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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62)화 (162/166)

159화

“뭐?”

힐데가르트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그녀가 마력을 퍼부은 마법진은 새로이 색을 입은 것처럼 푸르게 빛나며 사방으로 빛을 내뿜었다.

춤을 추듯 허공으로 떠오른 문자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곧 힐데가르트의 의지대로 족쇄가 되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딴 마법으로……!”

단테는 제 발치를 내려다보며 족쇄가 된 마법을 짓밟으려 들었다.

그러나 한번 발동된 마법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다.

육신을 얻어 자유롭게 지상을 노니며 재액을 흩뿌리는 마성신으로서의 완벽한 강림.

그 허상이 존재하는 차원에 한 번 붙잡힌 이상 쉽사리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했다.

“이딴 걸로 강림을 막을 수 있다고 착각하나, 힐데가르트!”

“착각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더욱 마력을 불어넣었다.

플람과 달리 그녀의 마력은 유한했다. 그러니 어떤 의미로 수작질이라는 플람의 일갈이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주 잠깐 발을 묶어놓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마법진에서 손을 뗀 힐데가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플람을 지나쳐 제단으로 다가갔다.

상아색 돌을 깎아 만든 제단 위에는 검은색 보주와 성검이 놓여 있었다.

다행히 성검의 상태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짜 공녀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을 겁니다. 어리고 순수한 영혼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죠.’

솔로몬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럼에도 힐데가르트는 검집을 벗겼다.

백 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는 날카로움과 예리함은 지금처럼 흉흉한 순간에도 여전했다.

“네가 졌어, 단테.”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물기둥처럼 지면에서 솟구친 검은 마력이 그녀에게 쇄도했다.

퇴로는커녕 앞으로 한 발자국 내밀 틈조차 없어 보인 그때. 힐데가르트는 오른손에 쥔 성검을 정면으로 내던졌다.

커다란 전차 바퀴처럼 허공에서 대여섯 번 가까이 빙글빙글 돈 검이 마력을 갈라놓으며 단테의 코앞에서 땅에 꽂혔다.

“언제나 질 거야. 나한테는 말이야.”

마력이 주춤하는 사이에 그녀가 쏜살같이 움직였다.

어느새 바로 그의 앞까지 다가간 힐데가르트는 땅에 박힌 검을 가볍게 뽑았다.

단테의 몸통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아아악!”

볕 좋은 날에 양산을 펼치는 사람처럼 기품있지만 검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임이 없었다.

성검은 환한 빛을 발하며 일대를 집어삼켰다. 동시에 단테의 갈라진 부위는 재생되기는커녕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 끔찍한 소리를 뱉었다.

“어째서?”

마성신의 분신인 그가 품고 있었던 제물들의 비명이었다.

‘끔찍해.’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와 연결된 황금색 마력의 실은 그녀를 끝까지 붙들었다. 그녀는 비탄과 절망, 분노만이 가득한 저편에서 억지로 눈을 돌렸다.

“왜? 다시 태어난 너에게는 분명 죽음이 필요했을 텐데?”

“약속을 지켜야 하거든.”

대신 성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힘껏 찌른 뒤 손목을 비틀었다.

“왜…… 왜……!”

단테는 사라지기 직전까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그녀를 향해 팔을 뻗으려 했다.

마침내 성검의 환한 빛이 잦아들고 소름 끼치는 적막이 찾아올 그때까지.

텅!

단테가 사라진 그 순간.

“이번에도 내 승리야.”

마침내 숨을 몰아쉬던 힐데가르트의 손에서도 성검이 떨어졌다.

죽음 직전에 마성신을 봉인했던 때의 기억은 지금도 흐릿하다.

‘이런 것’을 내가 사는 세상에 풀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 하나로 온몸이 부서질 때까지 검을 쥐고 있었다.

‘그때에는 약속 같은 걸 떠올릴 틈이 없었지.’

하지만 떠올렸다 한들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빠각! 으지직!

힐데가르트는 마력을 내뿜는 코어를 완전히 부순 뒤 플람을 바라보았다.

플람은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제 손끝을 움직여 보며, 연신 마법을 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 축을 흔든 대가는 빠르게 찾아왔다. 마력은 모래만 담아둔 화분에 물을 부었을 때처럼 뻥 뚫린 듯 빠져나갔다.

“안 돼…….”

