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춤을 신청하는 방식이 불쾌하군요.”
힐데가르트는 카라딘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한데, 저와 나누실 만한 이야기가 있던가요?”
“무작정 날 세우지 마.”
카라딘은 그녀가 뿌리친 손목을 매만졌다.
“오늘은 예쁘군. 마음에 들어.”
“전하의 마음에 들기 위해 꾸민 건 아닙니다. 칭찬만 감사히 듣죠.”
“춤이 싫다면 용건만 말하지. 내 제안은 생각해 봤나?”
“전하의 제안이요?”
힐데가르트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설마 얼마 전 찾아와서 다짜고짜 청혼하며 목걸이부터 내밀었던 걸 말하는 건 아니시겠죠?”
그러고 보니 키스케도 데뷔탕트 파트너랍시고 목걸이를 보냈지.
‘요즘 수도에서는 목걸이부터 선물하고 보는 게 유행인가.’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형님과 사이가 꽤 좋아 보이니 나도 진심으로 충고하지. 황태자비 자리, 공녀와는 어울리지 않아.”
“……말씀하시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갑자기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할 수준으로 이야기가 이리저리 튀어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황태자비에게 바라는 건 제국의 안주인 역할이자 탄탄한 후계를 낳아주는 일이야. 여러모로 너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보는데?”
천사 같은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웃는 모습이 귀여워 보일 만도 하건만.
힐데가르트는 카라딘의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점에선 우리가 결혼한다면 각자 정인을 따로 두든, 다른 일을 하든 상관없어.”
“전하께서 보기보다 외도에 적극적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너에겐 이쪽이 더 좋은 제안이지 않나? 나와 결혼하면 후계에 대한 압박도 형님보다는 덜할 텐데.”
“어머나, 그것참 감사한 말씀이니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
팔짱을 낀 힐데가르트의 고개가 느슨하게 늘어졌다.
“……라는 대답을 기대하셨나요?”
“비아냥거리지 말고 제대로……”
“카라딘 전하.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리죠. 인류가 멸망하고 전하와 저만 남더라도 우리가 결혼할 일은 없을 거예요.”
색이 진한 붉은 눈동자에 조금씩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너……!”
“전하와 부부가 된다니, 기꺼이 멸망하지요. 백번이면 백번 다 그쪽을 택하겠습니다.”
카라딘은 그녀의 건방진 말투를 더는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그녀의 뺨을 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려던 때였다.
“실례합니다.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카라딘의 팔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노바였다.
“오늘 힐데가르트 공녀님을 조용히 호위하게 된 노바라고 합니다. ……공녀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어…… 고마워?”
상황에 맞지 않는 노바의 해맑은 웃음에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케와 춤출 때부터, 그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손부터 드는 카라딘의 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 겸 마법을 쓸 생각이었던 힐데가르트는 노바의 등장으로 다시금 마력을 갈무리했다.
“황태자의 천한 개 주제에 내 몸에 손대지 마!”
“손이라면 놓아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조용히 대화 나누시지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이왕이면 용건이 끝난 즉시 돌아 가주시겠어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그때, 조용히 다가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마우제네 랑케르트.
여전히 짧게 머리를 깎은 그녀는 매서운 눈매가 로바르네 폐황자비와 닮아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이야기하지. 카라딘.”
“내 말은 아직 안 끝났……!”
노바가 큰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카라딘을 짧게 제압하자, 그의 눈빛이 더욱 험악해졌다.
“피곤하네요.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힐데가르트의 말에 마우제네는 찬성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제압당한 카라딘을 향해 몸을 비튼 힐데가르트가 담담히 말했다.
“카라딘 전하. 오늘은 제게 좋은 날이라서요. 여기까지만 상대해 드릴게요.”
“너…… 너 이, 건방진……!”
“착각은 자유라지만, 전하의 청혼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누가 저를 수단으로 여기는 지는 제 눈에도 잘 보여서요. 그럼 실례하지요.”
힐데가르트는 저를 향해 윙크하는 노바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뒤, 그 자리를 뒤로했다.
* *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한 건 마우제네였기에, 힐데가르트는 거리낄 것 없이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이 대화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쥐어져 있는지가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경솔하셨네요.”
“…….”
“랑케르트 가문을 위해 카라딘 전하를 수단으로 이용하신 건 빈말로도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발코니로 들어선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노래하듯 가벼웠다.
그녀의 목에는 좀 전과는 달리 키스케가 선물했던 목걸이가 아닌, 레인보우 글로우가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직접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제가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지요?”
“그때의 공녀는 작았지만 지금과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군.”
“공작께서도 크게 달라지신 것은 없네요.”
