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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48)화 (148/166)

145화

물속으로 완전히 몸이 가라앉은 그때.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를 끌어 올렸다.

“정신 차려요!”

“하아, 하아……!”

라비엣은 쉴 새 없이 코와 입에서 물을 토해냈다.

허공으로 떠오른 몸이 그대로 우물 밖까지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 비명을 먹어버린 천둥 번개도 함께였다.

“콜록, 콜록……!”

척척한 땅바닥에 주저앉은 라비엣이 쉴 새 없이 기침을 토하자, 힐데가르트는 제 우의를 벗어서 그녀의 몸에 둘렀다.

“괜찮나요? 라비엣,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힐데…… 힐데가르트 공녀님…….”

“맞아요.”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한 얼굴의 라비엣을 보며, 힐데가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늦지 않았군요.”

“…….”

빗방울이 라비엣이 걸친 우의에 튕기며 툭, 하고 소리를 냈다. 반면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소리 하나 없었다.

“많이 무서웠죠?”

“으, 으……!”

안도감이 몰려오자 이내 라비엣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펑펑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토해낸 울음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힐데가르트는 말없이 그녀를 마주 안으며 토닥였다.

“이제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항상 양 갈래로 묶고 있던 머리카락은 물을 머금고 축 늘어져 있었다.

“으어엉, 허어어엉……!”

흡사 짐승처럼 커다란 울음소리였으나 힐데가르트를 목숨줄처럼 붙든 그 손길을 떼어 낼 순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그녀가 겪은 공포를 이해하기에,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안아주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번개가 잦아든 무렵. 정신을 차린 라비엣이 훌쩍거리며 팔을 내렸다.

“조금 진정이 되었나요?”

“……네.”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였으나, 실컷 울고 나니 머릿속이 개운해졌는지 라비엣이 우의를 여미며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제 비명이 들렸던 건가요?”

“운이 좋았어요.”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쥐었다.

“그때 그랬잖아요, 납치된 적 있었다고.”

“그때요?”

“제가 이베르타에 온 날이요.”

‘제가 어릴 적에 납치를 당한 적이 있거든요.’

‘납치요?’

‘네. 충격으로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둡고 캄캄하고, 춥고 좁은 곳에서 한참을 소리 질렀던 기억은 남아 있어요.’

라비엣 공녀가 사라진 지 3시간.

힐데가르트와 라비엣을 따르는 이들은 지도를 보며 차분히 추측해 나갔다.

납치한 이가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이베르타 공령에 얼굴이 알려진 그녀를 데리고 이목을 피해서 감금할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된다.

특히 이곳은 이베르타의 중심도시인 델핀이었다. 도회지답게 빈집의 비율이 높지 않았다.

이베르타 공작가에서 3시간 안에 다른 이들의 이목을 피해 사람을 감금해놓을 수 있는 곳. 어둡고 캄캄하며, 춥고 좁은 곳.

“여긴…….”

“어딘지 알아보겠어요?”

이제 막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라비엣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릴 적에 온 적 있어요. 돌아가신 숙모님이 쓰시던 별장이에요.”

델핀의 외곽 지역에 있는 로렌조의 옛 저택이었다.

“그럼 설마 절 납치한 게…….”

“속단하기는 아직 일러요.”

힐데가르트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며 동의하는 대신 그녀에게 후드를 씌워주었다.

“몸이 많이 차요. 우선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겠어요. 빨리 나가죠.”

“그럴 순 없소.”

철벅.

무거운 발소리가 빗물 섞인 땅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우산도 쓰지 않은 로렌조와 예상 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로렌조 공. ……카라딘.”

“유감이오. 아카락시아 가문에 비보를 전하게 되겠군.”

라비엣의 몸이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힐데가르트는 그녀를 등 뒤에 숨기며 매섭게 추궁했다.

“역시, 당신이 라비엣 공녀를 납치했던 거군요?”

“…….”

로렌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힐데가르트는 썩 불쾌한 얼굴을 하는 카라딘을 똑바로 보았다.

“게다가 수배자를 숨기다니. 이 일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을 겁니다.”

“내 걱정보다는 본인의 걱정을 하는 게 좋지 않겠소?”

매번 호탕하게 웃던 모습은 어딜 가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가 한 발 뒤로 물러나자, 카라딘은 기다렸다는 듯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입을 열었다.

“거리에 내 얼굴이 그려진 수배지가 싹 깔려 있더군.”

“……카라딘.”

“네 짓이지?”

난데없는 책망에 힐데가르트의 눈썹이 삐딱하게 물결쳤다.

