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놀랐지만 이를 감추고 태연을 가장했다.
‘어떻게 바로 용 공작인 걸 알아봤지?’
아니지. 저 할머니의 나이라면 분명 전대 용 공작을 볼 기회가 있었던 게 아닐까.
용 공작은 매번 똑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얼굴로 태어난다고 하니까.
낭패였다.
아빠의 상태를 들킨 걸로 모자라 도움이 될 아틀란은 이미 붙잡혀 전투 불능 상태.
게다가 에키온까지 들키다니…….
나는 슬쩍 레바이를 보았다.
놈이라면 내 신호를 알아차리리라 굳게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굳은 얼굴을 한 레바이가 웨일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래, 이 상태에서 웨일이 어떤 존재인지까지 들킬 수는 없었다.
품에는 릴리를 다른 한 손엔 웨일을 붙잡은 레바이가 물러나는 사이.
할머니가 레바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게끔 시선을 끌었다.
“맞아요, 할머니. 이쪽은 용 공작이에요.”
“…….”
“제가 데려왔어요.”
순순히 수긍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할머니의 얼굴로 더욱 분노가 스몄다.
“……육지놈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보겠다더니, 우리에겐 폭탄을 가져왔구나.”
왜 그렇게 말하는 걸까.
사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수중 동물 수인의 적은 육지 동물 수인들이었지.
용 공작은 아니었으니까.
“용 공작이 여기 있어서 놀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왜 그렇게 분노하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는 이유를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이유를 알기란 어렵지 않았다.
폭군이었고, 그만큼 가문을 통제하는 데 집착하는 사람이었으니.
자신이 모르는 새에 이런 발칙한 일이 일어난 사실에 화가 난 거겠지.
가주의 말에 차분히 대답하면서도 한편으로 붙잡힌 아빠를 볼수록 초조해졌다.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대화를 시도하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용 공작님께서 이곳에 오신 건 사정이 있어서…….”
“넌 모른다.”
할머니가 내 말을 딱 잘랐다.
“왜 굳이 용이 평생 용의 도시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인지, 너는 모른단 소리다. 지금 네가 데려온 게 무엇인지는 아느냐?”
“…….”
“전쟁의 불씨가 될 거다.”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황실이 용에게 어떤 집착을 보이는지, 대대로 아콰시아델의 가주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지.”
“…….”
“네 어리석은 판단이 이 땅에 불필요한 전쟁을 끌어올 거란 소리다.”
“이상한 말씀이네요. ……싸움을 좋아하는 할머니께선 도리어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할머니가 픽 웃었다.
“내가 벌이지도 않은 싸움을 즐기는 취미는 없단다. 고약한 것아.”
할머니가 가진 물의 힘은 밤바다처럼 까만색에 가까웠다.
“저건 내가 직접 포장해 원래 있던 곳에 던져 두마. 너는 한동안 밖으로 나돌 생각은 말거라.”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피식 웃었다.
“왜요, 제가 꽤나 쓸 만한 후계자로 보였나 보죠?”
“뭐?”
“생각보다 양호한 처벌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나는 주변에 있던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내가 던진 꽃병이 할머니에게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 나며 펑 터졌다.
파편이 할머니의 뺨에 스치며 작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이딴 눈속임을…….”
어느새 내 주먹이 할머니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악력이 대단했지만 참을 만했다.
나 역시 꽃병 파편에 스쳐 미약하게 욱씬거리는 뺨을 느끼며 생긋 웃었다.
“이딴 눈속임에 반응 속도가 생각보다 느리세요. 가주님.”
“…….”
“늙으신 걸까?”
쾅!
내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물의 힘이 망치처럼 내려쳐졌다.
‘물의 힘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허공에 뜬 채로 아틀란과 아빠를 붙잡은 거미줄 같은 물줄기를 손에 잡았다.
따끔하며 화상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윽.’
우악스럽게 잡아 뜯어 아틀란을 반쯤 구해 내는 것도 잠시, 내 발이 할머니의 물줄기에 잡아채였다.
