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53화 (153/275)

제153화

이상한 거?

무언가를 먹였다, 그런데 먹인 놈이 황실이다.

자연스럽게 용 공작의 일이 떠올랐다. 에키온을 사육하듯이 다루던 황실과 흑표범들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황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릴리에게 이상한 것을 먹인 걸까?

‘대체 그놈들은 다른 수인을 뭘로 아는 거야.’

나는 짜증이 치솟았지만 꾹꾹 눌렀다.

원작과 다르게 동물로 변하는 여주인공. 단서가 보였다.

“혹시 흑표범들은 모르는 거야? 공작은?”

“공댝님 몰라요……!”

“……아하. 괜찮아. 릴리. 쉬이. 천천히 말해도 돼.”

애가 숨을 못 쉰다.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달랬다.

그러자 릴리가 울음 사이로 힘겹게 내뱉었다.

“끕, 흐끅, 마, 말하면, 공자님이랑, 공쟉님 어, 없애 버리겠다고 해써, 요, 흐끅! 무, 무서워써.”

나는 또르륵또르륵 흐르는 구슬 같은 눈물을 내 소매로 닦아 주었다.

‘일단은 앉혀 놓고 이야기하자.’

푹신한 소파에 릴리를 앉히고 나는 그 아래에 엉덩이를 붙였다.

릴리는 내내 내 새끼손가락을 꼬옥 쥐고 있었다.

“착하지, 널 도와주려고 묻는 거야. 그럼……. 그 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괴롭힌 건, 아니. 황실이 널 괴롭힌 건 아무도 몰라?”

릴리가 울먹울먹한 눈을 들어 올렸다.

“……끕, 도망가라고 해써요.”

“누가?”

“파, 팔라야 님이…….”

팔라야. 판테리온 공작의 둘째다.

흑표범네의 둘째가 릴리를 도망가게 했다.

‘그놈이 바람둥이에 성격이 뭐 같긴 해도 릴리만은 진심으로 아꼈어.’

그 말인즉 릴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자기 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인정했단 소리다.

그렇다면.

‘정말 판테리온 공작은 릴리에게 일어난 일을 모르는 게 맞나?’

나는 천천히 눈을 돌렸다.

“그래, 알겠어.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지?”

릴리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그럼 여기에 있어. 대신에…… 나를 좀 도와줄 수 있니?”

“엉니를?”

“응. 맞아. 나를.”

“제가 도울 뚜 이써요?”

“네가 할 수 있는 건 생각 이상으로 많아. 릴리.”

너는 세상의 사랑을 받거든.

나는 싱긋 웃었다.

“너처럼 금색 머릴 가진 놈에게 괴롭힘을 당한 친구가 있거든? 나는 네가 그 친구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면 좋겠어.”

어린 이 애가 이해할 수 있을지 염려되긴 했지만…….

내가 아는 릴리는 책 속에서든 앞선 회차에서든 영리한 아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릴리가 망설이더니 말했다.

눈물이 매달려 있지만 똘망똘망한 시선이었다.

“그 칭구도 아파여……?”

나는 에키온을 흘끗 보고는 끄덕였다.

“응 아파. 그래서 얼른 도와주고 싶어.”

나는 릴리가 잠시라도 망설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릴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열심히 끄덕였다.

“도와줄 수 이써여!”

“좋아.”

나는 이렇게 말하며 속삭였다.

“일단 나는 곧 네가 어딘가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퍼트릴 거야.”

* * *

판테리온 공작은 연이어 들려 오는 소식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하이에나가 박살이 났단 소식은 어째서 들려 오는 거냐.”

판테리온 공작의 앞에는 보좌관 노릇을 하는 가젤 수인과 그의 첫째 아들인 아스엘이 서 있었다.

보좌관은 판테리온 공작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파들파들 떨면서도 가까스로 버텼다.

이런 것 하나 버티지 못해서야 감히 판테리온 공작가의 비서관이라 할 수 없다.

아스엘은 그런 보좌를 흘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이에나 측의 방계가 이 도시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놈이 나타난 거지?”

“일단 닥치는 대로 육식 동물 수인과 맹수들을 모으지 않았습니까. 황실에서.”

“…….”

무분별한 맹수 집결은 판테리온의 뜻이 아니었다. 황실의 은밀한 명이었다.

“인원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지면서 파악할 수 없는 일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 탓에 맹수들이 모여들면서 크고 작은 사고와 부작용이 발생했다.

“아직은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적지만,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맹수의 증가로 인한 가장 큰 부작용은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거리를 무법지대로 만든다는 점이다.

이를 알지만 손을 댈 수 없다.

중요한 것을 이 도시에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 공작의 진정한 힘은 평범한 맹수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을 깨닫는 순간 도망치는 건 삽시간에 가능할 터.”

이들 인원은 사실 외부의 적을 생각한 게 아니라, 내부의 용 공작이 언제 도망갈지 몰라 붙드는 데 필요한 자들이었다.

필요하다면 사살도 불사한다. 그래야 다음 용 공작이 태어날 테니까.