“뭐라고요?”

“네가 할아버지를 꼬아낸 거잖아.”

“…….”

“단테가 전부 말해주더군. 네가 할아버지에게 마법을 걸었을 거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게 아니면 왜 내가 수배를 당한 거지?”

카라딘은 새삼 분노를 참지 못하며 그녀를 향해 무작정 화를 냈다.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황궁에서 빠져나온 게 수배지까지 걸릴 일은 아니잖아?”

“까마귀 고기라도 먹은 건가요?”

힐데가르트는 겁에 질린 라비엣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러곤 카라딘을 향해 분명히 말했다.

“당신은 황궁의 성소에서 성검을 훔쳐 갔어요. 그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잘못?”

기가 찬다는 목소리를 듣자 하니, 반성할 기미는 조금도 없는 거로군.

지금쯤 속을 태우고 있을 막시밀리언만 안 될 일이라, 힐데가르트는 말없이 혀를 찼다.

“어차피 유실된 물건이잖아. 있으나 마나 한 물건 좀 가져간 게 무슨 잘못이야?”

“잉그렛 콘스탄체 영애가 저주에 걸린 건요? 그것도 당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셈인가요?”

“물론이다. 그건 단테가…….”

“당신의 인생은 핑계가 없으면 굴러가질 않나 보군요.”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변명이란. 힐데가르트의 목소리가 한층 단호해졌다.

“단테를 핑계로 삼지 말아요. 로우 사제를 공격하고 성검을 가져간 건 당신이잖아요?”

“…….”

“당신이 아직도 단테의 정체를 모르는 듯하니 알려드리죠. 단테는 80년 전 봉인된 마성신의 분신입니다. 봉인이 불완전했던 영향으로 생겨난 존재죠.”

힐데가르트는 카라딘은 물론, 그와 함께 행동하고 있을 단테를 숨겨준 로렌조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그는 성검을 훔쳐서 직접 봉인을 풀 생각이에요. 당신들은 그 계획에 손을 보태고 있는 거고요!”

“…….”

로렌조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힐데가르트는 그를 흘끗 본 다음, 카라딘에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성검을 훔쳐 간 것, 잉그렛 영애에게 저지른 짓. 둘 다 없던 일로 할 순 없겠지만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쾅!

힐데가르트의 코앞으로 검은색 번개가 날아오더니 낡은 우물에 그대로 직격했다.

조각난 돌조각이 빗방울 사이로 후드득 떨어졌다.

“헛소리하지 마. 어차피 적당한 말로 사람을 꼬아내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카라딘의 목소리는 사납기 짝이 없었다.

‘저건…….’

힐데가르트는 그가 차고 있는 까만색 귀걸이에서 이질적인 마력을 감지했다.

“마성신? 성검? 그딴 건 나랑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형님처럼 네 말만 듣고 고분고분해질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야.”

“카라딘!”

“로렌조. 저런 허황된 말에 넘어가 나와의 약속을 깰 생각은 아니겠지?”

힐데가르트가 그를 부르거나 말거나, 카라딘의 시선이 로렌조에게 향했다.

“이제 와서 저런 말에 넘어간다 한들,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

로렌조는 난감한 얼굴을 했으나, 곧 결심을 굳힌 듯 얼굴을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 또한 오늘로 이 지긋지긋한 연극은 끝내고 싶습니다.”

“그럼 됐어. 넌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 그럼 그 잘난 공작위도 네 손으로 굴러떨어질 거다. 조카라는 계집은 다시 우물로 처넣으면 그만이지.”

파지직!

카라딘의 손바닥에서 검은 번개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힐데가르트를 노려보는 카라딘의 눈빛이 혼탁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널 죽이고 수도원에 있는 어머니를 다시 황궁으로 데려가겠다.”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듣는 모양이네.”

막스를 생각해서 적당히 수습하려 했더니.

나지막한 한숨을 흘리던 힐데가르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누가 누굴 죽이니 마니 하고 있어?”

라비엣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신기하다는 듯 관찰했다.

어떻게 이런 순간에도 여유롭게 대꾸할 수가 있는 걸까?

“라비엣.”

“네, 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아무래도 막시밀리언이 손자를 한참 잘못 키운 모양이다.

속으로 한탄한 힐데가르트가 조용히 자조했다.

‘하긴 제자들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카라딘의 손에서 검은 번개가 연달아 내리쳤다.

그러나 잔뜩 움츠러든 라비엣을 보호하듯 얇은 막의 결계가 쳐졌다.

“좀 아플 거야.”

힐데가르트의 손에서 황금빛 번개가 작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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