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활활 잘 타네. 역시 불피우는 데는 종이가 최고지.”
화염은 날름날름 혓바닥을 내밀어 게걸스럽게 편지를 먹어 치웠다.
등 뒤에서 힐데가르트의 미심쩍은 시선이 날아왔지만, 미하일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얼버무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꿋꿋한 미소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게 된 덕분이었다.
“본가로도 연락이 많이 온다며?”
“많이 오는 수준이 아니야, 사람까지 보낸다니까!”
아카락시아 공작령에 게이트가 있다 보니, 빠르게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사람까지 보내며 수많은 귀족이 힐데가르트에게 혼담을 제의했다.
그녀가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처럼 화냈다.
“싫다는 사람한테 왜 자꾸 들이대는지 모르겠어. 따지고 보면 혼담은 내가 아니라 오빠한테 와야 하는데.”
미하일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식사 안 했지? 준비시켰으니까 오랜만에 같이 먹자. 내일은 의상실 예약했다며. 오빠가 데려다줄까?”
“됐어. 나 혼자 충분해. 오빤 황궁으로 다시 가봐야 하잖아.”
“가는 길에 내려주면 되지!”
“그럼 돌아올 때도 마차를 잡아야 하잖아?
“으으…….”
“신경 안 써도 돼. 로빈이랑 알아서 타고 갈게.”
미하일이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완곡히 거절했다.
미하일은 새삼 여동생이 혼자 큰 것처럼 느껴졌다.
제 손을 하나도 타지 않고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모습은 대견하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함을 불렀다.
그가 의자에 걸터앉아 등받이에 팔을 올렸다.
“힐데 네가 벌써 데뷔탕트를 치를 때가 왔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흐르는지 모르겠어.”
“빨리 흐르긴. 사실 한참 늦었지. 원래는 2년 전에 치렀어야 할 데뷔탕트잖아?”
그건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16살 때 치렀어야 할 데뷔탕트다.
하지만 그즈음의 힐데가르트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2회를 맞이한 아카락시아 비엔날레였다.
애초 계획했던 대로, 1회 비엔날레는 미술계의 새로운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황실 소유의 유명 작품을 보러 온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37년 만에 공개된 <아이테르>와 그 자리에 걸린 <천지>는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아이테르>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천지>를 그린 아이테르 캠벨의 사연도 주목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비엔날레 개최는 성공적이었으며, 그녀는 단번에 유명인이 되었다.
덕분에 2회 비엔날레를 준비하는 기간에는 더 많은 전시 희망 작품이 몰렸다.
‘캠벨 자작 부인이 태도를 바꿔 도와주어서 다행이지.’
딸이 상심할까 염려하던 자작 부인은 비엔날레를 통해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었다.
2회 비엔날레는 처음보다 두 배 가까이 규모가 커졌다.
덕분에 사업을 지휘하랴, 이동 게이트 설치 사업권을 협상하랴.
데뷔탕트를 치르기는커녕 막시밀리언의 편지에도 제대로 답장할 틈도 없이 쏜살같이 흐른 시간이었다.
“지금이라도 치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뭐. 처음부터 비엔날레 재단을 세울 걸 그랬나 봐.”
“힐데 네가 혼자서 준비하기엔 너무 규모가 큰 사업이었지. 지금이라도 세워서 다행이야.”
“덕분에 올해는 수월했어. 비엔날레는 이대로만 가면 될 거 같아.”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며, 먼저 데뷔탕트를 미루고 싶다고 말 한 건 힐데가르트였다.
데뷔탕트는 보통 16세에 치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하거나 집안에 사정이 있으면 한두 해 정도는 미루기도 했다.
어지간하면 미하일에게 직접 부탁하는 일 없이 혼자서 해치우는 힐데가르트가 꺼낸 말이다.
미하일에게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데뷔탕트, 혼자 준비하려면 힘들지 않아? 도와줄 이모님이나 고모님이라도 계셨으면 좋았을걸.”
“무슨 소리야, 혼자서 충분히 준비할 수 있어!”
힐데가르트가 가슴을 팡팡 소리 나게 쳤다.
“단순하게 생각해. 의상실 가서 드레스 맞추고, 보석 고르고, 춤 연습 한번 하면 끝이잖아? 그 뒤엔 어차피 신경 쓸 일 없어.”
“사교계 활동엔 관심 없어? 다과회 초대장도 많이 왔다며.”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진 신문지처럼 변했다.
“어서 빨리 우리 영지에 게이트 좀 열어주세요, 하고 남편 대신 부탁하는 귀부인들에게 시달리란 말이야?”
“그래, 내 여동생이 너무 인기 있다는 걸 오빠가 깜빡했네.”
사실 ‘인기인’이라는 단순한 말로는 그녀의 존재를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힐데가르트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업들은 모두 충격적일 만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니까.
누가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겠는가.
“참, 보석은? 액세서리는 준비했어? 그거라도 오빠가 준비할게!”
“이미 결정해 놨네요.”
레인보우 글로우.
오랫동안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그 물건을 드디어 내보일 수 있게 됐다.
힐데가르트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자 이번엔 미하일의 미간 사이가 좁쌀처럼 작아졌다.
“그렇게 실망했다는 얼굴을 할 것까진 없잖아.”
“나한테 부탁할 건 하나도 없어? 진짜 하나도?”
“응. 데뷔탕트는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마.”
