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라비엣. 이 숙부가 그리도 미덥지 못했느냐?”
보는 눈이 있어서일까. 로렌조는 버럭 화내려던 걸 참고 언성을 낮췄다.
“어련히 순리대로 될 일을. 어린 네가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나.”
“차기 공작인 제가 영지민의 목숨은 하나라도 가볍게 여겨선 안 되니까요.”
“……라비엣. 다시 말하지만 공작위를 물려받는 일은…….”
일순 실내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라비엣과 다르게, 로렌조는 곤란하다는 듯 힐데가르트를 옆눈질하더니 말을 마무리했다.
“손님이 와 계시는데 말이 길어졌구나.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저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힐데가르트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로렌조는 언제 무게를 잡았냐는 듯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마친 뒤 방을 빠져나갔다.
한창이었던 대화의 맥이 끊기자, 라비엣은 답답하다는 눈가를 쓸었다.
“……죄송해요.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못 본 걸로 해드릴까요?”
힐데가르트는 다시 어색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풀 겸 농담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그러자 라비엣은 픽, 웃었다.
“제가 숙부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요, 뭘.”
“이젠 저도 그 아는 사람이 된 거로군요.”
“표면적으로라도 좋아 보여야 할 텐데. 그것도 이젠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제 나이가 열여덟인데 아직도 작위 계승식에 대한 말이 나오면 저렇게 말씀하시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계승권 다툼이라는 게 무슨 일이 있어서 벌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항상 때가 되면 벌어지는 일이죠.”
자조적인 라비엣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또다시 하늘에서 번개가 우르릉, 울었다.
‘전대 이베르타 공작 부부, 그러니까 로렌조의 형이자 라비엣의 부모님은 둘 다 사고로 죽었다던가?’
힐데가르트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라비엣이 적통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단번에 로렌조에게 밀려났을 테지만, 이른 나이에 사교계에 진출했기 때문에 장래에 그녀가 이베르타 공작이 되겠거니 예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본인 또한 가문을 이어받을 의지가 충분했고 말이다.
문제는 로렌조가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작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너무 대놓고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미하일이 가문을 이어받았던 게 라비엣과 같은 나이였던 걸 생각하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황이긴 했다.
특히 로렌조는 연회에 참석할 때면 은근슬쩍 자신을 ‘공작 대리’라며 부각했으니까.
“로렌조 공과 같은 저택에서 지내시는 줄은 몰랐어요.”
“작위를 두고 견제하는 사람들끼리 왜 한 지붕 아래에 있는지 의아하시죠?”
라비엣은 말 속에 담긴 의도를 금세 파악하곤 작게 웃었다.
얼마 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힐데가르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였다.
“제가 어릴 적에 납치를 당한 적이 있거든요.”
“납치요?”
“네. 충격으로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둡고 캄캄하고, 춥고 좁은 곳에서 한참을 소리 질렀던 기억은 남아 있어요.”
라비엣은 파르르 떨리는 왼손을 억지로 감추듯 오른손으로 감쌌다.
“살려달라고, 아무나 구해달라고 비명을 질렀는데 하필 번개가 많이 치는 날이었거든요. 아무리 외쳐도 듣는 사람이 없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 보니 숙부의 집이더군요.”
“그 이후부터 쭉?”
“네. 혼자서 지내는 건 무서워서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저택을 떠나고 싶지는 않지만, 혼자 지내는 건 그만큼 무서웠다.
그래서 로렌조와 함께라는 소리였다.
라비엣이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아쿠아 알타가 더 신경 쓰이는 걸지도 몰라요. 수해가 일어날 시기에 번개가 치면, 누군가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 같아서요.”
“…….”
이번에는 천둥이 아닌 번개였다.
창밖에서 불꽃이 터지듯 환한 빛이 번쩍거리자, 라비엣은 좀 전보다 더 크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영지민 한 명 한 명의 목숨이 소중한 건 차기 이베르타 공작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에요.”
힐데가르트는 그런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전 로렌조 공과 다르게 생각한답니다. 자신의 힘이 모자라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걸 부끄러워해서는 안 돼요.”
“…….”
“남이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내 능력이죠. 이베르타가 형편없는 가문이었다면, 저도 돕고자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람의 인생에 이는 파도의 횟수는 일정하다고 한다.
누군가는 어릴 때 풍랑을 겪기도 하나,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 잔잔하고 평온한 시기가 도래한다.
언제나 격렬한 파도만이 치는 바다는 없기에.
라비엣은 저를 보는 사람의 시선이 퍽 부드럽다는 걸 깨달았다.
“가문의 적녀인 라비엣 양이 이베르타를 다스릴 때가 기대되네요.”
“……감사해요. 전 기대를 배반하는 법을 모른답니다.”
따뜻한 체온 덕일까, 부드러운 눈빛 덕일까.
번개가 치는 내내 움찔거렸던 라비엣이었으나, 손의 떨림은 금방 멎었다.
* * *
이베르타에 온 다음 날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베르톨트와 함께 공작저를 나섰다.
