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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51)화 (151/166)

148화

Chapter 13. 네게 남은 것

늦은 오후.

평소였다면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고 다녔을 힐데가르트가 오늘도 단잠에 푹 빠져 있었다.

평소에도 낮잠을 자곤 하지만, 요 며칠 동안에는 한 번 잠들면 헤어나오질 못하는 그녀였다.

“……이렇게 잘 자고 있으면 깨우기도 힘든데.

키스케는 잠든 힐데가르트를 빤히 보았다.

그녀가 머무는 이베르타 공작저의 특실은 황궁 못지않게 으리으리했다.

모두 라비엣 공녀…… 아니, 이베르타 공작의 지시인 게 분명했다.

그녀가 이렇게 잠들어 있는 건 마력 고갈 때문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아쿠아 알타의 사고를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납치된 라비엣을 구하느라 온몸의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 썼다.

그 여파로 비운 만큼 다시 채우기 위한 수면이었다.

그래도 카라딘을 붙잡은 다음 날, 식사조차 하지 않고 무아지경으로 잠들었을 때보다는 혈색이 좋았다.

자고 난 뒤에는 식당으로 내려오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더 야위었네.’

키스케의 손가락이 그녀의 보드라운 뺨에 닿았다.

‘역시 카라딘을 만나러 가는 건 나 혼자 해야겠군.’

힐데가르트가 은근히 카라딘의 뒷일을 신경 쓰던 눈치라,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깨우기는커녕 조용히 발끝을 들고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았다.

세상 모르게 잠든 힐데가르트의 이마는 유독 하얗고 예뻤다.

“…….”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환한 오후.

무방비하게 잠든 상대의 모습을 볼수록 그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키스케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된다면 당장에라도 이대로 입술을 내리누르고 싶었다. 그녀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충동에 못 이겨 주근깨가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이마를 바짝 붙인 것도 잠시.

“…….”

더운 숨이 닿는 거리에서 키스케는 제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는 아래까지 말려 내려간 담요를 가슴께까지 덮어준 뒤 속삭였다.

“잘 자, 힐데.”

그렇게 발소리도 내지 않고 나간 지 얼마나 됐을까.

살며시 문이 닫히자, 힐데가르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뭐야.”

목소리가 잠긴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이 다 달아나네.”

그녀는 키스케의 숨이 닿았던 뺨을 꾹꾹 누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 * *

“이베르타 가문의 공작 라비엣,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공녀께 정식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티타임에 앞서, 힐데가르트를 찾아온 라비엣이 드레스 차림으로 정중히 인사했다.

“수백 명의 인명 피해가 날 뻔했던 아쿠아 알타의 위협을 직접 막아주셨고,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 이 은혜는 이베르타의 문장이 닳고 닳아 사라질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라비엣의 석류 같은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공녀님은 저희 가문의 은인이세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져서인지,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앞으로 저와 이베르타의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생긴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든든한 말이네요. 기억할게요.”

힐데가르트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감사 인사는 괜찮아요. 자, 어서 오세요. 차가 식잖아요.”

힐데가르트는 창가 쪽으로 그녀를 불렀다.

얼마 후 두 사람 몫의 홍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

로렌조 이베르타는 결국 심문 닷새째 되는 날 자신의 범죄를 전부 인정했다.

키스케와 테리오 총괄이 제시한 증언과 증인 때문에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나게 된 건 재미있는 우연이 겹친 덕이었다.

힐데가르트와 헤어진 직후, 키스케는 로바르네 황자비가 유폐된 오에노스 수도원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테리오 총괄을 만났는데, 그는 때마침 이베르타의 수도원을 모두 점검 중이었다.

총괄은 앞서 부랑자들이 이베르타에 모이고 있다는 점, 그들이 설립된 지 오래된 수도원에서 몸을 감추고 있다는 걸 보고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시기였다.

그러던 중 부랑자와 접촉하던 수도원 출입자 중 하나가 이베르타 공작가의 시종이라는 걸 알아냈다.

둘은 즉시 시종과 부랑자 몇 명을 체포해서 계획의 전모를 파악했다.

“현장에서 발각되었으니 발뺌하긴 애초에 틀렸던 거죠.”

힐데가르트와 함께 차를 마시던 라비엣이 가볍게 말했다.

“작위 승계도 무사히 치렀어요. 약식으로 낸 서류였는데, 키스케 전하께서 힘써주신 덕분이에요.”

황실에서 이렇게 답장을 빨리 보내준 건 처음이라며, 그녀가 제 손가락의 가주 인장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힐데가르트도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이제 이베르타 공작이라 불러야겠죠?”

“라비엣으로 충분해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좋아요. 그럼 라비엣. ……괜찮아요?”

“네, 작위도 무사히 물려받았으니까요!”

“그거 말고요.”

“…….”

힐데가르트는 일부러 밝게 웃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똑 부러지는 소공녀의 작위 승계가 아니었다.

비명은 번개에 먹힌 채, 어두운 우물 속에 갇혀 울던 사람의 마음이었다.

라비엣의 얼굴에 애매한 미소가 감돌았다.

“음…… 솔직히 말하면 많이 놀랐고, 많이 울었어요.”

“…….”

