쯤 설계도 그리느라 정신없을걸요?”
이오타를 힐끔거리며 할아버지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던 일리야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오피니움에 간 뒤로부터 놀러 다니는 것도 그만두고. 재미없어. 카유크 오빠 멍청이. 바보 천치.”
“연락이 없어서 섭섭했던 모양이구나? 이 할애비가 단단히 일러두마.”
“오빠는 왜요? 찾으시는 이유가 있어요?”
“나중에 알려주마.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네. 무사히 잘 다녀오셔야 해요! 혹시…… 이상한 마법사들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세요? 네?”
“알겠다, 걱정 말거라.”
대공의 곁에 있던 기사는 일리야의 눈빛에 설핏 불안감이 스며드는 걸 놓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녀님. 제가 책임지고 대공 각하를 호위할 테니까요.”
“휴리 경, 꼭 부탁해요!”
오브론 대공이 이오타와 함께 마차에 탈 때까지, 일리야는 팔이 빠지도록 손을 흔들었다.
으레 손녀와 헤어질 때면 무거운 마음이 들던 오브론 대공이었으나, 오늘만은 달랐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기대감이 맺혀 있었다.
* * *
오브론 대공을 태운 마차가 멈춘 건, 화이칼에서도 외곽의 여유 부지에서였다.
이동 게이트를 설치하기 위해 계획 구역으로 내줄 때까지만 해도 땅에 바위나 돌이 굴러다녔는데, 지금은 놀라우리만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호오, 종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정비가 잘 되어 있군.”
“대공 각하께서 사람을 빌려주신 덕분입니다.”
“저건 마법으로 만든 건가?”
대공이 이동 게이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개의 고정장치가 사방에서 거대한 마석을 들어 올린 채 단단한 쇠사슬로 감아두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쇠사슬이나 고정장치에서 발하는 문자를 보아하니, 마법적인 힘이 발휘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맞습니다. 힐데가르트 공녀님께서 직접 개량하신 이동 마법진과는 별개로, 마석의 소모량을 줄여주고 보호 마법 또한 걸려 있습니다.”
“저것도 공녀가 직접 고안한 건가?”
“예.”
이오타가 뿌듯한 얼굴로 끄덕였다.
“공녀님의 마법은 고유의 비술이 숨겨져 있어서, 단순히 문자를 따라서 그리는 것만으로는 똑같은 마법을 부릴 수는 없을 겁니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저건 무엇인가.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마석인 것 같은데.”
“안목이 좋으시군요.”
“저렇게 큰 마석을 구했단 말인가?”
허어, 하는 감탄이 날숨에 섞여 흘러나왔다.
놀라워하는 건 대공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의 곁에 선 기사, 휴리가 조용히 말했다.
“신기하군요. 제가 직접 게이트로 시험 이동을 해 보았을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일전에 휴리 경과 다른 기사분께서 테스트해 보셨을 때는 필요한 만큼의 마석만 사용했으니까요.”
이오타는 엘리사 일족이 직접 마련한 거대한 마석을 바라보며 자랑스레 말했다.
“앞으로 대공령과 공작령 사이를 넘나들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 크기의 마석은 당연합니다.”
“…….”
세상에 과연 당연한 게 있을까?
오브론 대공은 이오타의 말에 숨겨진 이면을 읽었다.
마법 실력은 물론, 이만한 마석을 직접 구해서 오브론까지 옮기고 이동 게이트를 설치한 공녀의 수완. 그리고 실행력까지.
‘미하일의 상속 재판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게 엊그제 같건만.’
‘그’ 힐데가르트 공녀가 직접 권한 사업이다.
허투루 준비하지 않았을 건 뻔했지만 이 정도였단 말인가. 새삼 작위 계승식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대공이었다.
‘아카락시아가 오브론이라는 기회를 잡은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는 건가.’
오브론 대공이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군.”
지팡이를 짚으며 이동 게이트로 다가간 대공은 휴리에게 눈짓했다.
“그림이 상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확인하도록.”
“예, 각하.”
“그럼 어디, 호언장담한 만큼 확실한 물건인지 시험해 보도록 할까?”
