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118)화 (118/166)

115화

아이테르는 힐데가르트의 관심이 유별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캠벨 자작이 몇 마디를 더 나누는 사이, 이어서 마차가 한 대 더 도착했다.

“로빈. 손님께 안내 좀 부탁할게.”

“네, 공녀님.”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손님맞이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캠벨 자작 내외는 커다란 부부용 침대가 놓여 있는 방을, 아이테르에게는 오렌지색 커튼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손님방을 안내받았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주세요. 지금 테라스에서는 손님들께서 간단히 담소를 즐기실 수 있도록 오픈 티파티를 열고 있답니다.”

“티파티는 괜찮아요. 혹시 다른 곳을 구경해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보라색 끈으로 출입을 제한해 둔 구역 말고는 얼마든지 저택을 둘러보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시녀가 나가자, 아이테르는 금방 구두를 갈아신었다.

그녀는 스케치북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공작가는 저택뿐만 아니라 정원까지 깔끔하게 손질을 마친 상태였다.

아이테르는 손님에게 개방된 정원과 새로 지었다는 가제보, 유리 온실을 돌아다니며 정신없이 연필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녔을 무렵이었다.

흔들 그네 모양을 한 벤치에서는 레벤 시가지에 설치했다는 이동 게이트가 한눈에 들어왔다.

먼 곳에서 푸른빛을 내뿜고 있는 이동 게이트는 그녀의 관심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아이테르는 습관처럼 연필을 움직였다.

‘저게 이동 게이트구나.’

올해 봄.

신문을 뜨겁게 달군 소식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이동 게이트 사업이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동 게이트는 공간을 도약해서 화물은 물론 사람까지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장치였다.

이동 소요 시간은 2분.

이틀도 아니고, 2시간도 아닌 2분이었다.

중남부에 있는 아카락시아 공작령과 북부에 있는 오브론 대공령은 닷새 거리다.

처음에는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지게 된 건 오브론에 커다란 마석 장치가 설치되었을 때부터였다.

오브론 대공이 소문을 부정하지 않자 신문은 더욱더 활활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에 공작위를 이어받는다는 미하일 아카락시아 소공작의 인터뷰가 기사에 실렸다.

[제 여동생이 천재적인 마법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모두 아실 겁니다.]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가 지휘하는 사업은 무사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가을에 있을 작위 계승식 때 오브론 대공 각하께서 게이트를 이용해 방문하실 예정이지요.]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태반이었으나, 아이테르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신문에 괜한 말이 실렸겠어? 오브론 기사들이 직접 시험까지 해봤다던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거라면 애초에 신문에 실렸을 리 없다.

이어 오브론 대공령뿐만 아니라 수도에도 이동 게이트가 설치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이테르는 멍하니 생각했다.

‘정말 순간 이동 마법으로 다른 영지를 오갈 수 있다면…… 우리 영지에도 게이트가 있으면 좋겠어.’

그러나 꿈 같은 소리였다.

캠벨 영지는 남동부에 있는 자그마한 자작령으로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아이테르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스케치북 위에 이동 게이트를 그려나갔다.

스케치북 열 장을 채우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오랜만이에요, 대공 각하. 마침 오픈 티파티 중인데 잘 오셨어요.”

“공녀.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는군.”

“뵐 때마다 더 젊어지시는 것 같은데요?”

아이테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건…… 오브론 대공이잖아?’

힐데가르트와 미하일 소공작이 오브론 대공을 테라스 쪽으로 안내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대공을 발견한 다른 손님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 각하!”

“오랜만이네, 하디.”

“내일쯤에야 오실 줄 알았는데…… 벌써 도착하신 겁니까? 정말 일찍 출발하셨나 보군요?”

“일찍 출발하기는. 좀 전에 막 출발했지.”

“예?”

“이동 게이트를 이용해서 왔네.”

“네에?! 그럼 저 이동 게이트가 진짜 작동한단 말입니까?!”

사람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오브론 대공이 큰 소리로 웃었다.

“자네들은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이래서야 힐데가르트 공녀가 엄선해서 초대한 보람이 없지 않은가!”

아이테르는 깜짝 놀랐다.

황실 미술제에서 보았던 때와 달리, 오브론 대공의 표정이 부드러워서였다.

‘저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나? 엄청 무섭고 깐깐한 사람이었는데…….’

무심코 그쪽을 빤히 보던 아이테르는 힐데가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눈의 요정처럼 예쁜 소녀는 싱그럽게 웃었더니, 곧바로 제 쪽으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아이테르 영애.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네, 네! 물론이죠!”

아이테르는 황급히 스케치북을 등 뒤로 숨겼다.

“괜찮으시면 이쪽에서 같이 차라도 들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참여해도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죠. 어서 오세요.”

힐데가르트는 오브론 대공과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종이 재빠르게 다가와 홍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옆 테이블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오브론 대공은 직접 이용한 이동 게이트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미하일과 다른 손님에게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테르는 다른 의미로 정신이 없었다.

힐데가르트 공녀라 하면,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무려 키스케 황태자의 마법 스승이자, 그를 독살 위기에서 구한 공녀.