“데뷔탕트 파트너도 결정한 거지?”
“…….”
“힐데?”
흡, 하고 숨을 들이쉰 힐데가르트를 미하일이 빤히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충격에 물든 것도 잠시.
“물론이지! 파트너야 진작부터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어.”
그녀는 태연한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다음 날 오후.
이른 아침부터 의상실에 다녀온 힐데가르트는 수도 저택에 돌아오기 무섭게 소파에 앉아 신음을 흘렸다.
“으윽……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진작부터 생각해 두기는!
왜 잊고 있었을까?
데뷔탕트에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뒤에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게 필수였으니까.
“어쩐지 요즘 혼담이 물밀 듯이 몰려온다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구나.”
무도회만큼 약혼 상대를 소개하기 좋은 장소는 없다.
사교계에 첫발을 내디디는 날이다. 그간의 인맥을 자랑하기에는 더없이 괜찮은 기회였다.
물론, 소중한 사람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레디스와 유시스가 딱 그랬다.
리브 백작가와 오간 혼담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탄했다.
“데뷔탕트 파트너라…… 올해 유시스에게 청혼할 예정인 레디스는 제외해야겠고. 미하일한테 부탁할 걸 그랬나?”
하지만 미하일의 손을 잡고 들어가자니, 그것도 못 할 짓이었다.
다정하고 온유한 미혼의 공작, 미하일 아카락시아도 그녀만큼이나 인기가 좋았다.
말 한번 섞어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런 상대를 종일 옆에 붙여놓자니…….
“조금 컸다고 부모처럼 돌보려고 하긴.”
힐데가르트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아직 화창한 오후의 햇살은 한낮에도 눈이 멀 만큼 환했다.
먼 곳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날씨다. 그녀의 시야에 황궁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키스케가 있었지?”
힐데가르트는 그 어떤 데뷔탕트 파트너보다도 막강한 인맥이 되어줄 상대의 이름을 떠올렸다.
앳된 티를 벗지 못한 모습으로 헤어진 지 6년.
“됐어, 어차피 바빠서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는데 무슨.”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보낸 키스케였다.
처음에는 그가 보낸 편지를 모아두는 데는 자그마한 보관함으로 충분했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궤짝이 필요해질 정도였다.
“……수도에 온 김에 얼굴이나 보고 갈까.”
힐데가르트는 오늘도 제 앞으로 도착한 여섯 통의 편지를 태웠다.
그다음 날에도, 다음다음 날에도 태워야 할 편지는 잔뜩 도착했다.
그런데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태울 수 없는 혼담 소식이 도착한 것은.
“……뭐? 저택으로 누가 찾아왔다고?”
힐데가르트는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로빈이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라딘 로젠발트 드롯셀마이어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카라딘?”
내가 아는 그 카라딘?
로바르네 폐황자비의 아들?
“……그 녀석, 아니, 그분이 왜?”
“저도 모르겠지만…… 일단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당장 내려갈게.”
좋지 못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태우던 편지를 내려놓은 힐데가르트가 단장을 마치자마자 응접실로 향했다.
“늦었군.”
응접실 소파에 걸터앉아, 카라딘은 문이 열렸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발 받침대에 발을 올린 자세 그대로, 힐데가르트를 가만 보았다.
‘자기 집이 따로 없네.’
이런 걸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까.
건방진 성격에 맞지 않게, 여전히 아까울 정도로 준수한 외모였다.
곱슬거리는 금발 아래로 긴 귀걸이가 찰랑거렸다.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가 카라딘 로젠발트 드롯셀마이어 전하를 뵙습니다. 어쩐 일로 저택을 방문해 주셨는지요?”
“오랜만이라는 인사보다 용건부터 이야기하는 게 아카락시아의 방식인가?”
“실례했습니다. 이렇게 연락 한 통 없이 방문하신 분은 처음이라서.”
“예의 없다는 소리 돌려 말할 필요 없어. 나도 딱히 차릴 필요를 못 느껴서 이러는 거니까.”
어쩐지 예전보다 대놓고 삐딱해진 것 같은데?
힐데가르트는 얼음처럼 차가운 카라딘의 시선을 마주했다.
‘어릴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사냥 대회 때는 겉으로나마 생글생글 웃으며 남의 속을 긁던 녀석인데, 이제는 대놓고 싫은 소리부터 마구 던지고 있었다.
“뭐, 피차 시간 낭비할 일 없어서 잘 됐군.”
카라딘은 드디어 받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오랜만이야, 영애. 별 기대는 안 했는데…….”
카라딘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물건에 값어치를 매기는 감정가나 다름없는 시선이었다.
“……그간 제법 봐줄 만한 외모로 자랐군?”
“용건이 어떻게 되실까요?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시간 낭비하는 건 질색이라서요.”
카라딘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번졌다.
그가 응접실 저편에 서 있는 시종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작은 시종 한 명이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벨벳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뭔가요?”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나 카라딘 로젠발트 드롯셀마이어는 이 자리에서 너에게 정식으로 청혼한다.”
“……네?”
“열어.”
카라딘의 말에 시종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힐데가르트는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카라딘 황손의 나이는 올해로 18세. 그녀와 동갑이었다.
벨벳 상자 위에 놓여 있는 건, 붉은 루비 열여덟 개가 박힌 목걸이였다.
‘허.’
이건 무슨 수작질이지?
힐데가르트의 눈썹이 스타카토를 만난 음표처럼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