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비엔날레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미술 전시회였다.
전시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최소 100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되는 거대한 행사였다.
때문에 쉽게 열릴 수는 없는 행사였다.
많은 미술품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익성을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황실에서 보관 중인 미술품의 상당수를 대여받을 수 있다면야 또 모르지만…….
‘정말 비엔날레 개최라는 게 가능하단 말이야?’
게다가 비엔날레는 한 번만 열리는 게 아니다. 정기적으로 꾸준히 연다는 건데…….
아이테르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천지>뿐만이 아니에요. 다른 작품들도 함께 걸어드리지요.”
“…….”
“그에 따른 보수도 지급…… 이런. 미안해요, 갑작스러웠나요?”
힐데가르트가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 공녀님. 정말 비엔날레를 여실 생각이세요? 사람들이 보러 올 만큼 유명한 미술품은…… 확보하기 힘드실 텐데요.”
“네! 이미 수배는 끝났답니다. 황실과 오브론, 두 곳에서 모두 미술품을 내걸 수 있게 작품을 보내주기로 했거든요.”
“……!”
아이테르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작위 계승식에 와주신 분들께 먼저 알려드리는 거라며 힐데가르트가 신호를 보냈다.
“내년 비엔날레 기간에는 이동 게이트를 이용해서 누구나 작품을 보러 올 수 있을 거예요. 특히 수도에서, 살롱에 근처도 가보지 못한 평민들이 많이 보러 올 수 있게 신문 홍보를 준비 중이죠.”
그러나 상당수의 귀족도 보러 오리라.
수십 년 만에 공개되는 <아이테르>며 오브론 대공가에서 내놓는 <백색 호수>만 하더라도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으니까.
미술품은 훌륭한 작품이라 해도 개인이나 가문의 소유물이라, 다른 이들이 볼 기회가 없었다.
아무리 값비싸고 유명한 미술품이라 해도 한 세기 넘게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 그런 곳에 왜 하필 <천지>를……?”
“저도 살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의 미술계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힐데가르트가 웃으며 덧붙였다.
“아이테르 양의 어머니처럼요.”
“……알고…… 계셨군요.”
“네. 부인께서 살롱 문화를 비판하셨던 건 큰 화제였으니까요.”
아이테르의 얼굴빛이 차분해지자 힐데가르트가 손을 내저었다.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아요. 모든 미술 작품은 살롱의 후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면서 비판하셨던 어머님은 훌륭하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답을 바로 줄 필요는 없어요. 작위 계승식이 끝날 때까지 시간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캠벨 자작가는 이번 행사에 초청된 가문 중 가장 작위가 낮고, 비교적 아카락시아 가문과 연고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어느 귀족들보다도 미술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아카락시아 비엔날레는 사랑하는 딸의 작품이 공정하게 평가받고 전시할 무대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자작 부부가 놓칠 리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천재 화가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좋은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을게요.”
* * *
아카락시아 공작저에서 옷을 갈아입던 미하일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웃어버렸다.
“로빈, 그만 울어. 내일은 좋은 날인데 벌써 울면 어떡해.”
“눈물이 나는걸요……. 정말 축하드려요, 도련님. 이런 날이 왔네요.”
“고마워.”
거울을 바라보는 미하일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내가 축하를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오히려 널 포함해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이 정말 많은데…….”
“당연히 받아도 되지!”
“맞아! 받아야지 무슨 소리야!”
콰앙, 하고 문이 열리더니 다짜고짜 두 동생이 아우성이었다.
미하일은 특유의 순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반겼다.
“힐데. 레디스까지 같이 왔네? 이야기는 다 끝냈니?”
“응! 운은 떼고 왔어!”
힐데가르트는 미하일을 구석구석 뜯어보며 말했다.
“조금 고민하던 눈치였는데 괜찮아! 나중에 캠벨 부부를 만나서 한 번 더 설득할 거니까.”
“오브론 대공 각하가 가지고 오신 <유랑하는 광대> 그림도 진품이 확실해. 방금 확인하고 온 길이야.”
척하면 척으로 손발이 맞는 동생들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며 미하일을 보았다.
“그런데 그 비싼 걸 정말 형에게 선물로 주신대? 진짜로?”
“응. 나도 깜짝 놀랐어.”
<유랑하는 광대>는 오브론에서 13년 전 낙찰받아 큰 화제가 되었던 그림이다.
그런 걸 덥석 선물로 주겠다고 나섰으니 받는 태도로서도 얼떨떨했다.
‘아마 순수한 축하의 의도보다는, 힐데가르트의 비엔날레 사업에 힘을 실어주시려는 거겠지.’
올봄, 오브론 대공령으로 떠났던 여동생은 돌아오자마자 아카락시아 비엔날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동 게이트를 이용해 볼 기회가 필요해. 거기에 아카락시아가 건재한 건 물론, 이제 새로 시작할 준비가 됐다는 걸 보여줘야지!’
