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너 설마 마탑주를 찾은 이유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였어?”
“…….”
무정한 푸른빛 눈동자에서 담담함을 읽었다. 그녀의 침묵은 긍정을 뜻했기에, 키스케는 더욱 몸을 떨었다.
‘결국 이렇게 되나.’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기어코 일어나는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힐데가르트는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더는 얼버무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말했던 대로야, 키스케.”
그녀가 키스케를 향해 몸을 틀었다.
“나는 이 몸의 진짜 주인이 아니잖아. 그럼 진짜 주인에게 이 삶을 돌려주는 게 맞아.”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 될 이유가 있니?”
“당연하지. 이곳에 있는 너도 진짜야. 가짜 힐데가르트가 아니잖아!”
“…….”
힐데가르트가 침묵할수록 키스케는 초조함을 느꼈다.
키스케는 그녀의 침묵에 덜컥 겁이 났다.
“게다가 목숨을 돌려주겠다니, 어떻게 하려고?”
“플람을 찾아서 설득할 거야. 그게 어렵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야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해보기도 전에 포기할 수는 없어. 뭣보다 가능한지 아닌지를 따지려는 게 아니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나 설명에도 불구하고 키스케의 눈빛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입을 열면 열수록 할 말이 많다는 얼굴이었다.
결국 힐데가르트의 입에서도 한숨이 나왔다.
“……솔로몬.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주겠어?”
“아니, 비킬 필요 없어.”
키스케가 솔로몬을 제지했다.
“제삼자가 있는 쪽이 차라리 낫겠어. 힐데 네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려줄 테니까.”
“키스케.”
무겁고 답답한 방 안에서는 힐데가르트의 한숨이 아주 잘 들렸다.
“너 대체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잖아?”
“숨겨서 화가 난 거야?”
“당연하지!”
힐데가르트는 모르는 걸까?
그녀가 저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수록,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키스케의 마음이 대신 타들어 간다는 걸.
그녀를 만나고 사계의 끝에서 깨닫게 된 마음이 있다.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기에 네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는 그렇게 날 변하게 했으면서.
왜 정작 너 스스로를 가문과 의무라는 사슬에 묶어두는 걸까.
“키스케. 그냥……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자. 지금은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지금 네게 닥친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어디 있는데?”
키스케의 시선이 한낮에 뜬 태양처럼 선명했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만큼.
“힐데가르트. 왜 항상 네 문제를 가장 뒷전으로 미뤄두려고 하는 거야? 내가 그런 말을 듣고 ‘아, 그렇군요’ 하고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
다물린 힐데가르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키스케. 사람에게는 모두 맡은 역할이라는 게 있어.”
얼마 후 입을 연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한결 차분했다.
“네 역할이 제국의 황태자인 것처럼, 내게도 나 때문에 망한 가문을 원래대로 돌이킬 의무가 있고, 그게 내 역할이야.”
힐데가르트는 생각했다.
이 두 번째 삶은 레온하르트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 제게 주어진 의무나 다름없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서 두 번째 생을 받아들인 거야. 그런 역할이라도 없으면 인정해야만 했으니까.”
“인정하다니? 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진 세계에서 다시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걸.”
“…….”
키스케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언제나 당당하던 힐데가르트의 얼굴에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씁쓸한 미소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니? 80년 후에 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다시 산다는 건…….”
그녀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마치 깨어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꿈이랑 비슷하거든.”
저 눈빛이, 저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밀어낸 적이 있었던가?
키스케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꿈도 꾸지 않고 영원히 잠들고 싶다던 말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녔는지를.
“네겐 한번 말했잖아. 새로 얻은 이 삶은 레온 오빠에 비하면 나에겐 특별하지 않다고.”
“…….”
“그러니까 원래대로 되돌릴 생각이야.”
마침내 쥐 죽은 듯한 침묵이 사방을 메웠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어느 한쪽도 물러날 줄을 모르고 팽팽하게 맞섰다.
힐데가르트는 문득 옛 기억을 떠올렸다.
키스케가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내려와 수업을 거부했을 때였다.