“저도 사람이라 숙부님이 잘못했다고 비는 걸 보니 마음이 흔들리더라고요.”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자, 로렌조는 뒤늦게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며 울부짖었다.

“우습죠. 이제 와서 사죄라니. 절 죽였으면 가짜로 울었을 사람인데, 자기가 죽을 것 같으니 진짜 눈물이 나오나 봐요.”

그녀의 목소리는 퍽 건조했다.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전부 원칙대로 재판에 넘겨서 처리할 생각이에요.”

“그렇게 해요. 억지로 용서할 것 없어요.”

이미 충분히 숙고해 보았을 라비엣이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죄인에게 인정을 베푸는 게 아니라, 가문을 이끌어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손님을 초대해서 계승식을 치르는 게 좋지 않았겠어요? 그래야 외부에도 ‘라비엣 이베르타 공작’의 존재감이 확실해지죠.”

라비엣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당장 아쿠아 알타의 뒷수습만 하더라도 공작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 산더미인걸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계승식은 됐어요.”

“그럼 이 일이 일단락되면 그때라도요. 최소한 이베르타 친족들을 한데 모아,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좋을 거예요.”

“가문 내에서 제게 반발하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어느새 힐데가르트의 속뜻을 제법 읽을 수 있게 된 라비엣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할게요.”

“혼자서 가문을 이끌어나가는 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거에요. 괜찮다면 미하일 오빠와…… 아, 그렇지. 오브론 대공 각하에게도 연락을 넣어줄까요?”

내내 웃고 있던 라비엣의 얼굴이 처음으로 묘해졌다.

‘뭐지?’

이베르타와 오브론 대공가의 사이가 나쁜 건가?

“왜 그래요? 뭐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요?”

“어, 아뇨. 마음에 걸린다기보단…….”

라비엣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음…….”

“라비엣? ……혹시 오브론 대공가가 불편한 건가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저은 라비엣이 푹, 한숨을 쉬었다.

“……공녀님. 실은요, 오늘 오브론에서 손님이 오기로 했어요. 본인이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역시 숨기는 건…….”

라비엣이 입을 연 그 순간.

똑똑.

무거운 노크 소리와 함께 이야기가 뚝 끊겼다.

들어오라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녕, 오랜만이다?”

“…….”

힐데가르트는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원숙해진 푸른 눈. 빳빳하게 핀 드레스 셔츠까지.

그 모습에서 제가 아주 잘 아는 소년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카유크?!”

믿을 수 없었다.

잘 차려입은 예복 차림의 미남자.

스물한 살의 카유크 오브론이었다.

“크으, 그렇지! 이 표정을 보려고 내가 마차를 탄 거지!”

“카유크, 네가 어떻게 여길…….”

“왜,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넉살맞은 태도며 유쾌한 목소리까지.

몰라보게 키가 크긴 했지만, 카유크가 틀림없었다.

“카유크.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되겠어요? 공녀님께 무례하세요!”

그의 등장은 라비엣의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는지,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라비엣이 화를 냈다.

그러나 카유크는 마구 웃더니, 작정하고 곯려주려는 듯 턱을 까딱거렸다.

“그야 무례할 만도 하지. 나는 사나운 다람쥐 같은 ‘전 약혼녀’와는 다르게 힐데와 어릴 적부터 인연이 깊거든?”

“뭐라구요?”

“뭐라고?”

힐데가르트와 라비엣이 동시에 경악을 터뜨렸다.

눈을 깜빡이던 힐데가르트가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넬 틈도 없었다.

“카유크, 네 약혼자가 라비엣 양이었단 말이야?”

“‘전’ 약혼녀라니까! 중요한 걸 빼먹으면 어떡하냐?”

오랜만에 찾아오자마자 폭탄 발언을 연거푸 던지는 카유크였다.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카유크에서 라비엣으로 옮겨졌다.

라비엣은 울상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전 이 바람개비 같은 사람과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녜요. 서류상 일시적 약혼 관계였을 뿐이에요! 오브론 대공 각하께서 혹시 모를 안전장치라며…….”

“안전장치? ……아, 하긴.”

라비엣이 오브론의 후계 중 한 명과 약혼을 치르면,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공가와 황제가 나서서 개입할 수 있다.

외부의 개입을 부르는 대신 가주의 역량을 의심받을, 위험한 행동이지만 어린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으리라.

“바람개비? 너 이렇게 잘생긴 바람개비 본 적 있어?!”

“이익, 시끄러워요! 우리 공녀님께 무례한 소리를 하면 당장 쫓아 내버릴 거예요!”

“우리 공녀니임? 참나, 난 너랑 다르게 무려 육 년 전부터 인연을 쌓아온 관계라고.”

“카유크. 너도 적당히 해.”

얜 왜 자꾸 날 빌미로 라비엣을 놀리는 걸까?

힐데가르트는 저를 향해 잘생긴 얼굴이 반갑지 않냐며 머리를 바짝 들이대며 낄낄대는 카유크의 뺨을 확 밀었다.

하지만 진짜 소란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힐데, 몸은 좀 괜찮아? 좀 전에 오브론 대공가에서 사람이…….”

키스케가 열려 있던 문으로 들어오더니 이상한 광경에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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