검은 마력을 이용한 마법이 깨진 대가 또한 확실했다. 그의 손끝은 쪼글쪼글하게 말라비틀어지고 있었고, 일분일초마다 시야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진짜 공녀가 돌아올 방법이 있었느냐?”

“……스승님.”

플람은 오직 목소리에 의존하여 힐데가르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때 총명함에 가득 차 있던 노란 눈동자는 눈먼 자와 다름없이 행동한 대가로 그 빛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빛이 꺼진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답해. 네게 건네는 마지막 질문이다.”

“…….”

“최악의 상황에서도 돌이킬 방법을 생각한 채 저지른 일이야?”

“시든 꽃을 심은 곳에 싹이 틀까요. 빻아놓은 밀가루를 뭉친다 한들 다시 밀알이 되겠습니까?”

플람이 고개를 저으며 흐느끼듯 말했다.

“…….”

“스승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소모된 제물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 전 스승님을 위해…….”

“그만.”

힐데가르트가 그의 말을 잘랐다.

플람은 스승의 조용한 분노가 담긴 표정을 직접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히 그려졌다.

차분한 목소리는 결코 다정한 게 아니라 불필요한 분노를 억누르기 위한 것.

듣는 이를 위해서가 아닌, 그녀 본인을 위한 인내였다.

“네 말이 맞았다, 플람. 처음에는 미치도록 그리웠어.”

그녀는 돌아가고 싶었다. 과거와 엉킨 실을 풀기보다는, 차라리 얼기설기 뒤섞인 채로 남아 있고 싶었다.

레온하르트와 옛 시절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깊이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인생이 불행했던 건 아니야. 그렇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무리할 필요 없다, 그렇게 할 것까진 없다는 오빠의 만류를 언제나 한 귀로 흘렸다.

햇살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이 언제까지고 쏟아지기를 바랐기에, 저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지 못하고 혹한의 삶으로 자신을 몰아갔다.

꼭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이 다 끝났으니 한가로이 낮잠을 청하며 쉬고 싶을 뿐.

‘죽은 듯이 잠들고 싶다는 말엔 세상 끝까지 쫓아와서 걱정할 사람이 있으니 그럴 순 없겠지만.’

힐데가르트는 아직 형태가 망가지지 않은 탈리스만을 매만지며 말했다.

“앞으로도 내 인생은 불행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내 새로운 삶에는 너에게 남겨줄 자리가 없구나.”

“…….”

핏기가 가신 플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무작정 손을 뻗었다.

“스승님, 제가 잘못…….”

“너와 함께한 모든 기억이 이제는 다시 돌이켜보고 싶지 않을 만큼 휴짓조각이 되었다. 끔찍할 정도야.”

왜 잊었을까?

그녀의 분노는 이토록 조용한 바다에 몰아치는 바람처럼 걷잡을 수 없다는 걸.

언제나 플람이 원하던 대로 움직이지 않고, 대답하지 않는다는 걸 왜 잊었을까.

“우리가 서로 아끼고 사랑했던 너와 나는 모두 80년 전에 죽었으니, 전부 그만두는 게 옳아.”

힐데가르트의 손에서 나온 황금빛 마력이 거대한 올가미처럼 플람을 덮쳤다.

카각! 카각! 빠지직!

동시에 마력의 코어가 부서진 여파로 동굴의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스승님!”

“플람. 오늘부로 나는 너를 완전히 파문하겠다.”

힐데가르트의 마력은 플람을 가두는 거대한 새장이 되었다. 저에게로 손을 뻗던 플람의 어깨가 그대로 퉁겨져 나갔다.

“너는 이 시간부로 드롯셀마이어 제국 범죄자를 도운 이름 모를 흑마법사이고, 아카락시아와도 천공탑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존재야.”

“그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 나가서, 이곳을 나간 뒤에 전부 죗값을 치를 테니……!”

“미안하지만 이젠 모든 게 너무 늦었단다.”

발소리가 들린다.

동굴이 무너진다면 당연히 밖으로 나가야 할 녀석이 끝까지 저를 찾아 달음박질쳤다.

“나도 선택했어. 누구의 곁에, 어디에 남을 건지를.”

“힐데가르트!”

“공녀님!”

솔로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다가온 키스케가 저를 등 뒤에서 끌어안는 감각이 생생했다.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나를 사랑한 사람들이 내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들리지 않는 한숨 소리는 키스케의 벅찬 숨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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