‘그때도 할 말은 다 하던 애였지.’
지금처럼 똑바로 눈을 들여다보던 제자는 몰라보게 자라서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플람처럼.
키스케의 마음은 고마웠다. 기뻤다.
그리고 믿을 수 없었다.
“저기요. 그런데요.”
이 상황을 가만 보지 못하고 끼어든 건 결국 솔로몬이었다.
“영혼을 다시 되돌려준다니, 그거 그렇게 쉽게 가능할 일이 아닙니다.”
그가 목덜미를 쓸며 한숨을 푹 쉬었다.
“게다가 플람 몸에 단테가 들어가 있다 한들 그 둘이 완전히 다른 존재인 것처럼, 공녀님은 공녀님이잖아요?”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고서를 토대로 추측한 가설이라고. 빗나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는 그만하지 않을래요?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저 빼고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되나요?
솔로몬은 속마음을 숨기며 영업용 미소를 만들어냈다.
“진짜 공녀의 혼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려면 성검을 회수하는 게 먼저겠죠. 카라딘 황손과 로렌조 공의 심문 결과도 나와야 할 테고요. 그럼 뭘 좀 알아낼 수 있지 않겠어요? 하하하하!”
그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 ……자꾸 저만 떠들게 하실 겁니까?”
그러나 냉랭한 공기는 가실 기미가 없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처음 솔로몬이 이야기가 시작됐을 들을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미하일 공작과 레디스. 당장 널 반갑게 찾아온 카유크 공자며 라비엣 공녀까지.”
느릿하게 말문을 연 건 키스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도, 노바도.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할 무수히 많은 사람이 너를 아끼고 함께할 거야.”
“키스케.”
“그런데도 그 모든 인연 중 단 한 명도 너를 매어둘 존재로는 부족했던 거야?”
“…….”
“……제발 아니라고 해.”
너의 침묵은 왜 이렇게 야속한 걸까.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미안.”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기어코 잔인한 말을 입 밖에 냈다.
“아무래도 너와 했던 내기는 없는 걸로 치는 게 좋을 것 같아, 키스케.”
“…….”
순식간에 커다란 칼로 배를 관통당한 기분이었다.
키스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쾅!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키스케가 문을 닫으며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힐데가르트는 자리를 박차고 떠난 키스케를 잡지 않았다.
잡기는커녕 긴 한숨을 쉰 뒤 허공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의외로 정열적인 분이시네요, 우리 황태자 전하께선.”
남겨진 솔로몬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키스케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노란 눈이 곧 그녀에게 꽂혔다.
“반면 공녀님은 의외로 매정하시고요.”
솔로몬의 말에 몇 번이고 표정이 달라졌던 키스케와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했던 힐데가르트였다.
어렴풋이 둘의 사이를 짐작한 솔로몬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저거 괜찮을까.’
좋아하는 여자에게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저로선 베개를 끌어안고 사흘 내내 울고 말 것이다.
누가 봐도 힐데가르트를 좋아하는 쪽은 키스케 황태자였고, 그녀는 이 관계의 열쇠를 쥔 사람이었다.
‘황태자가 수도에서 이베르타 공작령까지 왔을 정도면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최소한 황태자 쪽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제삼자인 그조차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힐데가르트의 반응이 이러니, 황태자에게 조금 동정심이 일었다.
“저야 공녀님과 그리 오래된 인연이 아니니까 상관없지만요. 방금 그 말은 주변 사람이 들었다면 꽤 섭섭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솔로몬은 키스케가 박차고 간 의자를 얌전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렇게 매몰차게 이야기하실 건 아니었습니다.”
“알아.”
“아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고요? 그럼 더 나쁜 건데요?”
종알거리던 솔로몬이 도로 제 자리로 돌아와 턱을 괴며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씀하셨어요?”
“…….”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쉽게 답을 들려주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힐데가르트는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보다 더 정들까 봐.”
“…….”
“한 번쯤은 못을 박아둬야 한다고 생각했어.”
사자소생이 성공했다면 예고도 없이 깨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일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