* * *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한 대의 마차가 들어섰다.
내리막길을 달리던 마차 밖으로 열아홉쯤 보이는 소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엄마! 저기 좀 보세요! 레벤이에요!”
“아이테르, 숙녀답게 행동해야지!”
못마땅한 목소리로 질책하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다정하게 딸을 달랬다.
“마차가 달리는 중에 일어서 있으면 위험하단다. 어서 앉으렴.”
아이테르는 별수 없이 들썩이는 몸을 시트에 앉혔다.
“아카락시아의 레벤…… 생각보다 더 멋진 도시인 것 같아요. 그렇죠, 아버지? 스케치북을 꺼내놓을 걸 그랬어요.”
“그러게. 정말 멋지구나.”
캠벨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어릴 적에 할머니와 함께 레벤에 시계를 사러 왔는데.”
“네? 할머니랑요?”
“그래. 그때만 하더라도 회중시계에 보석을 넣는 게 유행이었거든. 아카락시아는 보석으로 유명했고.”
그림을 좋아하는 부녀의 다정한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럼 뭐해요. 지금은 별 볼 일 없는데. 차남인가 장남이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거 말곤 딱히 내세울 게 없잖아요.”
“아니죠, 사냥 대회도 우승했잖아요!”
“그게 그거지! 사냥이든 검술이든 결국 교양에 불과한 건데 유난히 소란스럽더구나.”
캠벨 자작 부인의 목소리는 마차 바퀴에 짓밟히는 돌멩이처럼 딱딱했다.
“에흠.”
“왜요, 로라스? 내게 눈치 주는 거예요? 내 말이 틀렸나요?”
“여보, 그건 아니지만…….”
“당신은 태평해서 부럽네요. 난 걱정돼서 죽을 것 같은데.”
캠벨 자작은 슬그머니 아내의 눈치를 보다가, 딸의 눈치를 보았다.
아이테르는 ‘지금은 잠자코 듣는 게 좋을 거 같아요’라는 얼굴로 아빠에게 신호를 보냈다.
캠벨 자작 부인이 부채를 손바닥에 탁탁 내려쳤다.
“무슨 속셈일까요? 별 인연도 없었던 우리 공작가에게 초대장을 보내다니…… 게다가 아이테르를 꼭 데려오라는 게 수상해요!”
“우리 딸이 워낙 예쁘고 잘났으니 그런 것 아니겠소?”
로라스 캠벨은 아이테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이테르는 미술제에서 우승까지 했으니, 함께 소개받고 싶었던 거겠지.”
“지금 칭찬할 때에요? 다 큰 아이가 결혼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허구한 날 그림만 그리는데!”
“뭐 어떻소? 좋아하는 그림 그리면서 살면 좋은 거지.”
“로라스!”
“엄마, 다 왔어요! 아카락시아 공작가예요.”
못 들은 척하고 있던 아이테르가 솜씨 좋게 부부 싸움을 끊어놓았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자, 캠벨 자작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아이테르가 신기한 눈으로 공작저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자박자박, 엇박자로 걷는 소리와 함께 훤칠한 키의 청년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소년의 뒤편에는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예쁘다…….’
눈의 요정을 빚어두면 이런 모습일까?
펜과 연필만 있다면 무심코 그려보고 싶을 만큼 어여쁜 소녀였다. 아이테르는 새삼 스케치북이 없는 빈손이 아쉬워졌다.
“미하일 소공작! 오랜만입니다.”
캠벨 자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간 잘 지내신 모양이군요. 이번 작위 계승식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먼 캠벨 영지에서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동생인 힐데가르트인데, 일전에도 소개해 드렸지요?”
“물론이지요. 그런데 공녀님께선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캠벨 자작이 웃으며 허리를 굽히자, 힐데가르트는 드레스 끄트머리를 살짝 들어 인사했다.
“당연히 기억하죠! 그림에 조예가 깊으신 캠벨 자작님과…….”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아이테르를 향했다. 그녀의 눈이 새로운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반짝였다.
“아이테르 양을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정말로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