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라비엣은 정말 빨리 움직였다.
그날 저녁, 비가 그치기도 전에 영지를 떠난 그녀는 정확히 하루 만에 돌아왔다.
이미 한 차례 베르톨트에게 마석을 긁어서 보내주었던 이오타는 최상등품 마석을 요구하자 혼비백산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라는 이름이 나오자 군말 없이 마석을 넘겨주며 울먹였다.
“공녀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제가 따라야죠.”
라비엣은 그런 신뢰 관계가 몹시 부럽다고 생각했다.
라비엣이 가지고 돌아온 마석 아티팩트는 개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솔로몬의 손에서 탈리스만으로 탈바꿈했다.
힐데가르트는 그 탈리스만을 병사들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나누어 주었고, 라비엣에게도 주었다.
“이 정도면 솔로몬도, 탈리스만도 쓸 만하네요.”
“저 듣고 있습니다! 듣는 귀 있어요!”
솔로몬이 소리쳤다.
마침내 아쿠아 알타를 하루 남겨둔 날.
저택에서 힐데가르트를 기다리던 라비엣은 탈리스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저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
자신이 아카락시아 영지와 수도를 오가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당초 계획대로 방비 장치에 결계를 쳤다.
계획과 살짝 달라진 게 있다면 한 겹이 아니라 두 겹으로 더 튼튼하게 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는 솔로몬, 하나는 힐데가르트 공녀가 자신의 마력을 쓴 결계였다.
‘마법사라는 게 저렇게 멋진 건 줄은 몰랐는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힐데가르트를 직접 겪은 라비엣은 그녀가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거듭 깨닫고 있었다.
‘단순히 이동 게이트를 발명한 연구자나 마법사가 아니었어.’
한번 정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관철해 내는 힐데가르트의 의지는 엄청났다.
오브론 대공의 두터운 신뢰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떤 일에도 굽히지 않고 타파해 나가는 사람.
‘그에 비하면 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던 라비엣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쿠아 알타 같은 큰 위기일수록 직접 움직이며 두 눈으로 상황을 확인해야 하는 게 공작의 일이다.
하지만 오후부터 나가보겠다는 라비엣을 저택의 거의 모든 사람이 한사코 말리며 붙잡았다.
어릴 적부터 저를 돌봐준 집사와 유모, 숙부의 명령을 철칙으로 아는 기사까지 모여 하나같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저를 가로막았다.
“내가 진짜 공작이었으면 아무도 날 막지 않았겠지.”
이곳에서의 라비엣 이베르타는 아직도 아가씨에 불과했다.
공작 대리가 아닌, 그냥 아가씨.
로렌조 때문에 라비엣은 아직도 저택에서 공작 대리가 아닌 ‘귀여운 우리 아가씨’ 취급을 받을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그 사실이 가끔 라비엣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올해 겨울을 넘기면 그녀는 황실에 정당한 작위 계승자를 가려달라는 조정 재판을 요청할 수 있다.
그때는 숙부가 막는다고 해도 참고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우르릉, 하고 천둥 번개가 쳤다. 동시에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누구야?”
놀란 라비엣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머쓱해진 라비엣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 예민해졌나?’
팔뚝에 돋은 닭살을 문지르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숨을 틀어막았다.
“읍……?!”
제 코에 닿는 손수건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깨달은 순간.
라비엣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 * *
그 시각.
힐데가르트는 크고 허름한 집 앞에서 여동생의 손을 꽉 잡은 남자아이에게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정말 너희 둘뿐이니?”
“네. 아빠랑 엄마는 갈라스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갔어요. 근데 안 와요.”
“그럼 그동안 쭉 동생이랑 둘이서만 집에 있었던 거야? 며칠 동안?”
오빠를 대신해, 여동생이 다섯 손가락을 활짝 폈다.
베르톨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갈라스 마을과 통하는 길이 끊긴 상태입니다. 복구되려면 꽤 걸릴 겁니다.”
“이런.”
혀를 찬 힐데가르트는 아이의 손가락을 다시 접어준 뒤 말했다.
“아무래도 너희만이라도 대피소로 가는 게 낫겠다.”
“부모님은요? 엄마랑 아빠는 괜찮을까요?”
“갈라스 마을은 무사할 겁니다. 그쪽은 지대가 높아서 침수 걱정이 없거든요.”
열 살쯤 된 남자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였다. 여자아이가 힐데가르트의 옷 끄트머리를 당겼다.
“언니. 우리 집 진짜 무너져요?”
“뭐?”
