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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58)화 (158/166)

155화

힐데가르트는 머리를 감싸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멎었…… 지?”

“그런 것 같습니다.”

복도는 척 봐도 엉망진창이었다. 깨진 창문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어지럽혔다.

바닥에도 깨진 꽃병과 유리 조각이 볼품없이 널려 있었다.

“엄청난 지진이었네요. 다른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노바가 그들을 끌어안은 손에서 겨우 힘을 빼는 게 느껴졌다.

그가 보호하던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키스케 전하, 공녀님. 두 분 다 무사하시죠?”

“난 괜찮아. 노바는 다치지 않았어?”

“나도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여진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노바가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힐데가르트가 사방을 둘러보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지진의 여파로 인근의 축사와 마구간의 코앞까지 토사가 밀려와 있었다.

놀란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허겁지겁 다가가는 관리인과 그런 관리인을 만류하는 기사 때문에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키스케. 조금 전에 너도 느꼈지?”

“그래.”

힐데가르트가 각오했던 어색한 대답은 없었다. 키스케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방금 전 지진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었다.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어마어마한 마력이 터지듯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누군가 일부러 벌인 것 같군”

누가, 왜 지진을 일으켰는가?

‘뻔하지.’

단테의 짓이다.

그가 기어코 산사태를 통해 천 명의 제물을 채우려고 움직인 것이다.

“피해를 확인해 봐야겠어. 아무래도 지진으로 산사태가 일어난 것 같아.”

“공녀님!”

그때였다. 베르톨트가 2층 계단으로 뛰어서 올라오더니 떨어진 샹들리에를 보며 기겁했다.

“맙소사, 세 분 모두 괜찮으십니까?!”

“우린 모두 무사해. 오빠들이랑 라비엣은?”

“세 분 모두 응접실에 계셨는데 안전합니다. 저택에 피해가 있긴 해도 무너진 곳도 없고요. 그보다 걱정인 건…….”

그때였다. 마침 이야기를 가로막듯, 커다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깨진 창문 밖에서 하얀색 까마귀가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저건…… 솔로몬의 사역마?”

잘못 보았을 리 없다. 힐데가르트는 곧장 팔을 뻗었다.

하얀 까마귀는 몇 번 더 울부짖더니 그녀를 알아보았다.

발로 힐데가르트의 팔목을 움켜쥐듯 착지한 새가 천천히 빛을 내기 시작한 것도 잠시.

까마귀는 눈처럼 녹아내리자마자 소리가 머릿속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힐데가르트 공녀님. 보이십니까?

어두운 동굴 속에 솔로몬이 서 있었다.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갇힌 사람치고는 차분한 태도였다.

-이 마법진이 방금 산사태를 만들어낸 원흉입니다. 멈추긴 했습니다만, 그 대신 제가 갇힌 것 같네요.

솔로몬이 서 있는 자리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연한 붉은색 마법진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은 더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마치 구렁이의 새카만 아가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 말고도 안쪽에 다른 마법으로 만든 공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테가 만든 게 아닐까 싶군요.

그대로 산소 부족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와중에도 참 태연한 말투였다.

하지만 변함없는 태도는 오히려 힐데가르트를 조금 안심시켰다.

-일단 버티면서 기다리겠습니다. 제 사역마가 무사히 공녀님을 찾길 바라지요.

어딘지 모르게 동굴의 내부가 익숙하다고 느낀 것도 잠시.

곧, 힐데가르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곳은 힐데가르트가 영체 상태로 플람과 만난 서늘한 동굴이었다.

시간이 다했다는 듯 하얀 까마귀는 그대로 바스스 부스러지듯 흩어져 버렸다.

* * *

단테가 위험한 이유는 그가 꾸민 계획보다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조차 끊임없이 다음 수를 꺼낸다는 점에 있었다.

이베르타는 오랫동안 이어진 수해 때문에 산사태가 일어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오랫동안 내린 비로 지반이 약해진 상황이었으니, 강력한 충격을 가하면 산사태가 일어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는 그런 점까지 꿰뚫어 본 것이다.

‘……한 방 먹었어. 기어코 천 명을 채워서 부활할 작정이야.’

그러나 완전한 패배는 아니었다.

