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130)화 (130/166)

127화

때마침 창밖을 보고 있던 힐데가르트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설마 또 카라딘인가?’

저번에 그 망신을 주며 내쫓았는데 또 찾아온 걸까?

그런 거라면 근성 하나는 알아줘야 하는 녀석이다.

힐데가르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로빈. 지금 찾아온 사람이 며칠 전 골칫덩이 황족이라면 단호하게 돌려보내 줄래? 난 아픈 걸로…… 아니다, 여기 없는 걸로 해 줘.”

“네! 맡겨두세요!”

로빈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황실 마차를 타고 오지만 않았다면 빗자루라도 휘둘렀을 기세였다.

로빈이 반드시 제 선에서 쫓아내겠다며 기합을 넣고 사라지자, 힐데가르트는 빠르게 커튼을 쳤다.

안 그래도 어제 새벽,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이동 게이트로 성검을 가지고 온 그녀였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상황에서 카라딘을 또 상대할 여력 따윈 조금도 없었다.

힐데는 침대 위에 엎어진 뒤, 물에 빠진 사람처럼 베개에 머리를 댄 채 허우적거렸다.

‘카라딘을 쫓아내고 한숨 자야겠어. 신전에서 빨리 연락이 왔으면 좋겠는데…….’

힐데가르트가 뭉친 어깨를 주물럭거릴 때였다.

황급히 쿵쿵거리며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가씨!”

로빈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빨리 와보세요! 키스케 전하가 오셨어요!”

“……뭐? 누구?”

힐데가르트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그녀가 황궁에서 온 마차를 봤을 때 키스케보다 카라딘을 먼저 떠올린 이유는 단순했다.

황태자인 키스케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바쁘다는 걸 누구보다도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키스케가 왔다고?”

“네! 그렇다니깐요?”

“그럴 리가…….”

이게 몇 년 만이더라?

힐데가르트가 햇수를 어림잡아 세보는 동안, 로빈은 재빨리 머리빗부터 가지고 왔다.

“아가씨이! 다녀온 사이에 머리카락이 엉망이 됐잖아요!”

“하지만 키스케 녀석, 이번 달 내내 아카데미 사업으로 정신없이 바쁠 거라 그랬는데……?”

“어서 일어나세요! 머리 빗어드릴게요.”

설마 키스케가 편지에 적당한 말을 채워서 보냈던 걸까?

힐데가르트는 로빈의 도움으로 곧장 옷을 갈아입은 뒤 응접실로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저와 마찬가지로 어린 티를 완전히 벗은 사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스케.”

그녀는 깜짝 놀랐다.

예전부터 모자람이 없을 외모라고 생각했던 키스케가 그녀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미남으로 자라서 제 앞에 서 있었다.

색이 진한 금발은 햇빛에 넣어 구운 것처럼 찬란했다. 갸름한 턱선까지 떨어지는 오뚝한 콧대.

그리고 목에 차고 있는 루프타이만큼이나 또렷한 색의 붉은 눈동자까지.

햇수로만 따지면 6년.

분명 제가 알던 키스케였지만, 몰라보게 자란 그였다.

그리고 키스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오랜만이야, 힐데가르트 스승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키스케의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아.’

제자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한 장 한 장 넘기면 조금씩 변하는 페이퍼 아트처럼 환한 웃음으로 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많이 자라고 변했다지만 역시 힐데가르트가 알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진짜…… 너구나.”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유령 취급하기야?”

웃음을 흘리며 미끄러지듯 다가온 키스케가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했다.

그의 입술이 닿자 힐데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건강해 보여 다행이다. 힐데. 그동안 보고 싶었어.”

“…….”

“힐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힐데가르트가 꼼지락거리며 손을 내리더니,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엄청나게 컸잖아! 깜짝 놀랐어. 키가 얼마나 자란 거야?”

“예전에 입던 옷 중 맞는 건 하나도 없어졌지.”

키스케는 픽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별채에서 썼던 침대에 누우면 다리만 툭 튀어나올지도 몰라.”

“그러게. 시간이 더 지났으면 몰라봤겠다.”

키스케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다 자란 그를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는 사람은 없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기억을 밟고 시간을 통과해 나타난 상대는 신기할 정도로 낯설었다.

다만 주고받았던 편지 덕분에, 어제 만난 사람처럼 편안하다는 게 기쁜 일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

키스케의 솔직한 말에 그녀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간격을 두고 그녀가 웃었다.

“편지했잖아. 그걸론 부족했어? ”

“당연하지. 당연히 부족했어.”

키스케는 몇 번이나 보러 올 뻔했던 걸 간신히 참았다고 말하는 대신 맞물린 입술을 오물거렸다.

한겨울에 만난 눈의 요정처럼 사랑스러웠던 소녀는 못 본 새 아름다운 눈의 여왕처럼 자라 있었다.

여전히 투명한 피부와 한낮에 반짝이는 잔물결처럼 빛나는 머리카락.

호수처럼 깊고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까지.

‘……참길 잘했지.’

매일 보고 싶다는 이유로 찾아갔다면 스물네 시간이 모자랐을 게 뻔했다.

그녀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정신없이 두드려서 주먹 자국이 난 베개처럼 가슴이 엉망으로 뛰었다.

“그리고 유독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는 날이 있잖아. 참으려 해도 잘 안 되는 날.”

“…….”

“나한테는 그게 오늘이었어.”

