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테리오 총괄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던 무렵이었다.
“힐데, 여기 있었구나. 계속 찾았는데. ……안녕하세요?”
미하일이 테리오 총괄에게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공작님.”
테리오는 헛기침을 하며 그 인사를 받았다.
그는 미하일이 힐데가르트에게 용건이 있다는 걸 금방 파악했다.
“제가 바쁘신 공녀님을 붙잡고 있었군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테리오가 허겁지겁 자리를 뜨자, 힐데가르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미하일 오빠, 무슨 일 있어?”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 네가 만나면 깜짝 놀랄걸?”
“누가 왔는데?”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으니까 비밀이야. 잠깐만 눈 가려볼게?”
미하일은 그답지 않게 장난스레 양손으로 힐데가르트의 눈을 가렸다.
조심조심 저를 이끄는 손을 따라 걸으며, 힐데가르트는 머리를 굴렸다.
‘누구지? 미하일이 이럴 만한 상대라면…….’
설마…… 키스케가 조용히 찾아온 걸까?
하지만 키스케는 일전에 편지를 주었다. 계승식에 참여하기 힘들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얼마 안 가 미하일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 또한 자연스레 제 자리에 섰다.
“짠! 누가 왔는지 봐!”
곧 눈앞이 환해지고, 시야가 자유로워졌다.
힐데가르트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누구야? ……예쁜 언니네?’
나이는 열일곱 정도 될까?
화사한 다홍색 머리카락이 풍성한 장미꽃처럼 예쁜 상대였다.
‘초면인데 미하일이 직접 소개해 줄 만한 사람이라면…….’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녀가 더없이 예의 바른 자세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힐데가르트예요.”
“어…….”
“오빠의 친구분이신가요?”
미하일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힐데가르트를 보던 여성도 마찬가지로 당황했다.
“힐데, 혹시…… 기억 못 하는 거야?”
“아…… 난 괜찮아, 미하일.”
그녀가 황급히 미하일에게 부채를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무릎을 굽힌 상대가 환하게 웃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힐데. 나 기억 안 나?”
“…….”
“어…… 진짜 기억 안 나?”
힐데가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밋밋한 반응에 당혹한 상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섭섭하다. 우리 잘 놀았잖아! 4년 전엔 내 뒤를 엄청나게 쫓아다녔으면서! 나한테 동생 하나 필요 없냐고 그랬잖아.”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힐데가르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그렇구나.’
아마도 이 사람은 ‘진짜 힐데가르트’가 믿고 따랐던 사람이 분명했다.
힐데가르트의 반응이 담담하자 당혹스러워하는 건 오히려 미하일 쪽이었다.
“미안해요, 카밀라. 어…… 힐데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참석했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던 건데…….”
“괜찮아. 힐데가 나랑 만났던 건 너무 어릴 때니까. 어느새 다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지.”
그러나 상대의 눈동자에 섭섭함이 어린 것을 힐데가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너 앉혀놓고 예쁘게 머리 묶어주는 거 정말 재밌었는데.”
“…….”
“그때 너도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랬어. 나도 딱 너만 한 동생이 있었으면 해서 여름 내내 같이 수영하고 놀면서…….”
힐데가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짜 기억 안 나?”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래도 여전히 예쁘네. 건강하게 잘 지낸 거 같아서 다행이다.”
카밀라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까지, 힐데가르트는 입을 다문 채 신중히 말을 골랐다.
마침내 시야에서 카밀라가 사라지자, 그제야 입이 움직였다.
“누구였지?”
“힐데…… 정말 기억 안 나?”
미하일의 시선이 걱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카밀라 피오렌스. 피오렌스 후작가의 외동딸이고 네가 4년 전에 후작가 별장으로 놀러 가서 한 달 넘게 같이 지냈잖아.”
카밀라는 미하일의 하나뿐인 소꿉친구였다.
아카락시아 가문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어른들이 눈치를 주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별장에 남매들을 초대했고, 미하일과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카밀라 언니하고 떨어지기 싫다면서 헤어지는 날엔 엄청나게 울었는데, 정말 기억 안 나?”
“……내가 그랬었던가.”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그녀가 듣기에도 제법 건조했다.
미하일은 난처한 듯 카밀라가 사라진 빈자리를 보다가 뺨을 긁적였다.
“잘 모르겠어. 기억 안 나는데?”
“……카밀라가 섭섭했을 거야. 널 많이 아꼈는데.”
