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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41)화 (141/166)

138화

“넌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모른 척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심지어 흑마법사와 관련된 일인데.”

키스케의 태도는 차분했다.

힐데가르트를 바라보는 키스케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애정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내게 맡겨 봐.”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로우 사제가 그랬잖아. 카라딘이 자기를 마법으로 공격했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카라딘이라면, 그동안 힘으로라도 해결하고 싶었던 일을 하려고 움직일 거야.”

“힘으로라도 해결하고 싶었던 일?”

“어머니…… 로바르네 폐황자비를 이베르타 공령에 있는 오에노스 수도원에서 빼내는 일 말이야.”

그 말은 힐데가르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생각해 보면 좋든 싫든 카라딘과 함께 황궁에서 자란 키스케는 그를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로바르네 황자비가 유폐된 뒤, 엇나가기 시작한 카라딘은 마법을 배운 키스케를 노골적으로 부러워하다가도 비겁하다고 몰아세우곤 했다던가.

제법 그럴듯하다는 생각과 함께 힐데가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찮겠어? 잘못하면 껄끄러운 사람을 다시 봐야 할지도 모르잖아.”

“걱정해 주는 거야?”

힐데가르트는 이런 걸로 기뻐하지 말라며 그의 팔을 찰싹 소리 나게 치려 했다.

그러자 키스케는 그 손을 막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이젠 나이가 몇 개인데.”

“그래요, 너 다 컸다.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쫄래쫄래 제 발로 찾아가서 독을 마시는 일은 걱정할 필요 없겠다, 그렇지?”

“남의 아픈 상처를 후벼 파지 마. 그거 안 좋은 버릇이야.”

일부러 삐딱한 표정을 하는 것도 잠시. 키스케는 피식 웃어버렸다.

‘너무 오래전이라 잊어버렸겠지.’

키스케가 아카락시아 공작저에서 지내던 동안, 함께 호숫가로 놀러 갔던 키스케는 그녀에게 마탑주의 행방을 알아봐 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황실에 연락을 넣어서 알아보았음에도 실패했지만…….

‘항상 그렇지, 너는.’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의 뒤를 쫓는 사람이었다.

행방이 묘연한 제자, 소식을 알 수 없는 마탑주.

그리고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할 때마다 씁쓸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지’라고 말했다.

키스케는 그녀의 씁쓸한 얼굴이 싫었다.

“네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마탑주를 반드시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잖아. 그럼 포기하지 마.”

아쉬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쿠아 알타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라고 했지? 그동안이라면 나도 공무를 내려놓고 널 도울 수 있어.”

“……정말 괜찮겠어?”

“두 말은 안 해.”

키스케가 고개를 까딱이자, 이윽고 힐데가르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알겠어. 고마워, 키스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동부의 이베르타는 다섯 별 공작가 중에서도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다.

농업과 목축업, 낙농업이라는 세 가지 산업에서 나오는 광대한 유통망과 다양한 역사를 지닌 곳.

특히 신전의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민중에게 더 많은 보살핌을 실천하기 위해서인지 수도원이 많았는데, 교구마다 한 곳씩은 꼭 가난한 가정과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이 있었다.

특히 여성들도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학술원은 이베르타의 자랑이었다.

라비엣은 그런 이베르타의 공작 대리답게, 화려하게 치장하지는 않았으나 우아함을 잊지 않은 모습이었다.

“힐데가르트 양. 어서 오세요.”

라비엣은 재투성이처럼 짙은 회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고 있었다.

선홍빛이 감도는 눈동자며, 커다란 토끼 귀처럼 쫑긋하고 뾰족하게 묶은 붉은 리본이 갸름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오랜만이에요, 라비엣 양. 아카락시아의 작위 계승식 이후로 처음이지요?”

“네. 여전히 건강하신 듯해서 다행이에요.”

힐데가르트에게 정중히 인사한 라비엣은, 곁에 서 있던 베르톨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마워, 베르톨트. 나가는 길에 코코에게 학회 발표 연습은 내일로 미루자고 전해줄래?”

“그렇게 할게. 검문은?”

“안시가 맡아주고 있으니 괜찮아.”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손님방에 있을 테니 편히 불러.”

이동 게이트를 통해 베르톨트와 함께 왔던 힐데가르트는 내심 놀랐다.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니라 학술원 친구 사이였단 말이지?’

힐데가르트는 라비엣의 학술원 인맥이 상당하다는 걸 금세 간파했다.

“이쪽으로.”

힐데가르트는 라비엣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가고일 병사의 석상이며, 창을 든 악마 석상이 흉흉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리 무섭지 않은 건 석상 속에 담긴 뜻을 알고 있어서다.

‘석상의 형태가 무서울수록 집안에 마(魔)를 쫓아준다고 했지.’

오래전에도 이베르타를 방문했을 때와 변함없는 모습이다.

‘타리가 이베르타 공작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 설명해 줬던 게 어젯밤 같은데…… 혹시 초상화가 남아 있을까?’

힐데가르트의 입가에서 무심코 그리움이 베여 있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베르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제안에 응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쿠아 알타를 막아내는 데 큰 힘이 될 거예요.”

