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반응이 괜찮네.’
힐데가르트가 조용히 웃었다.
이동 게이트의 가치를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가장 쉽게 알려주는 방법은, 기존의 가치 있는 물건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힐데가르트가 비엔날레에서 전시하기로 한 물건은 하나하나가 그 가치를 여실히 드러내는 물건이었다.
“그럼 새로운 아카락시아의 출발을 함께 축하해 주세요.”
단상 아래에서 대기하던 레디스는 고개를 돌려 악단에게 연주 신호를 보냈다.
미하일과 힐데가르트가 단상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추가로 야외 연회용 음식이 날라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테이블을 오가며 부산스러워지는 사이, 내일 신문 1면을 장식할 기삿거리를 얻은 자들이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 * *
미하일과 레디스, 힐데가르트가 환복하러 간 사이였다.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즐거운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리오넬 백작에겐 안된 말이지만 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캠벨 자작 부인 대신 자리를 지키던 아이테르의 귓가가 쫑긋거렸다.
“그 사람, 값비싼 미술품은 본인 갤러리에만 걸어두잖아요. 외부 공개는 한 번도 안 하고요.”
힐데가르트의 비엔날레 소식에 가장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살롱에 참여하지 못한 귀족들이었다.
살롱의 일원이 아닌 귀족들은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개인 갤러리에도 출입할 수 없었다.
값비싼 미술품이나 경매에 관한 화제를 따라갈 수 없어서 연회에서 답답한 일을 겪거나 조용히 망신을 당한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도 못 보는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솔직히, 그간 우리에게 전시할 만한 미술품이 없어서 내놓지 않았던 게 아니잖아요?”
유서 깊은 가문에는 누구나 자랑할 만한 그림 한두 점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살롱의 작품만 거는 갤러리에서는 그림을 걸어주지 않는 데다, 직접 갤러리를 열어봤자 살롱에 끼워주질 않으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기존 살롱과 미술계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귀족들은 들뜬 얼굴로 말했다.
“힐데가르트 공녀는 살롱에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미술품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랑은 천지 차이네요. 전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그 점은 아이테르 또한 공감이었다.
‘미술품을 투자 수단으로 쓰는 분과는 달라.’
유명한 미술품은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미술품의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기 때문에 투자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아이테르는 그 점이 몹시 안타까웠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제 수명을 깎아서 낳아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대단한 화가라 해도 물리적으로 남길 수 있는 작품의 숫자는 유한하다.
그렇기에 작품은 창고나 보관만이 능사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전시되고 회자되어야 의미가 있었다.
‘제가 <아이테르>의 옆자리에 <천지>를 걸어드릴게요.’
아이테르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린 <천지>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아이테르>를 상상하며 그린 그림이었다.
<아이테르>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만 들어왔을 뿐.
어떤 그림인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제 이름을 따왔다는 미술품이었기에, 막연한 상상 끝에 직접 그려 미술제에 출품한 게 바로 <천지>였다.
<아이테르>와 <천지>가 나란히 걸린다면 비엔날레에 방문한 사람들은 그 두 작품을 비교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어.’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곧 아이테르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다부지게 주먹을 쥔 그녀가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연회장을 벗어났다.
한편, 작위 계승식에 모여든 귀족들은 수다를 멈추지 못했다.
라이그너 상단주가 직접 납품한 포도주를 물처럼 비운 이들은 가벼워진 입으로 실컷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었다.
라비엣 이베르타.
드넓은 동부를 책임지는 이베르타 공작가의 소공녀였다.
작년 봄, 힐데가르트와 검술 대회 우승 축하 연회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그녀였다.
그녀가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돌돌 말았다.
“오브론 공작가가 아카락시아와 대규모 목재 공급 공급 계약을 맺었다는군요.”
“어머, 랑케르트 공작가는 어떡하고요?”
“랑케르트가 문제일까요.”
라비엣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마우제네 랑케르트를 떠올렸다.
“이동 게이트 덕분에 물류를 옮기는 수고도 덜었다는데, 저라도 서부에서 북부까지 목재를 옮길 바에야 아카락시아와 새로 계약을 맺겠어요.”
