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꽤 신경 쓰이는 정보다.
빈민이나 죄수들은 하나씩 흩어져 있으면 크게 신경 쓰이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뭉쳐져 있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
그런 이들이 한곳에 집결하고 있다는 건, 뒤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다.
치안을 흐리는 주범을 영지에 들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빈민이나 죄수들은 저들 나름대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영역을 포기하고 모인다는 건 그렇게 하도록 사주한 사람이 존재하거나, 그럴 가치가 있는 ‘돈 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가 하는 한 이베르타 영지에서 빈민이나 범죄자를 끌어모을 만한 복지 사업 같은 건 없었다.
‘석연치 않은 냄새가 폴폴 풍기네.’
누가, 어떤 이유로 불러들인 건지 조금 흥미가 생겼지만 결국 아카락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게 정신에 이롭다.
판단을 마친 힐데가르트의 말투는 가벼웠다.
“테리오 총괄의 꼼꼼함에는 항상 놀라게 되네요. 누가 벌이고 있는 짓인지는 알아내셨나요?”
“아직입니다. ……공녀님께서는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명민하신 판단력을 지니고 계시는군요.”
“칭찬 고마워요.”
힐데가르트가 가볍게 웃었다.
해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미소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공녀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테리오는 무심하게 툭, 던지듯이 말했다.
“오래 쫓으셨습니다.”
“…….”
“그로부터 6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플람이라는 자를 쫓으시는군요.”
그녀가 열어준 게이트 덕분에 리브 영지는 몰라보게 풍족해졌다.
교류하는 곳이 늘어난 건 물론이다.
일 년 전에는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급하게 수도에서 의사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조차 무서운 일이었다.
그 고마움과 부채감은 자연히 힐데가르트가 원하는 정보를 모으는 데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봐도 플람이라는 사람의 행적은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간신히 발끝을 잡았다고 생각할 때면 다시 안개 속으로 뛰어간 것처럼 홀연히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특별한 상대입니까?”
“오늘은 사적인 이야기가 많으시네요, 총괄.”
“이토록 찾으시니 조금 궁금해졌을 뿐입니다.”
힐데가르트는 완곡하게 대답했다.
“특별해요. 제가 거두었으니, 끊어내는 것도 제가 해야 하는 상대거든요.”
“…….”
“그 애도 그걸 알고 있으니 저를 피해 다니는 거예요. 내쳐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저를 피할 이유가 없다.
힐데가르트이 플람을 이해하는 것처럼, 플람도 그녀를 잘 알았다.
그가 힐데가르트의 유지를 잇겠노라 다짐했다면, 마탑주로서 살아갔을 테지.
하지만 플람이 선택한 건 철저히 본인만을 위한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되살아난 힐데가르트 또한 본인만을 위한 선택을 할 뿐이다.
“술이라도 한잔할까요?”
“좋습니다.”
“어라, 어쩐 일로 함께 마셔주시는 거예요? 작년에는 싫다고 하셨잖아요.”
“유시스의 결혼이 코앞이라 마음이 복잡합니다.”
“이런. 나중에 취한 척 레디스를 때려도 못 본 걸로 해드릴게요.”
테리오는 피식 웃으며, 꼭 그렇게 해달라는 말을 자그맣게 덧붙였다.
* * *
화가 난 카라딘은 마차 문을 발로 걷어찼다.
“젠장! 바쁜 사람을 불러놓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곤!”
쾅!
마부는 힘껏 발길질한 카라딘을 겁에 질린 눈으로 흘끔거렸다.
“뭘 봐? 당장 꺼져!”
“죄, 죄송합니다!”
불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부는 부랴부랴 채찍을 휘두르며 궁에서 벗어났다.
카라딘이 빠득빠득 이를 갈며 궁까지 걷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 들자는 이모의 청에 못 이겨 수도에 있는 랑케르트 저택에 간 게 실수였다.
힐데가르트에게 청혼을 했다가 모욕을 듣고 쫓겨났다는 말에, 마우제네는 무슨 일이 있었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종국에는 왜 그런 짓을 벌였냐며 저를 향해 화를 내길래 맞고함을 치고 나왔다.
그런데 기분이 시원하기는커녕 찝찝하기만 했다.
로바르네 황자비가 수도원으로 유배된 이후 이모는 저에게 이것저것 간섭해 오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관심은 달갑기는커녕 아니꼬웠다.
‘언제부터 그렇게 날 신경 썼다고!’