“이쪽이 수문을 제어하는 터렛 장치입니다. 강물을 조절하려고 일부러 침수되지 않는 높은 지역에 지은 곳인데…… 보시다시피…….”
겨우 복구했다는 제어 장치에는 도끼날 자국이 역력했다. 누군가가 억지로 힘을 주어 파괴한 흔적이었다.
망가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방이 무너졌다는 곳은 수맥이 흐르는 땅으로, 느껴지는 마력이 미묘하게 달랐다. 저주의 매개체를 심었던 흔적이었다.
‘종합해 보자면…… 흑마법의 소행임은 틀림없어.’
단테가 자신의 눈을 피해 돌아다닌 시기와 아쿠아 알타가 잦아진 시가는 묘하게 들어맞았다.
하지만 왜?
그자가 벌인 짓이라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수해의 피해를 키웠을까?
“……거리에 활기가 없네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마차 창문의 커튼을 걷어내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서 그녀를 수행하던 베르톨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쿠아 알타에 대비해서 다른 지방으로 피난하도록 미리 일러두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지요.”
마차가 모퉁이를 지나자,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힐데가르트의 무릎을 조금 넘는 키의 아이들이 노란 공을 주고받으며 떠들고 있었다.
“에르티나의 고아원입니다.”
거리에 떠도는 불안을 깨끗하게 불식시키는 맑은 웃음과 함께.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지방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몸을 피할 곳이 없으니까요.”
4년간 수해로 죽은 사람을 합치면 800명은 훌쩍 넘는다며, 덧붙인 베르톨트의 눈빛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죽은 사람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지요.”
“재난이란 그런 거죠. 가장 밑바닥부터 쓸어버리니.”
흑마법으로 이런 일을 꾸미는 목적이 있다면, 단테는 반드시 이번 아쿠아 알타 때도 모습을 드러낼 터.
“이번에는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보죠.”
“……예.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해라? 라비엣에게도 들은 말이네요.”
힐데가르트가 피식 웃었다.
베르톨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해마다 아쿠아 알타를 앞두고, 이베르타의 학술원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궁리하느라 바빴다.
사망자를 줄여보자, 라는 개념으로 접근했던 베르톨트에게 아예 없도록 해보자는 말을 담는 그녀는 생소하게 다가왔다.
“아카락시아 공작저에 연락을 넣어야겠어요.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오타에게 예비해 둔 마석을 전부 보내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대략적인 구조는 전부 익혔네요. 내일부터는 결계를 설치할 테니 바빠질 거예요. 안내해 줘서 고마웠어요, 베르톨트.”
이베르타 공작저로 돌아온 힐데가르트를 기다리는 건, 미하일에게서 온 한 통의 편지였다.
편지 속 미하일은 힐데가르트에게 무슨 일이냐며 걱정의 말을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데뷔탕트가 끝나자마자 말도 없이 이베르타로 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나?’
안 그러는 척해도, 은근히 화가 나 있는 거 같기도 한데.
편지 뒷장에는 랑케르트 공작이 저에게 이동 게이트 설치를 구구절절 부탁하고 갔다며 난처해서 죽는 줄 알았다는 말까지 적혀 있었다.
“레디스의 약혼 준비로 스트레스가 쌓였나? 어째 글씨체가 뒤로 갈수록 날아가는데…….”
장갑을 벗은 힐데가르트가 의자에 걸터앉아 있을 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힐데가르트 님.”
“들어와.”
듣기 좋은 미성이 들리더니, 잘생긴 시종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이는 노바와 비슷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어두운 피부 때문인지 하얀 머리카락이 도드라졌다.
긴 머리를 뒤로 풍성하게 땋아 내린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종이었다.
“기다리시던 손님이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라비엣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금방 가죠.”
기다리던 손님이라는 말에 힐데가르트의 안색이 달라졌다.
드디어 마탑주를 만날 때가 온 것이다.
시종은 고개를 숙이곤 다시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힐데가르트의 코가 좀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술 냄새?’
이 시종…… 설마 일하는 중에 술을 마신 건가?
착각이 아니다. 은근한 알코올 향이 실내에 떠돌고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답장을 쓰려던 것을 멈추고 테이블을 간단히 정리한 뒤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시종은 빙긋 웃으며 느린 걸음으로 그녀보다 반 발자국 앞서 걸었다.
‘역시…… 술 냄새가 맞잖아. 술이라도 빚다가 온 건가?’
힐데가르트는 금박을 입힌 손잡이를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라비엣. 불렀다면서요?”
“네. 솔로와 인사는 잘 마치셨나요?”
“……네?”
“네?”
두 사람의 고개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였다.
“인사를 나누신 것 아니었나요? 솔로가 공녀님을 직접 찾아가서 뵙고 싶다고 그래서…….”
설마.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라비엣을 따라 움직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힐데가르트 공녀님.”
방금까지 힐데가르트를 안내했던 시종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느슨하게 땋아둔 남자의 머리카락이 흔들거렸고, 노란 눈은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술집 ‘마법사의 탑’을 운영하는 마스터, 솔로몬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