아카락시아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으나, 직접 레벤을 보니 놀라울 정도였다.
이동 게이트 주변에는 벌써 지주 상단의 노점들이 열을 갖춰 세워져 있었다.
지금이야 오브론 대공령의 게이트 하나하고만 연결되었다지만, 장차 수도를 비롯한 다른 공작가와 이어지게 된다면?
‘물류의 중심이 수도에서 레벤으로 옮겨지겠군.’
아카락시아 공작가와 레벤이 이렇게까지 변할 거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시대가 변하고 있어.’
몰아치는 변화의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이베르타도 발맞추어 움직여야 했다.
“코코. 오늘 연회가 끝나면 넌 곧장 수도로 가렴. 수도에 이동 게이트가 설치될 만한 곳 근처에 투자해야겠어.”
“땅에 투자하시려고요?”
“응. 빨리 움직여야 할 거야.”
발 빠른 판단이었으나, 며칠 뒤 라비엣 소공녀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미 수도 근처의 상점가와 토지 매물은 전부 아카락시아에 팔린 뒤였으니까.
* * *
연회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힐데가르트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한 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테리오 총괄이었다.
“비엔날레 사업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테리오 총괄.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테리오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허리를 숙여 잔을 건넸다.
“비엔날레를 오늘 발표하신 건 공녀님의 계획이지요? 사냥 대회의 우승 상품이었던 마석 광산을 되살리는 방법의 하나일 테고요.”
“맞아요.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숨어든 기자들만 하겠습니까. 새로운 아카락시아 공작 취임 소식이 비엔날레와 함께 알려지겠군요.”
테리오 총괄은 제 여동생 또래임에도 비범하기 짝이 없는 공녀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터뜨리는 수완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사냥 대회 때 힐데가르트가 보여준 배짱과 능력은 그 또래의 소녀가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테리오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으로 레디스와 이야기 중인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리브 백작가에서도 영지에 이동 게이트를 열고 싶군요.”
힐데가르트는 그의 부탁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분한 반응이었다.
“맨입으로는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비엔날레 개최에 필요한 미술품을 기증하겠습니다.”
“오호, 대여가 아닌 기증인가요?”
“수완 좋으신 공녀님께서 미술품이 부족해서 그걸 구하기 위해 이번 행사를 계승식 때 발표하셨을 거란 생각은 안 합니다.”
오히려 더 큰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테리오는 그렇게 추측할 뿐이었다.
“흐음, 어떡할까요.”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 사실 고민하는 시간도 기회비용에 포함하면 상당히 아깝다고 생각해요.”
“…….”
“그럼 이렇게 하죠.”
힐데가르트가 그에게 손짓했다. 귀를 빌려달라는 의미였다.
테리오가 의아한 얼굴로 허리를 숙이자,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제 정보망으로서 움직여 주셨으면 해요.”
“정보망이라면…… 구체적으로 뭘 원하십니까?”
“제가 아무도 모르게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을 찾아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리브 백작령에 이동 게이트를 설치해 드릴게요. 어떠신가요?”
“실종자입니까?”
“비슷해요. 하지만 단순한 실종자보다 훨씬 더 위험하지요.”
랑케르트 공작가를 뒤집어놓은 흑마법사는 그 이후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브린힐드 상단에서 일하던 비토의 능력으로도 찾기 어려워진 상대였다.
힐데가르트는 수도의 수사관을 움직일 수 있는 데다, 넓은 정보망을 가진 그의 능력과 이동 게이트를 맞바꾸기로 했다.
“어떠신가요?”
그녀는 테리오 총괄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지닌 채 물었다.
“물론 선을 넘는 정보를 요구하지는 않을 거예요.”
“……흥정할 여지가 없군요.”
테리오는 확신했다.
힐데가르트 공녀는 단순히 미술품만을 목적으로 이번 계승식에서 비엔날레를 발표한 게 아니다.
처음부터 이동 게이트라는 훌륭한 재료를 써서, 아카락시아에게 가장 유리한 카드를 골라 뽑으려는 생각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공녀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다섯 별 가문의 떨거지라 불렸던 아카락시아는 이제 없다.
이곳에 있는 건 다시 태어난 제국의 신성(新星)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