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59화 (159/275)

제159화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서 판테리온 공작의 선명한 분노가 느꼈다.

역시, 이쯤 되어야 저 공작이 화를 내는 모양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우습지도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밟고 있는 땅이 흔들렸다.

이 지진은 나뿐 아니라 관중들도 느꼈으리라.

땅의 힘.

그중에서도 쓰기 어렵다는 지진을 일으키는 능력이다.

흑표범들은 땅의 힘을 통해서 땅을 가르고 사람을 가두고, 깊은 곳의 용암을 솟구치게 하는 등.

능력 자체도 위험하고 위협적으로 쓰기 좋았다.

그 힘이 오직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음, 살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건…….’

나는 흘끗 아빠를 보았다.

곧 다시 판테리온 공작을 바라보니 조금 전보다 더욱 일그러진 표정이 눈에 띈다.

‘음, 전망 좋고.’

뷰가 아주 좋고, 빡친 얼굴이 맛나요. 별점 오 점 드립니다.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중얼거리는 동시에 느긋하게 짧은 곡조를 흥얼거렸다.

‘아아, 느껴진다. 느껴져.’

옆에서 둘째가 미친놈 보듯이 보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둘째야, 너도 회귀를 딱 세 번만 해 보렴.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살 수가 없단다.

그리고 이 얼마나 즐거운 장면이니.

나는 여기서 아스엘을 콱 밟아주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너무 궁금했지만 잠시 접어 두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살벌한 저 어조 때문은 아니었다.

여긴 수많은 눈이 있다.

이 상황을 이용할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무슨 연유로 내 아들을 저따위 몰골로 만들었는지, 납득할 이유를 대라.”

“…….”

“그렇지 않으면, 네 양팔이 온전할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우스웠다.

‘명불허전이네. 이게 여덟 살을 향해 할 소리냐?’

하기야 원작에서도 릴리에게만 다정했을 뿐 타인에겐 무섭도록 차갑고 잔인해지는 인간이었다.

“이럴 땐 댁의 아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묻는 것이 먼저지. 아, 물론 설명했지만.”

어디서 양아치 같은 학폭 가해자 부모처럼 굴고 있어.

그래, 이것이 너희의 본질이었지.

사람의 인생은 언제나 1인칭이다. 원작 악역의 1인칭은 아프고 괴로웠다.

하지만 저 인간이 하듯이 화를 내진 않았다.

왜?

이곳은 에키온이 살아갈 터전이자, 다스릴 영지이다.

저 오만한 공작은 시선을 간과하고 있다. 진짜 주인인 척 행세하니까 모르는 거다.

우리는 좋은 이미지만 가져가면 그만이지.

“나를 공격했다고 설명했을 텐데요?”

오가는 내 말투엔 존대와 반말이 섞여 있었지만 정중함은 잃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소리! 우린 용의 신부를 건드리지 않는다.”

“명령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아아, 그럼 아스엘 판테리온이 멋대로 나를 납치하려 들고 살해하려 든 거겠네요.”

“그렇게 뻔뻔한 주장이라니, 증거는 있느냐?”

“이상하네.”

나는 싱글 웃으며 무구한 아이의 표정을 만들어 냈다.

본래 사람을 빡치게 하는 것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보통 ‘너같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판테리온의 후계자를 때려눕혔냐’, 이 질문을 먼저 할 텐데?”

오만한 놈들에겐 이게 제격이지.

해맑게 오류를 지적하자 아니나 다를까 판테리온 공작이 나를 살폈다.

나는 저 남자를 오래 보았기에 안다. 대답하기 전까지 갈등했다.

“휘하 기사들이 나섰겠지.”

“음? 이상하네요.”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순진하게 깜빡였다.

“범고래 평기사들이 판테리온의 후계자를 제압했다니. 그럼 후계자는 별거 아니란 소리?”

사람들이 잠시 술렁거렸다.

후계자를 송사리 취급함에도 판테리온 공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차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너희 범고래들은 예부터 하나같이 비열하고 포악한 수인 아닌가. 비겁한 술수를 썼다면 어쩌겠는가. 내 아들은 어린 것을.”

어린 내가 제압한 건 믿지 않으면서 제 아들은 어리다고 감싼다라.

하긴, ‘내로남불’로 살기가 제일 편한 법이지.

“어린 내가 제압했다는 건 믿지 않으면서, 도리어 아들은 어리다고 감싸다니. 나중에 내가 하는 불륜도 로맨스로 하해롭게 감싸 안으시겠어요.”

툭 내뱉는 내 말에, 푸핫!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곁눈질하면 아틀란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 소리는 모두 중계되고 있었으므로.

“비겁한 범고래와 불륜의 흑표범이라. 박빙이군.”