‘게다가 이동 게이트를 직접 고안해 낸 천재 마법사라고 했어.’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으나, 비범한 사람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진짜 예쁘네.’

아이테르는 무심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께서 제 이름을 외우셨을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작년 미술제에서 우승하셨잖아요. 작품 이름이…… <천지> 맞죠?”

“맞아요. 미술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저야 미술 실력이 부족해서 직접 그려볼 엄두를 못 내지만 흥미라면 항상 가지고 있었답니다.”

힐데가르트가 홍차가 든 찻잔을 들었다.

“특히 아이테르 양의 작품은 화제였다면서요. 부모님 두 분 모두 미술을 사랑하신다던데…… 그 영향인가요?”

“네. 특히 아버지가요! 저한테 어릴 적부터 그림을 가르쳐 주셨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림을 그리다 만나셨고요.”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테르의 표정이 풀렸다.

“황실 소유의 그림 중 <아이테르>라는 작품이 있어요. 두 분은 그 작품이 공개될 때 만나셨대요.”

“어라, 그럼 아이테르 양의 이름도 설마 거기서 따 오신 거예요?”

“맞아요.”

“로맨틱한 이야기네요.”

힐데가르트가 살짝 웃었다.

“어떤 그림인지 궁금하네요. <천지>와 <아이테르> 둘 다.”

“<아이테르>는 저도 본 적이 없어요. 아주 오래전에 공개된 게 마지막이래요.”

“지금은 황실에서 보관 중이라던가요? 저도 들은 기억이 있어요.”

아이테르는 홍차를 마시는 힐데가르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스케치북을 흘끗 보았다.

힐데가르트는 새끼손가락 끄트머리까지 아름답고 고운 상대였다.

아직 어리다지만, 공녀인 그녀가 저에게 이토록 살갑게 구니 다소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미술제에서 우승하신 뒤부터 작품 활동이 오히려 줄어드셨던데, 무슨 일 있으셨나요?”

“그림이라면 지금도 꾸준히 그리고 있어요. 다만 주목을 받질 못해서…… 하하하.”

아이테르가 머쓱한 듯 뺨을 쓸었다.

“왜요? 미술제에서 우승했으니 더욱 이름이 알려진 게 아닌가요?”

찻잔을 내려놓은 힐데가르트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지금 미술계는 살롱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잖아요. 아이테르 양이 미술제에서 우승하셨을 땐 큰 화제가 되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힐데가르트의 말마따나, 현재 제국의 미술계는 살롱의 작품을 높이 쳐주는 경향이 있었다.

돈 많은 귀족이 취향에 맞는 화가를 뽑아 후원하고, 귀족의 취향에 맞춘 그림을 그려 살롱에 내걸어 전시한 뒤 갤러리에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살롱이라는 울타리는 그렇게 견고해졌고, 울타리는 어느새 벽이 되었다.

살롱에 내걸지 않은 그림은 평가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견고한 벽이었다.

그런 벽을 뚫고 미술제에서 우승한 천재가 바로 아이테르였다.

그녀는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았던 <천지>를 미술제에 출품하여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아홉 명의 심사위원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며 만장일치로 뽑은 작품이었다.

“다른 작품은 잘 안 풀렸거든요.”

연필을 쥐고 찻주전자를 그리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나 억울함보다는 쓸쓸함이 맴돌았다.

“미술품 시장이라는 게 꽤 폐쇄적이에요. 대부분 수도에 갤러리나 살롱이 있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답니다.”

아이테르는 운이 좋게 미술제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천지>는 평가를 받았으나, 다른 작품은 별 볼 일 없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살롱 출신의 화가들도, 살롱을 소유한 귀족들도 <천지>는 인정하지만 다른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원 히트 원더. 단 한 개의 미술품이 크게 평가받고, 그 뒤엔 주목받지 못하는 화가.

아이테르는 그런 존재였다.

“생각보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요.”

직접 제 그림을 남들에게 선보일 갤러리를 짓자니 그만한 능력도, 인맥도 부족한 캠벨 자작가였다.

“미술제에서 우승하면 어엿한 화가가 되어서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그리면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철이 없었죠.”

아이테라가 연필을 비스듬히 쥐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림은 올해까지만 그리려고 해요. 어머니가 걱정이 많으시거든요.”

“아이테르 양.”

힐데가르트는 그녀가 아무런 도구 없이 완벽한 원을 그린 것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실은 저도 알고 있어요. 아이테르 양처럼 재능은 있지만, 기회가 없어서 능력을 다 내보이지 못하는 화가가 많다는 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오브론 대공은 기분이 좋은지, 그답지 않게 큰 소리로 내년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괜찮다면 <천지>를 제 갤러리에 걸어주시지 않겠어요?”

“……네?”

“제가 <아이테르>의 옆자리에 <천지>를 걸어드릴게요.”

아이테르의 눈이 흔들렸다.

“내년부터 아카락시아 공작령에서 비엔날레를 열 겁니다. 이동 게이트를 이용해서 누구나 보러 올 수 있도록 말이죠.”

그 순간, 옆자리에 있는 오브론 대공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우리 오브론 대공가에도 80년 만에 <백색 호수>를 공개하기로 했네. 아카락시아의 비엔날레라면 내놓기 아까운 기회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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