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그 말이 결정타였다.
게이트가 욕심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비엔날레 사업 말이죠. 그거라면 마침 저희 가문에 딱 괜찮은 미술품이 여러 점 있는데.”
“저도 얼마 전 살롱에서 구매한 그림이 있는데…….”
“신중하게 생각해 보신 뒤, 돌아가시기 전에 공녀님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오타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싱그러웠다.
“분명 대화하시는 보람이 있으실 겁니다.”
* * *
힐데가르트는 빈틈없이 꾸며진 초대석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드디어 이날이 왔네.’
너무 오래 기다려서일까?
준비 기간 내내 부담보다는 즐거움이 컸다.
미하일과 오브론 대공이 선별한 초대 손님 리스트에 은근슬쩍 제 의견을 밀어 넣는 일마저 재미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비가 올까 걱정하던 미하일의 마음을 씻은 듯이 달래주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오늘을 기점으로 미하일은 소공작이 아닌 공작으로 거듭난다.
미하일이라면 조금 버겁더라도 특유의 책임감과 신중함으로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부드러운 모습 속에 숨겨진 고집을 알고 있기에, 힐데가르트는 확신했다.
‘미하일이라면 괜찮아.’
그녀는 오랫동안 목에 걸어두었던 가주 인장 반지를 손에 들었다.
하얀 천에 싸인 물건을 단상 앞으로 가져온 로빈이 힐데가르트에게 눈짓했다. 그걸로 마지막 준비까지 모두 마쳤다.
단상 옆에 서 있는 오브론 대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살갑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시작하자.’
한낮의 하늘 위로 축포가 터지듯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귀여운 꽃잎이 허공에서 피어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아! 저길 보세요!”
“꽃으로 눈이 뿌려지는 것 같네요!”
정확히 약속했던 정오였다.
힘찬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떠들썩하고 활기차게.’
곱게 차려입은 화동들이 꽃을 뿌렸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귀엽다는 말이 나오는 광경이라, 초대 손님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꽃을 사뿐히 밟으며 미하일이 단상까지 걸어 올라갔다.
오늘의 미하일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 표면처럼 은색 머리카락과 하얀 옷이 반짝여서 꽃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침부터 로빈이랑 공들여 치장한 보람이 있네.’
미하일이 단상에 올라간 순간 떨어지던 꽃비들이 멈췄다.
후웅, 하고 바람이 불어오며 작은 돌풍이 객석을 잠시 어지럽히던 꽃들을 먼 곳까지 실어 갔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먼 곳까지 찾아와 주신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하일 아카락시아가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좌중을 둘러보는 미하일에게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특히 북부의 먼 대공령에서부터 이곳까지 걸음 해주신 오브론 대공 각하.”
그는 반쯤 몸을 틀어, 단상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브론 대공을 향해 감사를 내비쳤다.
“현명하고 인자하신 후견인 덕분에 앞으로도 두 가문의 결속이 더욱 깊어지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브론 대공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밀담을 나누었다.
“……아카락시아 가문이 오브론과 긴밀한 관계라더니. 단순 후견인이 아니라 동맹을 맺었던 거군요.”
“그렇게 말이에요. 이동 게이트를 제일 먼저 설치해 준 것만 봐도 보통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요.”
“수도에 게이트를 열면 오브론 대공가도 상당한 이득을 챙기겠는데요?”
미하일의 감사는 짧았지만,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두 가문의 관계를 짐작하고 난 뒤였다.
미하일이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힘을 실어주신 건 오브론 대공가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귀빈 여러분께서도, 참석으로서 새로운 출발에 힘을 실어주신 거나 마찬가지죠.”
햐, 우리 애가 생각보다 달변이었네.
힐데가르트가 속으로 웃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선대 가주의 유지를 이어나가며, 가문을 지켜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실은 이곳에 계신 분들께서 가장 잘 알아주시겠지요.”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은 미하일의 감사 인사는 미하일이 밤새 다시 적고 연습했다는 말마따나 유창함 그 자체였다.
“그러니 새로이 공작위를 물려받는 저 미하일 아카락시아.”
가슴에 손을 얹은 미하일의 머리 위로 후광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공작가의 이동 게이트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에게 앞으로도 힘을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하일의 짧은 연설이 끝났다.
그러자 박수 소리와 함께 레디스가 그를 향해 외쳤다.
“형, 나는? 날 빼먹은 거 아니야?!”
“물론, 검술 대회와 사냥 대회에서 우승한 제 남동생 레디스에게도 부탁드리고요.”
자칫 딱딱해질 수 있었던 분위기는 레디스의 자기주장 덕분에 와하하, 웃어버리며 풀어졌다.