화를 내며 산책로로 들어선 지 얼마나 됐을까.
문득 사방이 지나치게 고요하다고 느낀 순간.
쏴아아,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느긋한 인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카라딘 전하.”
“……누구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린 카라딘이 날카롭게 물었다.
“뭐 하는 놈이냐. 당장 나와!”
쩌렁쩌렁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은연중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는 예상과는 달리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마법사 단테라고 합니다.”
“……마법사?”
카라딘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사 나부랭이가 나에게 무슨 용건이지?”
“로바르네가 말한 대로 기개가 대단하시군요.”
“어머니를 알고 있나?”
“오래전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지인이지요.”
붉은 눈의 마법사가 차분히 웃으며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달빛 아래에서 그의 긴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이곳에 안 계신다.”
“저런, 그렇습니까? 몰래 만나러 온 건데…… 아쉽게 되었군요.”
이게 안타까워하는 사람의 목소리인가?
‘그런 것치곤 너무 태연하잖아.’
카라딘은 퉁명스럽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마음 상하시는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저라도 괜찮으시면 이야기를 들어드릴까요?”
“필요 없어.”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마법사인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을지.”
“처음 보는 녀석에게 대뜸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낼 만큼, 내가 어리숙해 보이나?”
“그럴 리가요. 로바르네를 똑 닮으신 전하가 반가워서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카라딘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단테는 제법 경계심을 내비치는 그를 보며 끝까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오늘은 제법 기분이 나빠 보이시니, 이걸 대신 전해드리죠.”
그렇게 말하며 내민 물건은 비취를 깎아 만든 녹색 휘슬이었다.
“마법이 걸려 있는 물건입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사용하시면, 딱 한 번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황족인 내가 네 도움 같은 게 필요할 것 같아?”
“물론이죠. 사람은 누구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
“어떤 일이든지 괜찮습니다. 전하께선 그 똑똑한 로바르네의 아들이니까요.”
상대가 저에게 빈정거렸다는 것도 느낄 새가 없었다.
단테가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자 카라딘의 발밑에 은색 빛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을 훔치고 싶은 사람이 있다거나, 골탕 먹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든가.”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근위병! 근위병!!”
“욕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거나.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잔잔했던 암흑을 가르며 바람이 쉴 새 없이 휘날렸다.
엉겁결에 눈을 감기 직전, 카라딘은 상대가 웃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언제든지 불러주시길.”
귀가 먹먹해진 건 순간이었다.
잔뜩 움츠려져 있던 카라딘이 눈을 뜨자 단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카라딘의 목적지였던 궁전 앞이었다.
“……뭐야? 꾸, 꿈이었나?”
홀린 사람처럼 주변을 돌아본 것도 잠시.
제 손에 들어온 녹색 휘슬을 내려다보는 카라딘의 눈동자가 세게 흔들렸다.
* * *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힐데가르트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 건, 데뷔탕트 하루 전날이었다.
황실에서 온 시종이 선물을 건네고 돌아간 직후.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아, 아가, 아가씨!”
“……큰일 났다.”
“이렇게 커다란 탄자나이트는 처음이에요!”
눈앞이 아찔해진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로구나.
키스케가 보냈다는 데뷔탕트 목걸이만큼이나 힐데가르트의 얼굴도 파랗게 질렸다.
데뷔탕트 파트너에게서 선물을 받는 일이야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다.
특히 목걸이는 꽃과 함께 가장 무난한 선물이기도 했다.
문제는 키스케가 보낸 게 너무 과하다는 데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짜리야?’
은으로 장식된 목걸이는 짙푸른 탄자나이트를 초커처럼 목에 두르는 형식으로, 그 밑으로는 자그마한 블랙 다이아몬드가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선물이 마음에 안 드세요?”
“그게 아니야. 오히려 너무 과해. 이래선 거절할 수도 없잖아.”
“거절이요?!”
데뷔탕트 선물을 거절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며 로빈이 까무러치듯 놀랐다.
“왜요? 저는 반대에요!”
“난 이미 골라둔 둔 게 있잖아.”
“레인보우 글로우라면 다음 기회가 있잖아요.”
“가문의 역사가 담겨 있는 목걸이를 하고 싶어. 아니, 해야만 해.”
정확히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레인보우 글로우와 함께, 아카락시아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며 속을 뒤집어주고 싶은 상대.
로바르네 랑케르트.
그녀 또한 이번 무도회에 참석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