대공가 저택에 걸려 있던 커다란 미술품을 보고 떠올렸다는 비엔날레 사업.
힐데가르트의 재능과 발상의 차원이 새삼 남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평소라면 티격태격했을 레디스도 힐데가르트의 의견이 좋다고 판단했는지, 웬일로 팔을 걷어붙이며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미하일 형, 이렇게 보니깐 형이 결혼이라도 하는 거 같아.”
은회색 정장에는 소매와 옷깃 가장자리에 청색으로 이중 라인이 들어가 있었다. 우아함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거 칭찬이지? 고맙다.”
“하여튼 레디스는 칭찬을 칭찬답게 말 안 해서 문제라니까. 잘 어울려, 미하일 오빠.”
남매를 바라보던 로빈도 소리 내서 웃었다.
“아가씨께서 밤새 의상 디자인을 고르신 보람이 있네요”
“어? 힐데가? 나한텐 적당히 골랐다고…….”
“로빈! 계승식 직전까지 손님이 계속 오실 거야. 레디스 오빠 의복도 챙겨놨지?!”
힐데가르트가 황급히 미하일의 말을 끊으며 모른 척했다.
“네! 지금 가지고 올까요?”
“응. 혹시 모르니 한번 입어보자.”
“옷이야 내일 입어보면 되지. 왜 벌써부터 준비하고 그래?”
레디스는 귀찮은 티를 숨기지 않았으나, 힐데가르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준비는 빠를수록 좋은 거잖아! 이번 작위 계승식은 완벽하게 치러야 해.”
“어휴, 알았다. 그만해. 살다 살다 잔소리를 동생한테 들을 줄은 몰랐네.”
레디스는 툴툴거리면서도 로빈을 따라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저와 한 세트로 맞춘 레디스의 예복을 보며 힐데가르트가 확신했다.
‘그래. 이거면 됐어.’
준비는 끝났다.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새 출발을 할 시간이었다.
* * *
작위 계승식 당일.
손님이 하나둘 모일수록 정원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 가장 화젯거리인 소식은 역시 아카락시아 공작령에 설치된 이동 게이트였다.
“레나, 이야기 들으셨어요? 오브론 대공이 이용했다는 이동 게이트요!”
“그 마법 장치 말이죠? 저도 어제 레벤을 구경하며 직접 봤어요.”
“그 장치는 정말 공간을 뛰어넘는 게 가능한 것 같아요. 굉장하지 않아요? 마법이에요, 마법!”
마침 관심이 있던 이야기가 들려오자, 금세 각 영지의 내로라하는 안주인들이 모여 부채를 흔들었다.
“저 장치, 보통 물건이 아니에요. 제 남편도 어제 얼마나 놀라던지…….”
“사람만 오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어제 대공 각하께 들은 이야기인데 어지간한 물건도 다 옮길 수 있대요.”
“재밌겠네요. 저런 게 수도에도 설치된다면 상단은 비상이겠어요.”
“말도 마세요. 벌써 어제만 해도 로움 상단에서 사람이 찾아온 거 아세요?”
부채 너머로 오가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수록, 이번에는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우리 영지에도 설치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왜, 아카락시아 공작령은 수도하고도 이틀 거리잖아요. 남쪽으로 내려가면 몬테를로 공작령이니 무역 루트를 아예 새로 짤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요? 마법사가 이런 걸 발명해 낼 줄은 몰랐어요.”
“마법사가 아니라, 힐데가르트 공녀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놀란 귀부인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검은색 연미복 차림의 미남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 때문에, 귀가 뾰족하다는 사실은 귀부인들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말씀을 나누시는 도중에 실례했습니다. 저는 힐데가르트 공녀님을 모시고 있는 이오타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힐데가르트 공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바보는 없었다.
“현재 이동 게이트에 쓰이는 마석을 직접 관리하고 있지요.”
“그러셨군요.”
“예. 신경 쓰이는 이야기가 오가던지라 실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습니다. 괜찮으시면 공녀님께 직접 게이트를 설치해 달라며 요청해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공녀님께요? 미하일 소공작이 아니라?”
힐데가르트 공녀가 마법사라는 건 알았어도, 이 일을 주도한 건 미하일 소공작이 틀림없다 생각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게이트 사업은 공녀님이 전적으로 지휘하고 계십니다. 어디에 게이트를 설치할지도 그분께서 결정하고 계시지요.”
이오타는 힐데가르트에게 부탁받은 대로, 은근하게 이야기를 흘렸다.
“여러 가지 사업도 함께 진행하고 계시는데, 특히 요즘엔 비엔날레 사업에 집중하고 계세요. 그쪽으로 힘이 되어주실 분이 계신다면 게이트 설치도 긍정적으로 검토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