키스케가 저를 똑바로 바라봐서일까. 힐데가르트는 제 뺨도 덩달아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어서 와. 나도 보고 싶었어.”

키스케는 말갛게 웃는 힐데가르트를 보는 순간, 그녀를 보러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별것 아닌 그 말이, 빙글빙글 도는 해와 달처럼 머릿속에서 돌았다.

“너도 건강하게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다.”

힐데가르트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묘하게 간지러워지는 가슴 한쪽의 감각을 모르는 척 넘겼다.

* * *

짧았던 재회의 순간도 잠시.

키스케가 찾아온 용건을 듣자마자, 힐데가르트는 황실 마차에 올랐다.

“설마 키스케 네가 신전 소식을 가지고 올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따져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르녹스 교단이 성소의 관리를 맡고 있다지만, 성소의 개방 여부는 오롯이 황실의 권한이다.

“내가 수도에 있다는 건 건 어떻게 알았어?”

“카라딘이 네게 청혼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키스케는 표정이 구겨지지 않도록 얼굴에 힘을 주었다.

“무시하려 했는데…… 네가 청혼에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주었다고 말하길래. ……그건 역시 신경이 쓰이더라.”

“뭐?! 잠깐만, 긍정적인 대답?”

힐데가르트가 무섭게 반문하더니 강하게 부정했다.

“무슨 소리야!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긍정은커녕 면전에서 으름장을 놓은 게 엊그제였는데, 카라딘은 까마귀 고기라도 먹은 걸까?

찰나였지만, 안도가 키스케의 눈에 스쳤다.

“응. 그럴 것 같았어.”

카라딘의 말은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비웃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해서.

저로서는 힐데가르트의 마음을 전부 장담할 수 없기에 버섯처럼 자라서 올라오는 불안이 있었다.

‘다행이다.’

키스케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흥분한 힐데가르트는 흡사 약이 오른 고양이 같았다.

그녀는 카라딘이 눈앞에 있으면 당장 할퀴거나 캬릉, 하고 위협할 기세였다.

“네 사촌이니 물벼락으로 내쫓지 않은 거야! 감히 내가 없는 곳에서 그런 거짓말을 했단 말이야?”

“안 봐도 뻔하네. 카라딘 그 녀석이 네게 무례하게 굴었지? 내가 대신 사과할게.”

“무슨 소리야! 친형제도 아닌데 왜 네가 대신 사과를 해?.”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키스케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카라딘은 ‘아직’ 황실의 일원이니까. 내가 황제가 되면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잖아.”

“아직, 이라는 단어가 유독 걸린다?”

“앞으로는 그 녀석 하기에 달린 일이란 뜻이야.”

그 앞으로, 라는 건 키스케가 온전하게 황위를 물려받을 때를 뜻했다.

힐데가르트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졌구나.’

비단 외모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한결 차분해진 언행과 살짝 여유가 생긴 모습이 그가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키스케는 신전에서 사람을 보내 성소를 개방해 달라고 요청했을 땐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고 했다.

“어쨌든 바쁜 네가 수도까지 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어서라고 생각했어.”

“맞아. 여전히 눈치가 빠르구나, 키스케?”

“신전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너뿐이니까.”

“어둠의 실세라도 된 기분인데? 믿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힐데가르트가 너스레를 떨자, 키스케의 입가에서 웃음이 묻어나왔다.

“그나저나 성소 개방은 어떤 일 때문에 그러는 건지 물어도 돼?”

“물론이야. 마침 잘됐네. 훔쳐 듣는 사람도 없으니 가는 동안 설명해 줄게.”

황궁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마차는 천천히 서행하고 있어서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했다.

마성신이 봉인된 성검. 신성력과 신전에 얽힌 이야기를 거쳐, 마성신의 분신인 단테가 행방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는 점까지.

긴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동안, 키스케는 그녀의 말을 한 번도 끊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플람이라는 녀석의 몸속에 마성신의 분신이 깃들어있다는 거야?”

“맞아. 내가 직접 만났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야.”

아마도 단테는, 성검에 갇혀 있던 마성신의 힘을 일부 지닌 채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힐데가르트는 곰곰이 생각에 빠진 키스케를 흘끔 보았다.

‘편지를 받을 때도 그렇긴 했지만…….’

역시, 키스케는 단순히 궁금하다는 이유로 제게 캐묻는 성격이 아니다.

힐데가르트는 그 점이 조금 고마웠다.

누군가에게 감히 터놓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야기다. 그런데 마음껏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성검을 다시 되돌려놓는 데는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데뷔탕트도 얼마 안 남았잖아. 그동안 안전하게 보관하고 싶었어.”

“이해했어. 그런 거라면 성소가 제격이지. 신전보다 훨씬 더 경계가 엄중하니까.”

황궁에는 기본적으로 배치된 병사가 있고, 성소를 경비하는 기사가 있다.

상황을 파악한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일 무렵. 발굽 소리가 멈추며 드디어 마차가 멈춰 섰다.

대기 중이었던 시종이 마차 문을 열고 발판을 가져다 놓았다.

“자.”

마차에서 내린 키스케가 몸을 돌려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손을 주시겠어요, 스승님?”

“에스코트가 그럴듯한걸? 옛날 생각난다.”

자그마한 키스케가 카유크를 쏘아보며, 제가 먼저 에스코트하겠다고 어른인 척하던 때가 있었는데.

킥킥 웃던 힐데가르트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어라?’

힐데가르트는 그간 눈치채지 못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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