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분위기가 왜 이렇게 비장한 거야. 끼어들기 어색하게.”
키스케가 불쑥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그는 세 사람을 훑어본 뒤 짧게 한숨 쉬었다.
“두 사람 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같이 가니까.”
“전하께서도요?”
“힐데 혼자서 보내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내 스승이 좀 무모한 사람이어야지.”
“뭐? 내가 왜 무모하다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힐데가르트가 옆을 돌아보았지만, 그녀와 다르게 미하일과 레디스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키스케는 어련히 두 사람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눈물 글썽이지 마. 마지막 인사도 아니잖아.”
“당연하지!”
자칫 축 처질 뻔했던 분위기를 환기한 키스케가 시종이 데려온 말의 고삐를 쥐며 눈짓했다.
힐데가르트는 재빨리 두 오빠의 뺨에 입을 맞춘 뒤 소리쳤다.
“그럼 다녀올게. 쉬고 있어!”
미하일과 레디스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힐데가르트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기에.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할 무렵. 사방에 깔리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홍염처럼 타오르는 눈동자가 보인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쭉 바라보고 싶은 마음도 잠시.
말에서 내린 그녀는 제 곁에 선 키스케를 향해 축객령을 내렸다.
“키스케. 여기까지면 됐어. 너는 돌아가.”
함께 이어져 온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춘 건 그들이 복구한 미로 동굴의 초입부에 달았을 때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안 가.”
“……그래.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노바를 카라딘 곁에 떼어놓고 왔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잔머리가 보통 늘어난 게 아니었다.
힐데가르트가 본격적으로 저를 돌려보내려 한다는 걸 간파했는지, 키스케도 다리에 힘을 준 채 그녀를 바라보며 제 의사를 똑똑히 밝혔다.
“여기서 도움이 될 만한 마법사는 너와 나, 마탑주뿐이잖아. 나만 쏙 빠질 수는 없어.”
“네 위치를 생각하고 하는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 ‘제국의 황태자’가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거지?”
키스케는 일부러 짓궂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무얼 하는 건가 싶었던 것도 잠시.
그는 힐데가르트의 손목에 탈리스만이 달린 팔찌를 채워주었다.
“미안한데 나는 네 앞에서 황제나 황태자가 아니라, 남자이자 제자이고 마법사일 예정이야. 앞으로 쭉.”
“……이건 언제 만들었어?”
“네가 유독 매몰찬 말을 했던 다음날.”
키스케는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러고는 저를 바라보는 밤하늘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녀에게 받았던 마음을 다시 돌려주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무슨 말을 하든. 나를 떼어놓기 위해 상처 주는 말을 해도.”
“…….”
“내 어둡고 비좁았던 우주는 너를 중심으로 돌고 있어. 너를 만났을 때부터 쭉.”
키스케는 비로소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 그녀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나는 끝까지, 너의 험난한 생에 함께할 거야.”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말리지 못했다. 아니…… 말리지 않았다. 그 찰나의 감촉이 너무 따뜻하고 사랑스러웠기에.
“걱정하지 마. 나는 누구와는 다르게 흑마법에 손을 대서 스승님을 괴롭게 하는 멍청이가 아니니까.”
“플람이 지금 그 말을 들었으면 널 날려버렸을걸.”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웃음을 흘리며 제 마지막 제자를 바라보았다.
“알겠어. 네가 나를 막지 않는 것처럼…… 나도 너의 선택을 존중할게, 키스케.”
“바로 그거야. 우리 둘 다 무사히 돌아가면 그만이잖아?”
“말은 쉽지.”
플람. 너는 알았을까?
이 앞에 있는 네가 무엇을 준비했건, 나는 이번 생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먼저 동굴 안으로 걸음을 뗀 것은 힐데가르트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사박사박 걷는 키스케의 걸음이 예전보다도 훨씬 더 묵직하고 든든했다.
“발밑 조심해.”
동굴 안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 들어갔을까.
점점 솔로몬의 사역마를 통해 보았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안쪽으로 마력이 집중되고 있어.’
힐데가르트가 걸음을 멈춘 사이 앞서가던 키스케는 곧 손바닥 위에 만들어둔 빛의 마법을 더욱 밝게 키웠다.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지 이십 분 남짓. 처음으로 막다른 길을 만났다.
“막힌 건가?”
“아냐. 잠깐만.”
힐데가르트가 그를 제치고 벽 쪽으로 다가갔다.
“맞게 찾아온 것 같아. 여기, 벽 안에서 마력이 느껴져.”
그렇게 말하며 바위벽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늪에 빨려들어 가듯, 그녀의 손이 바위벽 안쪽으로 쑤욱 들어갔다.
“힐데!”
놀란 키스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더욱 빠르게 두 사람의 몸이 막다른 바위벽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우왓, 깜짝이야!”
마력의 흐름이 변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괜찮냐며 호들갑을 떠는 반응이 돌아왔다.
“세상에. 어떻게 오시려나 했더니, 벽을 뚫고 오십니까?!”