라비엣은 힐데가르트를 응접실로 안내한 뒤 살짝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오래 머물다 가주시면 기쁠 거예요.”

“미안해요, 그 점은 장담하기 어렵네요.”

“카라딘 전하 때문인가요?”

라비엣의 눈치 빠른 물음에 힐데가르트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베르타의 앞날이 기대될 만큼 빠른 머리 회전이었다.

“맞아요. 용케 알았군요?”

“수배령이 떨어진 상황이 심상치 않기에……. 공녀님께서 수해를 제쳐 두고 직접 나서셔야 할 만큼 시급한 일인가요?”

“황실의 성소에 임시로 봉인해 둔 성검이 도난당했습니다. 80년 전 마성신을 봉인했던 위험한 물건이에요.”

“……이해했습니다. 시급한 수준이 아니라 긴급이었네요.”

라비엣은 자신이 더 밀어붙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깨닫자 한숨을 감췄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마법사인 힐데가르트였다.

잠시라도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이베르타에게 큰 행운이었다.

“급하신 중에도 이베르타를 선뜻 돕겠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빚은 잊지 않고 반드시 갚을게요.”

“그렇게 해주세요. 미하일 오빠도 기뻐할 거예요.”

라비엣은 잠시 고개를 비틀었다.

이베르타가 빚을 갚고 싶은 상대는 당연히 힐데가르트 본인이었으나, 어쩐지 그녀는 가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라비엣은 깊게 파고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무시는 동안 필요하신 게 있다면 무엇이든 편하게 알려주세요.”

“사양하지 않을게요. 마침 부탁이 하나 있어요. 베르톨트가 말했던 ‘자칭 마탑주’라는 사람, 당장 만나볼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을 넣어볼게요. 하지만 오늘 당장은 어려울 거예요. 치료 중이라서…….”

“치료요?”

힐데가르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중병에 걸린 건가요?”

“그게…… 중병은 아닌데.”

라비엣 공녀의 반응은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했다. 그녀는 으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제가 말하는 것보단 직접 만나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살짝 독특한 사람이었거든요. 하여간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

똑똑똑.

선명한 노크 소리가 라비엣의 말을 뚝 잘랐다.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벌컥, 힘주어 문을 연 사람은 힐데가르트와도 구면인 상대였다.

“하하하! 이게 누구신가! 이베르타에 이동 게이트라는 황금을 안겨주신 황금 거위, 힐데가르트 양이 아니신가!”

묘하게 불쾌한 인사와 함께 들어선 사람은 마흔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로렌조 공. 여기서 뵙는군요.”

“공녀를 이베르타 공작령에서 보게 될 줄이야! 내 귀여운 조카가 공녀를 귀찮게 한 건 아니겠지?”

“귀찮긴요.”

라비엣은 자신과 손님의 대화 도중 끼어든 숙부를 보며 화를 내는 대신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능숙하게 대화를 받았다.

“아쿠아 알타로 매번 이베르타가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할 수 있겠어요.”

“으음! 공녀의 마음씨는 눈부신 미모만큼이나 곱군. 하지만 이 정도는 이베르타 내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말이야! 하하하!”

습관처럼 호쾌하게 웃은 로렌조의 시선이 라비엣에게 옮겨갔다.

찰나의 순간, 로렌조에게서 한심함과 모멸감이 담긴 눈빛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아쿠아 알타는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수해인데, 우리 같은 인간이 머리를 싸매봐야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겠나.”

“숙부님.”

“요즘은 기상 이변이 상당한 모양이야. 그러니 자연스럽게 수해의 주기도 짧아지는…….”

“숙부님!”

대화의 맥을 끊은 라비엣이 분연히 일어나 쏘아붙이듯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누군가 수해의 피해를 키우기 위해 수작을 부리고 있어요. 전 ‘공작 대리’로서 그걸 막아야 할 의무가 있고요.”

힐데가르트는 그녀가 ‘공작 대리’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라비엣이 야무지게 따지려 들자, 로렌조의 반응은 금세 달라졌다.

“라비엣. 넌 그 의무를 이유 삼아 이베르타의 위기 때마다 다른 공작가에 손을 벌릴 셈이냐?”

불쾌한 티를 내는 로렌조가 조카에게 한발 다가서자, 라비엣은 자연스레 뒤로 두 발자국을 물러났다.

‘항상 시끄러울 정도로 웃고 있는 사람이라 잘 몰랐는데…… 저건 껄끄럽다는 눈이었구나.’

아니지, 껄끄러움 그 이상이다.

조카를 향해 웃고 있는 로렌조의 표정은 언제든지 삶아버릴 수 있는 양계장의 닭을 바라보듯 위험한 웃음이었다.

‘눈이 웃고 있질 않네.’

황제, 혹은 오브론 대공에게 웃으며 말을 걸 때와는 천지 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라비엣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이 건에 대해서는 제게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협의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하늘에서 우르릉, 지진이 나는 것처럼 천둥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힐데가르트는 그녀가 소매 아래로 슬그머니 감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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