“힐데.”
미하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힐데가르트는 야외에 깔린 얇은 융단 위를 사뿐히 걸으며 단상까지 올라갔다.
자주색 벨벳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는 아카락시아의 가주임을 상징하는 인장 반지가 드러났다.
미하일은 그 반지를 스스로 손가락에 끼웠다.
“고마워, 힐데.”
“축하해, 미하일 오빠.”
무지개는 흐린 뒤 맑은 날에 뜨는 법.
유령 저택이나 다름없었던 공작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가을에 피는 리시안셔스로 꾸며둔 저택에서 손님들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저길 보세요, 무지개가 떴네요!”
“어쩜…… 새로운 출발에 걸맞은 모습이네요.”
“정말 잘됐네요. 저만한 길조가 또 어디 있겠어요.”
반지를 낀 미하일이 고개를 숙여 힐데가르트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그의 눈가가 부드러워졌다.
“그럼, 앞으로의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어떻게 변할지는…… 저보다는 힐데가르트가 직접 설명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활기찬 말투로 미하일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보기 드물 정도로 사이가 좋은 남매였다. 동시에 사람들의 주목이 힐데가르트에게 쏠렸다.
황태자의 마법 스승이자, 이동 게이트를 만들어낸 천재.
아직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않은 힐데가르트 공녀지만, 그녀에 관한 소문은 이미 무성했다.
작년에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베이비 파우더를 고안하고 지주 상단을 이끌었다는 소문이며, 사냥 대회 때는 모함에 빠진 레디스를 구했다던 마법사.
보기에는 작고 여린 소녀지만, 로바르네 황자비의 독살과 방화 시도를 비로 뿌려 막았던 사람이었다.
아카락시아의 새로운 공작이자 샛별, 미하일을 뒤에 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카락시아 공작령과 오브론 대공령에 이동 게이트가 설치된 걸 다들 아실 겁니다.”
이만한 인원을 앞에 두고도 떨기는커녕, 또랑또랑한 눈빛이 보통내기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저택이 손님맞이로 정신없는 틈을 타, 기자 몇 명이 숨어든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이야기를 꺼냈다.
“대공 각하께서 직접 그 물건이 얼마나 유용한지, 이번 계승식을 통해 보여주셨지요.”
“음. 뛰어나더군.”
백 마디 입바른 칭찬보다, 한마디의 힘이 있는 오브론 대공의 칭찬에는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힐데가르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전 앞으로도 수도 발프람뿐만 아니라, 대륙 각지에 게이트를 설치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오빠에게 가끔 그림을 보며 쉴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해 주고 싶네요.”
힐데가르트가 그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로빈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2년에 한 번, 아카락시아 공작령에서 비엔날레를 열겠습니다. 내년을 그 시작으로 삼겠습니다.”
로빈이 하얀 천을 걷어냈다.
그러자 펄럭, 소리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저, 저건……!”
“오브론 대공가의 <유랑하는 광대>잖아요? 역대 최고 낙찰가를 받았던 미술품! 액자까지 그대로예요!”
당시 경매에 참여했던 몇몇 귀족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알아보시는 분이 계시는군요. 네. 이 물건은 오브론 대공 각하께서 미하일 공작의 승계를 기념하여 선물로 주신 물건이랍니다.”
손님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긴밀한 관계임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저 값난 미술품을 승계 축하 기념으로 다른 가문에 넘길 정도였단 말인가?
‘이 정도로 놀라긴 이르지.’
힐데가르트가 씩 웃었다.
“내년 아카락시아 비엔날레에서는 <유랑하는 광대>를 비롯해 <백색 호수>, <책 읽는 소녀>가 공개될 예정입니다.”
작품의 이름이 공개될수록, 사람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미술품 하나하나가 수도 저택 서너 채의 값어치나 다름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또한, 천재라고 불리는 신예 화가들의 작품.”
힐데가르트의 눈빛이 아이테르를 힐끔 보았다.
미리 귀띔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랑하는 광대>를 직접 본 충격에 얼어붙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37년 전 공개되었다는 <아이테르>를 비롯한 황실 소유의 유명 작품 30점을 전시할 계획입니다.”
아이테르의 충격이 좌중으로 퍼져나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론, 그 모든 작품은 이동 게이트를 통해 안전하게 운반될 거고요.”
사람들은 그 순간 확신했다.
황실과 오브론 대공가.
그 두 곳에서 꽁꽁 싸놓았던 미술품을 직접 아카락시아 가문에게 내어줄 만큼, 이동 게이트가 천금의 가치를 지닌 장치라는 걸.
그리고 그러한 물건을 만든 공녀의 무시무시한 천재성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