아빠의 이 평온한 미친 소리도 모두 울려퍼졌단 소리다.

판테리온 공작이 살짝 떨었다. 분노로 인한 떨림이었다.

하기야 살면서 이런 조롱을 얼마나 받아 봤겠나.

황실 바로 옆에서 늘 오만하게 굽어 봤을 자들이다.

관중에서 작게 터져 나오는 이 웃음소리 하나 견디지 못할.

나는 흘끗 둘째놈을 보았다.

내가 고갯짓하자 아틀란이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바닥에 누워 있던 아스엘의 눈. 조금 전까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던 눈이 물로 가려졌다.

‘안 되지.’

저놈이 나를 노려보다 말고 제 아비를 향해 무언가 신호를 보내려 했다.

나는 기민하게 눈치채고 시작과 동시에 막았고.

‘어디서 주고받으려고.’

이제 말장난은 끝이었다.

“증거를 제시하란 말에 답변이 신변잡기뿐인가?”

이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용의 신부가 이토록 사람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려 들다니, 아콰시아델 가주가 오판해도 단단히 오판했군.”

매서운 공방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보았다.

판테리온 공작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전과 다르게 냉정한 눈을 한 채 크게 다그치고 있다.

‘이미 늦었어.’

언제 무구하게 웃었냐는 양 나는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이제 와 이상함을 눈치채고 흐름을 바꾸려 해도 늦었단 소리야.

오만한 새끼들.

너흰 늘 나를 하등하고 너희가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지.

나는 픽 웃었다.

“이래서 물증이 중요하다니까…….”

손짓했다.

“증거 운운했나요? 좋아. 그 좋아하는 증거. 한번 보자고.”

눈치 빠르게 자신의 차례임을 알아차린 아틀란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손을 펼치자, 푸른색 결정이 둥실 떠올랐다.

“보존 능력이군.”

아빠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순순히 인정하면 이것만은 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지.”

물론 페이크다. 이놈들아.

“이게 바로 나를 먼저 공격했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혼잣말인 척 중얼거렸다.

“아, 누가 비열한 건지도 알려 주겠네.”

내 말과 동시에 눈앞에서 결정이 쨍그랑 깨졌다. 안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아틀란의 물색은 형제 중에서 유독 연한 푸른색.

놈의 성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이것이 영화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이는 내가 바라던 모습이기도 했다.

곧이어.

“……!!”

“…! ……!!”

싸움이 재생되었다.

음소거 된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처음 시작은 내가 시종, 흑표범 기사들과 정원에 함께 서 있는 장면에서부터다.

화면 속 나는 무구하게 웃고 있었다.

‘누가 보면 딱 사탕 주며 납치하기 좋게 생겼네.’

범고래치고 둥글둥글하게 생겼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묘한 기분이었다.

곧이어 나는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기척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였지?’

참 웃긴 것이, 물로 만든 스크린 속 내 표정은 보는 사람에 따라 겁먹고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찍는 각도가 이러하다 보니, 시종의 모습도 나를 위협하듯이 찍혔고.

‘이야, 둘째놈. 솜씨 보게. 조작에 훌륭한 자질이 보이는걸.’

능력 자체는 순수한 기록을 위한 능력이지만 같은 장면이라도 연출에 따라 달라지는 법.

지금 이렇게 말이다.

곧이어 기사들이 우르르 나타나 나를 포위하자, 누가 봐도 위협하는 형국이었다.

동시에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내게 말 거는 모습은 더욱이 협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연 등장.’

아스엘 판테리온이 기사들 틈에서 나타난다.

‘이야, 완전 어린 악당 보스처럼 나왔네.’

다음 순간 전투가 시작되고, 내가 흑표범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뿌듯했다.

더 패 줄걸.

재생된 싸움은, 아스엘이 내게 주먹으로 뺨을 맞고 쓰러지면서 끝이 났다.

아주 예술 같은 끝이었다.

“…….”

모든 재생이 끝나고 이 경기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함에 잠겼다.

사실 소리를 함께 재생하는 게 어렵느냐.

아니?

원래 내게 약간이라도 불리한 건 가리는 거다. 암.

“여러분, 하나만 물을게요.”

나는 작은 돌을 던졌다.

“내가 이토록 강하지 않았다면, 이 장면에서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날 지켜 줄 아빠도 기사도 없는 상황에서, 포위하는 기사들이라니.”

곧 하나둘 수군거리더니, 곧 거대한 술렁임이 되었다.

“이것이 고작해야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용의 신부를 다수가 핍박하고 위협하며, 끝내는 납치와 살인까지 시도한 일의 전말입니다.”

나는 관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는 누가 비열하죠?”

보고 있냐, 공작.

아들 배달료는 유료다,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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