끝낼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미로 동굴로 가는 길이 낙석 때문에 끊겼다고?”

“예.”

힐데가르트는 작은 서재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에는 며칠 전 솔로몬이 표시해 둔 녹색 선 위에 붉은색으로 선명한 엑스자 표시가 그어져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며칠 더 기다린 뒤 복구 작업을 시작할까요?”

“아냐, 그래선 늦어. 솔로몬이 그 안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 내에 우리가 미로 동굴로 진입해야 할 것 같아.”

마법사라 해도 인간이다.

솔로몬이 그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산사태의 원흉이었던 마법진이야 솔로몬이 제 마력으로 막아낸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산소와 물, 식량이 없는 동굴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라비엣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마법으로 그 일대를 갈아엎는 방법이 있긴 해. 하지만…….”

내키지 않는 방법이었다.

이미 지반이 약해진 땅이다.

2차 피해가 일어날 수도 있는 데다 미로 동굴에 갇힌 솔로몬을 구하러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날 겁니다. 꼭 저를 사랑해 주세요, 스승님.’

그곳에는 아마 플람이 있을 것이다.

예상 밖에 든든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그럼 여기선 내가 나설 차례인가?”

“……카유크?”

보란 듯이 노크도 없이 들어온 카유크가 지도 앞으로 바짝 붙었다.

“왜 그렇게 놀라? 이럴 때를 위해서 오피니움에서 그렇게 질리도록 공부한 거 아니겠어?”

그는 힐데가르트가 놀란 얼굴을 하자 되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루만 기다려. 이동 게이트로 오피니움의 인부들을 데려와서 미로 동굴까지 들어가는 길을 복구해 줄 테니까.”

“……할 수 있겠어?”

“난 불가능한 일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아. 못하면 창피하잖아.”

카유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호언장담했다.

“전부 복구하는 게 아니라 동굴까지 가는 길을 다시 만드는 거라면 가능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산사태라며? 두 번이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적은 거잖아?”

“그래도 위험할 거야.”

“책임지라고 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마라”

“원하는 게 뭐야, 카유크?”

“거참 듣는 사람 섭섭한 말투다? 내가 그런 말 듣자고 이러는 거 같냐?”

카유크는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정말 할 말이 그것뿐이냐는 듯 되물었다.

힐데가르트는 입 안쪽 연한 살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고마워. 부탁할게.”

“그렇지. 그렇게 나오셔야지.”

카유크가 씨익 웃었다. 푸른 눈에 걸린 미소가 놀라우리만치 든든했다.

* * *

과연 호언장담한 만큼 실력이 뛰어난 카유크였다.

다음 날 저녁.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일몰 직전, 밤새 동원된 이베르타의 인부와 오피니움에서 데려온 지질학자가 머리를 맞대서 길을 내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마석을 챙기며 준비를 마친 힐데가르트는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제 앞을 가로막는 두 오빠를 바라보았다.

“진짜 괜찮을 거야.”

“…….”

“무사히 돌아온다니까?”

“그래도 꼭 네가 갈 필요는 없는 거잖아.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되는 거야?”

레디스는 애가 바짝 탄 모습이었다.

“내가 갈 필요가 없다니, 대체 누가 그런 소릴 해?”

“안쪽에 갇힌 사람이 마탑주라며? 그 정도로 마법이 뛰어나면 알아서 나올 수 있는 거잖아?”

“오빠.”

“이번 한 번만 안 가면 안 되겠냐? 진짜 불안해서 그래.”

잠깐이나마 약한 모습을 보인 게 잘못이었을까.

힐데가르트는 그답지 않게 불안하고 여유 없어 보이는 모습의 레디스를 올려다보았다.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찡그린 눈썹은 주눅 든 강아지처럼 보였다.

“내가 직접 가야 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

“힐데…….”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걸로 마지막 인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도통 막아선 걸음을 돌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을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자, 약속.”

힐데가르트는 고민 끝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한테 약속! 금방 다녀올게. 나 아무한테나 새끼손가락 걸지 않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

“손가락 안 걸 거야? 나 약속 없이 그냥 가도 돼?”

“누가 그러냐?”

레디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냉큼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미하일이 그녀에게 손가락을 걸자, 힐데가르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반드시 약속 지킬게.”

마지막 인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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