문득 불퉁한 마음이 솟았다.
‘어쩔 수 없잖아. 난 네가 알고 있는 힐데가르트가 아니니까.’
혼잣말을 속으로 삼킨 그녀는 금방 표정 관리를 했다.
“힐데, 어디 가?”
“피곤해서 잠깐 쉬려고. 앉아 있다가 올게.”
“오빠가 데려다줄까?”
“무슨 소리세요, 공작님. 계속 손님들이랑 이야기 나누셔야죠. 나 이따 다시 돌아올 거야. 일하느라 바빠!”
드레스 자락을 쥔 힐데가르트가 혀를 쏙 내밀었다.
미하일은 못 말린다는 듯 웃은 뒤 다녀오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억지로 웃으며 굳어졌던 입꼬리가 서서히 아파지기 시작했다.
야외 정원에서 멀어진 힐데가르트는 손님 출입이 제한된 유리 온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망할 일은 아니잖아.’
손님이 많이 오니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하일과 카밀라의 실망하는 얼굴은 유독 가슴에 깊이 남았다.
진짜 힐데가르트를 찾아온 사람을 막상 겪게 되니 기분이 묘하달까.
마지막으로 만났던 단테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네 몸의 진짜 주인. 진짜 힐데가르트가 널 되살리기 위해 갈려 나간 거야.’
힐데가르트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몰아쉬었다.
한때 키스케와 매일같이 수업하던 그곳은 이제 완전히 힐데가르트만을 위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키스케가 보낸 편지를 차곡차곡 쌓아둔 보관함을 매만졌다.
진짜 힐데가르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단테의 말대로 저를 소환하는 제물로 쓰이게 된 걸까?
문득,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이동 게이트 사업이 안정적으로 굴러가게 될 때는 미련 없이 내려놓고 진짜 힐데가르트에게 이 삶을 돌려주어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보란 듯이 미하일과 레디스를 키워내고, 예전의 아카락시아 공작가로 되돌리겠다는 약속.
약속을 지키며, 죽은 오빠와 가문을 우선시하기로 한 건 힐데가르트가 선택한 삶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이상하리만치 외로움이 번졌다.
‘……이럴 때가 아니야. 기분을 다잡아야 해.’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편지 보관함을 열었다.
보관함 안에는 빼곡하게 편지가 꽂혀 있었다.
매일같이 편지하겠다는 말을 지킨 키스케였다.
가장 최근의 편지는 미하일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내용이었고, 그 전에는 비엔날레를 여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는 내용이었다.
마법을 수련하다가 막힐 때 질문을 하는 편지도 있었는데, 힐데가르트는 그 편지에만큼은 답장을 칼같이 보내주려 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모두 달랐지만, 마지막 문장은 매번 똑같았다.
[항상 너를 생각하는 키스케가.]
힐데가르트는 편지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키스케와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답장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꾸준히 편지를 쓰는 사람을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바보는 나였던 걸지도 몰라.’
키스케가 매일같이 보내는 편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온전히 지금의 힐데가르트를 위한 말이었다.
그것은 때때로 굉장한 위안이었고, 힐데가르트의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만들었다.
힐데가르트는 한참이나 편지 보관함을 뒤적이며, 몇 번이고 읽었던 내용을 다시금 눈으로 좇았다.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신가요?”
온실 바닥에 구두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힐데가르트는 재빨리 편지 보관함을 닫으며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지만, 여긴 출입 금지 구역…….”
“실례합니다, 공녀님.”
축객령을 내리려 했던 힐데가르트의 말이 멈췄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곤, 한겨울의 눈도 녹일 수 있는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캠벨 부인.”
“쉬는 중에 찾아와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어서…….”
“아니에요. 마침 잘 되었네요, 저도 부인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답니다. 차를 준비시킬까요?”
캠벨 부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이 이쪽으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어요. 손님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구역인데 제가 실례되는 행동을 했지요.”
“괜찮습니다.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으셔서 그러셨던 거잖아요?”
“…….”
캠벨 부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용건을 곧바로 파악했다.
“아이테르 양에게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신 거군요.”
“네. 맞아요.”
“결심이 드신 거라면 기쁘네요. 아이테르 양에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천지>를 <아이테르> 바로 옆자리에…….”
“그 건에 대해서입니다만.”
캠벨 부인이 힐데가르트의 말을 잘랐다.
“정식으로 거절하려고 하는 겁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