“솔로몬!”
“네! 접니다! 쓸모 많은 귀염둥이 솔로몬!”
솔로몬의 모습은 꾀죄죄했다. 탐스럽게 땋았던 하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틀 동안 못 감은 머리카락에는 기름기가 있었지만, 힐데가르트는 그를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마탑주. 무사했나?”
키스케는 그렇게 말하며 힐데가르트를 부축했다. 동시에 발밑에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마법진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예. 배가 좀 고프긴 하지만…… 아니, 잠깐! 키스케 전하도 같이 오신 겁니까?”
솔로몬은 경악을 터뜨렸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황태자가 오는 거냐는 시선이 살짝 따가웠기에, 키스케도 그를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자기들 편할 때만 솔로몬을 못 본 척하는 스승과 제자가 옷을 툭툭 털었다.
“다친 곳은 없어?”
“예. 덕분에 무사합니다. 예상보다 빨리 오셨네요. 꼼짝없이 며칠은 갇혀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산사태 때문에 길이 막혔지만 카유크 공자가 힘을 썼어.”
“정말입니까? 나중에 돈 많이 버시라고 덕담 한마디 해야겠네요.”
실없는 소리를 할 여력이 있는 걸 보니 기운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힐데가르트는 피식 웃으며 동굴을 둘러보았다.
솔로몬이 갇혀 있던 동굴은 한쪽엔 제단이 있었고, 산사태를 일으킨 원흉이나 다름없는 마법진이 있었다.
마법진은 파훼하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파훼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구조였다.
“지진은 이것 때문에 일어났던 거구나?”
“네.”
이중으로 그려진 붉은 마법진은 바깥 부분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키스케는 그녀와 함께 마법진을 살폈다.
“공간에 관한 마법이 걸려 있는 건가?”
“정확히는 사흘에 한 번, 지진을 일으키기 위해 공간과 시간을 지정해 둔 겁니다.”
“그래서 마법진의 형태가 까다로운 거였군. 게다가 이건…… 이중 마법진이잖아?”
“바로 보셨습니다.”
솔로몬이 가볍게 박수를 친 뒤, 안쪽에 분홍빛이 도는 마법진을 가리켰다.
“마법진을 억지로 파괴하면 다음 마법이 발동하도록 만들어 둔 겁니다.”
“다음 마법이 뭔지는 알아냈나?”
“아뇨. 그래서 섣불리 파괴할 수가 없었죠.”
“그건 파괴해도 괜찮아. 마력을 빨아먹는 마법진이야.”
솔로몬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힐데가르트의 목소리가 가벼웠다.
“어라? 아시는 겁니까?”
“오래전 검은 별 교단의 흑마법사들이 자주 쓰던 거야. 마법사의 마력을 빨아들여서 방해하지 못하도록. 뻔한 수작질이지.”
“그렇군요. 공녀님이라면 자주 보셨을…… 왜 그러십니까?”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힐데가르트는 동굴의 벽면에 있는 마법진이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에 반응하며 작동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가 동굴의 가장자리 쪽으로 다가가자, 솔로몬이 넌지시 아는 체를 했다.
“아무래도 이 마법을 준비한 사람은 어지간히 철저한가 봐요.”
“마력을 내뿜는 코어는 안쪽에 있는 건가?”
“맞습니다. 선택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번번이 튕겨 나오더라고요.”
“그렇다면 코어를 지키고 있는 게 단테겠네. 성검도 이 안쪽에 있을 테고.”
“들어가실 겁니까?”
“물론이지.”
힐데가르트가 마력이 흘러나오는 틈새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찰나였다.
“키스케?”
“혹시 모르니까, 보험을 들어두려고.”
그녀의 손목을 잡은 키스케가 황금빛 마력을 가늘게 실처럼 짜냈다.
힐데가르트는 이게 무엇인가 싶어 고개를 비튼 것도 잠시.
금세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똑똑하게 머리를 썼네?”
“검은 독거미의 저주에서 힌트를 얻었지.”
마법이란 여러모로 응용력이 좋아야 한다는 걸 힐데가르트를 통해 배운 그였다.
“이걸로 혹시 길을 잃더라도 내가 찾아갈 수 있어. 마지막까지 끊지 않을 테니까, 길을 모르겠으면 이 마력을 되짚어서 돌아오도록 해.”
“……고마워. 그럼 부탁할게.”
힐데가르트의 하얀 손이 마력이 흘러나온 틈새에 닿았다.
‘……이건…….’
동시에 그녀는 오랜만에 익숙한 감각을 받았다.
온몸이 네모나게 썰린 다음 다시 문지르며 짜 맞추는 것 같은 끔찍한 감각.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힘.
‘순간 이동 마법? 하지만 약간 다른데…… 대체 어디로…….’
바닥으로 추락하는 빗방울처럼 몸이 무거워진 것도 잠시.
눈을 떠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잠깐만…… 여긴…… 우리 집이잖아?”
한낮에 꾸는 꿈이 이렇게 신묘할까.
80년 전의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