황실은 용 공작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라면 용의 도시가 범죄 도시가 되어 가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피에르 아콰시아델은 도시가 아슬아슬하게 슬럼가로 넘어가기 직전의 상태에서.

거대한 폭탄을 터트린 셈이었다.

“이제 판테리온만으로는 이 도시의 치안을 지키기 힘듭니다, 아버지.”

“…….”

“그렇지만 용의 도시 기사들은 용 공작이 나타나야 제대로 움직일 겁니다.”

판테리온 공작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첫째 아들의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아스엘은 제 부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포착했다.

“그놈이 요청을 했다고 들었다.”

“네. 딸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용 공작이 직접 나서서 자신과 대결할 것을 요구했다더군요.”

“미쳤군.”

판테리온 공작이 평가했다. 예로부터 범고래놈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하나같이 종잡을 수 없는 미친 짓을 해댔다.

“처음부터 제 딸을 용의 신부로 삼지 않았으면 될 일을.”

“아콰시아델 가주의 명이었다고 합니다. 하여, 가주의 뜻을 굽히지 못했으니 용 공작의 뜻을 굽힐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이를 저잣거리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입이 가벼운 작자로는 보이지 않았건만, 아무래도 판단이 잘못된 듯했다.

피에르가 요청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용 공작이 나서지 않으면 육지놈들이라도 나서라며 도발했다지.”

“예. 동시에 저희에게 요청했습니다. 페세움을 개방하라고 말입니다.”

페세움. 과거 무투사들의 전투가 열리던 곳.

그곳을 개방하라 한 연유는 뻔했다. 거기서 치고받고 싸우겠단 소리지.

“개소리도 아주 정성껏 하는군.”

“저희가 거절할 시, 이렇게 전해 달라고 했다 합니다.”

아스엘은 무표정하게 보고서를 읽었다.

“도시를 부수는 것보다야 페세움에서 패싸움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진정 용 공작 대신에 이 성의 관리를 맡은 자들이라면 판단 잘하라고…….”

쾅!

“아랫놈들은 뭐 하는 놈들이길래 그딴 소리를 그냥 듣고 왔다는 것이냐?”

“아버지.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 보여도 범고래입니다.”

수중 동물 수인들의 최강자.

피에르는 여차하면 도시를 부숴서라도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을 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돈 어린 이 도시가 그런 충격을 감내할 수 있을까?

판테리온가에서는 용 공작이 있는 이 도시를 철저하게 통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피에르가 난장판을 키울수록 어렵다. 황실은 ‘혼란스러운 틈을 탄 용 공작의 도주’를 우려할 것이고, 리스크는 결국 판테리온에서 모두 지게 될 터였다.

“마지막으로 광장에서 외친 말이 있다 합니다.”

아스엘은 보고서의 마지막을 보고서는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무표정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노린내 나는 놈들을 모두 이기면 마지막엔 흑표범이 나와서 여흥이나 돋우라고 했더군요.”

아스엘은 보고하다 말고 마지막에 작게 웃고 말았다.

판테리온 공작은 화를 내려다 타이밍을 잃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웃는 것이냐?”

“아뇨. 터무니없는 말이지 않습니까.”

“…….”

피에르의 마지막 도발은 판테리온을 향했다.

마지막엔 너와 싸우고 싶다는 말에 흑표범들은 하나같이 비웃었다.

“아버지, 페세움을 개방시켜 주십시오.”

젊은 수인으로서 피가 끓을 법한 도발이었다. 피에르란 놈이 평소 어떤 성정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제법 굴렸다.

결국 맹수는 맹수였다.

한평생 강자로 군림하던 자들이기에 자존심을 긁어내는 도발이 오히려 우아한 척 가식 떠는 조롱보다 더욱 잘 먹혔다.

‘분명 우리 생태를 아는 놈이 벌인 일이다.’

정말 피에르 아콰시아델은 그저 제 딸을 용의 신부로 보내지 않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인가.

“왜, 너도 거기 나가 보려 하느냐?”

“생각이 없진 않지만 그런 말을 드리려 꺼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스엘이 표정 없는 낯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방해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용의 신부를 그대로 놓아줄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신부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일이니까요.”

용의 신부가 필요한 건 판테리온이 아니라 황실이었지만.

용의 신부를 이 도시에 붙들어 놓을 이유가 있었다.

“차라리 피에르 아콰시아델이 원하는 대로 한 가지를 내주고, 우린 다른 한 가지를 취하면 어떻습니까?”

“어떤 것을 말이냐.”

판테리온 공작이 두꺼운 팔로 팔짱을 꼈다.

“무엇이겠습니까.”

지켜보겠다는 시선, 아스엘에게는 익숙한 평가의 시선이었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용의 신부를 데려가 어딘가에 숨겨 둔다면.”

“……딸을 아낀다던 아비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판테리온 공작이 픽 웃었다. 검붉은 눈이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범고래를 경계병으로 쓴 최초의 수인이 우리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

아스엘은 제 부친의 얼굴에 그려진 숨길 수 없는 기쁨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용의 신부는 제가 직접 데려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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