화살처럼 꼿꼿한 시선이며 무뚝뚝한 태도까지.
“처음 만났을 때에는 공회 출석을 게을리했다며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의석 반납을 건의하겠다고 말씀하셨죠.”
“……그랬지. 공녀는 내게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제국을 이끌겠다고 했고…….”
간격을 두고, 마우제네가 중얼거렸다.
“공녀의 말대로 되었어.”
불과 6년 전까지만 해도 이동 게이트 같은 물건이 생길 거라고 그 누가 예상했을까.
“아카락시아의 능력을 얕잡아본 내 실책이었다.”
마우제네는 담백한 사과를 입에 올렸다.
“늦었지만 그때 일로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
“피차 어렸을 때의 일이네. 잊어주었으면 하는군.”
“흐음. 좋아요.”
썩 마음에 차는 사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른의 도리로 받아주는 게 맞지.’
모처럼 데뷔탕트이고 기분 좋은 날이니, 너그러워지기로 마음먹은 힐데가르트였다.
“오늘 이렇게 공녀를 따로 찾은 건 다름이 아니라…….”
“랑케르트 공작령에 이동 게이트를 설치해 달라.”
어렵지 않게 상대의 부탁을 예상한 힐데가르트가 웃으며 물었다.
“그 말을 하려고 찾아오신 게 아닌가요?”
“……맞네. 눈치채고 있었군.”
기선 제압에서 밀린 마우제네는 침착함만은 잃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진지하게 생각해 주게. 현재 다섯 별 공작가에서 이동 게이트가 없는 건 랑케르트 가문뿐이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진 공작가에서 랑케르트가 있는 서쪽만이 유일하게 개발에서 뒤처지고 있다.
힐데가르트가 랑케르트와 인접한 가문에는 절대로 이동 게이트를 설치하지 않았던 탓이다.
“한 가문이 몰락하면, 그 여파는 다른 가문에게도 미치게 된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 공작가가 균형이 있게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국익을 위한 일이야.”
“국익이요. 흐음.”
그거참 편할 때 국익이라는 단어를 써먹네.
힐데가르트는 들리지 않게 조소했다.
“그러니…….”
“국익, 중요하죠. 저도 각하의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얼핏 친절했다.
“랑케르트 공작령에 게이트를 설치하지 못할 것도 없답니다.”
“정말인가?!”
“단, 조건이 있어요.”
쉽사리 설치해 주겠다는 말은 바란 적도 없었다. 마우제네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무엇이든 말해보게.”
“랑케르트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옛 아카락시아 가문의 보석 광산.”
무엇이든 말하라고 했기에, 힐데가르트는 거침없이 값을 불렀다.
“열 개, 전부 다 넘기시죠.”
“……뭐?”
깜빡, 깜빡.
눈을 떴다가 감았던 마우제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제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셨나요?”
반면, 힐데가르트의 안색은 태연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랍니다.”
“이 일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가? 한 가문이 몰락하게 되면, 그 여파는 다른 가문에도 미치고 부담을 주게 되네!”
“설마 ‘랑케르트’ 공작께서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윽고,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냉엄한 지적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쏟아졌다.
“마성신을 봉인했던 힐데가르트 공녀의 유해가 실종되었을 때, 랑케르트 가문은 뭘 하고 있었죠?”
“……뭐?”
“공녀의 유해를 찾아 뒷수습을 돕기는커녕, 아카락시아의 거대한 부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하이에나처럼 굴었던 곳이 바로 랑케르트 공작가 아니었던가요?”
오래된 은원은 갚기 어렵다고 한다.
은혜와 원망뿐만 아니라 감정을 이자로 치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 적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때의 랑케르트와 지금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치욕스러운 역사는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없어지던가요? 아카락시아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아카락시아의 공녀는 예나 지금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마우제네는 황급히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랑케르트의 가주인 그녀가 생각했던 보답은 기껏해야 보석 광산 하나, 많이 쳐주어 봤자 두 개 정도였다.
설마 그 다섯 배를 요구할 줄이야!
“공녀의 탐욕에는 할 말을 잃었군. 이 일은 없던 걸로 하지.”
“탐욕이라.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힐데가르트의 웃음이 좀 전보다 싸늘해졌다.
“오늘은 아카락시아의 보석 광산 열 개입니다.”
“……뭐?”
“오늘 이 발코니를 떠나신다면, 그다음은 몇 개일까요?”
발코니에 기댄 힐데가르트의 목에서 레인보우 글로우가 찬란하게 빛났다.
“제국에 있는 보석 광산은 총 스물여덟 개.”
“…….”
“그중 제가 총 몇 개를 요구할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