“며칠 전 아저씨들이 그랬어요. 비가 오면 여기 있는 집은 다 무너질 거라고.”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당혹도 잠시.
힐데가르트는 만면의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괜찮아. 그럴 일 없을 거야. 여기에 있는 집들이 한 채도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내가 온 거거든.”
“정말요?”
“그럼 우리 그냥 여기서 엄마랑 아빠 기다리면 안 돼요?”
“그건 안 돼. 너희끼리 있는 건 너무 위험해.”
힐데가르트가 워낙 딱 자르듯 말하자, 남매는 금방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두 분은 금방 오실 거야. 자, 저기 서 있는 아저씨 보이지? 따라가면 학술원의 대피소로 데려가 줄 거야. 비가 그칠 때까지만 거기서 지내자. 알겠지?”
“네.”
“네에…….”
마침내 아이들이 사라지자, 베르톨트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베르톨트는 표정이 너무 무섭다니깐요. 그러니깐 애들이 겁먹고 문을 안 열어주는 거죠.”
“시정하겠습니다.”
“농담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힐데가르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럼 이걸로 사람들은 다 대피시킨 건가요?”
“예. 아직 피난처로 모이지 않은 사람들도 오늘 중으로 모두 모일 겁니다.”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솔로몬,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전 아이들이 싫어서요.”
그 순간.
쩡!
결계가 흔들리는 선명한 감각에 구석에 숨어 있던 솔로몬도, 그를 부르던 힐데가르트도 얼어붙었다.
쩡! 쩌정!
“공녀님!”
“나도 느꼈어.”
착각이 아니다.
누군가 방비 장치에 쳐 둔 결계를 공격하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변화를 감지한 전 마탑주와 현 마탑주가 시선을 마주했다.
“3번 장치일 겁니다!”
“베르톨트! 말을 가져와!”
쩡!
또 한 번 결계가 흔들렸을 때, 둘은 거의 동시에 말에 올랐다.
* * *
예감이 적중했다.
3번 장치를 관리하는 초소는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방비 장치를 지키던 병사들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고, 개중에는 뼈가 훤히 드러날 만큼 상처가 깊은 사람도 있었다.
“욱…….”
끔찍한 광경에 베르톨트가 먼저 헛구역질을 했다.
솔로몬은 그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병사들의 몸에서 탈리스만을 꺼내 들며 말했다.
“검은 독거미의 저주에 걸린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럼 대체 어느 미친 자식이 이런 짓을……!”
백번 동감할 말이지만, 힐데가르트는 두 사람의 대화보다도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공녀님?! 어딜 가십니까!”
힐데가르트가 나선 계단을 오르는 동안, 솔로몬은 마법으로 하얀 까마귀를 만들어 허공에 날렸다.
그녀를 지나쳐 간 까마귀는 곧장 이베르타 공작가 쪽으로 향했다.
한참 뒤, 방비 장치를 확인한 힐데가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유수 제어 장치는 무사해!’
비록 장치 주변에는 칼로 난타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결계 또한 깨지지 않았다.
한참 뒤 헉헉거리며 계단을 올라온 솔로몬이 네발로 기듯 바닥에 엎어졌다.
힐데가르트는 그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탈리스만의 효과로 사람을 조종할 수 없어지자 직접 와서 일을 벌인 것 같은데.”
“네? 누가 말입니까?”
“누구겠어. 당연히…….”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산사태가 난 것처럼 꽈르릉, 소리가 들렸다.
힐데가르트는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저수조가…….”
좀 전까지 멀쩡했던, 빗물을 받아놓는 거대한 저수조의 벽면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저대로라면 받아놓은 빗물이 한 번에 마을 하천으로 흘러들어 범람할 것이다.
“카라딘?”
저 대책 없는 자식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거리가 멀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키스케와 똑 닮은 금발을 그녀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공녀님?”
“어떻게든 해야지.”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오늘 새벽 강수량을 생각하면…….”
솔로몬은 무심코 하던 말을 멈췄다.
일대의 마력이 힐데가르트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는 게 느껴져서였다.
“말장난한 적 없는데.”
“뭐, 뭘 하시는 겁니까?”
“아까 그 애들한테 약속했잖아? 여기에 있는 집들이 한 채도 무너지지 않게 할 거라고.”
마력이 관통한 힐데가르트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했다.
“그럼 약속은 지켜야지.”
그녀의 곁에 있던 솔로몬이 몸서리칠 만큼 강대한 마력이, 들판에 번지는 불꽃처럼 맹렬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