나는 손쉽게 이것 또한 잡아 뜯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전투 능력이 마치 성인 놈들 싸우는 것보다 낫구나.”
“스승이 좋아서요.”
“하지만 발악은 여기까지다.”
바닥으로 검은 물이 고였다. 무식한 노인네.
‘이 방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셈인가.’
이렇게 되면 물줄기가 어디에서 솟아날지 모른다.
이전엔 할머니의 물이 저런 색이 아닌 것 같았는데, 분노로 인해 저런 색인 것일까.
아니면 저게 바로 진정한 힘인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다리를 살짝 뒤로 물렸다. 남은 건 전투뿐이겠지만.
“어차피 용 공작을 다시 용의 도시로 데려가면 난 죽어요. 바다의 맹세를 했거든요.”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무슨 상관인가? 뒤에 가서라도 하면 그만이지.
“……끝까지 내게 도전하겠다는 거냐.”
“사정 하나도 듣지 않겠다는 가주님에게 무슨 말을 할까요.”
나는 주먹을 쥐고 전투태세를 보였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투스, 에키온이 절대 나서지 못하게 막아 줘.”
에키온이 여기서 나서면 안 된다.
“틈을 봐서 떠날 거야.”
그리고 나도 할머니랑 오래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 천장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내게로 날아왔다.
나는 이걸 그대로 쳐냈다.
‘뭐지? 아까보단 할 만한데?’
물의 영역까지 펼친 가주의 힘이 이것밖에 안 될 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바닥!’
바닥에서 거대한 물이 솟구쳤다.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이상으로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콜록, 콜록, 콜록!”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고통이었다.
하기야, 회귀자랍시고 또 아빠의 훈련으로 인해 빠르게 강해진 뒤론 거의 얻어맞을 일이 없었으니.
나는 물이 고인 바닥에 엎드린 채로 등을 짓누르는 힘을 느꼈다. 할머니의 힘이다.
“대단해. 실로 대단하구나.”
“……콜록, 콜록. 대단하면 대우나 해 주지, 그래요?”
“네가 탐난다는 말은 사실이지. 하지만 그 정신 상태는 고쳐 둬야겠다.”
망할 할망구! 본인 정신 상태나 뜯어고칠 것이지.
“…….”
나는 눌러대던 힘을 이겨 내고 일어났다. 다시 날아온 물줄기를 주먹으로 박살 냈다.
“쯧, 육체만큼은 완성형이군.”
할머니가 쯧 혀를 찼다.
‘어차피 힘겨루기로는 지금 상대가 안 돼.’
물의 힘이라도 각성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영리하게 갈 때다.
좋아, 이렇게 틈을 조금만 더 벌려서 에키온의 힘을 발동만 시키면…….
그때였다.
오싹함이 들었다. 아니, 익숙한 오싹함이다.
고개를 돌리면, 3회차 세상이 멸망하던 순간에 느꼈던 것과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에키온의 눈에서 푸른색과 황금색 빛이 일렁거렸다.
불길함이 들었다.
“칼립소, 괴롭, 혔어…….”
“에키온!”
아니나 다를까.
폭주 전조 현상이었다.
3회차에서 보았기에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었다.
이걸 이대로 진정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보았던 끔찍한 장면을 또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허, 아직 새끼용 주제에 상대가 될 것 같으냐.”
할머니의 물줄기가 수십 개로 갈라져 에키온에게 날아갔다.
에키온이 붙잡혀 찡그렸다.
‘젠장, 애 자극하지 말라고!’
에키온 주변에 있는 푸르고 금빛, 그리고 검은빛까지 일렁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칼립소! 용 공작님 이대로는 위험해! 안 돼! 폭주해!
아기 뱀이 된 투스가 어느새 내 어깨로 날아와 말했다.
“얼마나 남았는데!”
-10, 10초!
나는 앞을 가로막는 물줄기를 쳐내며 억울한 마음으로 외쳤다.
‘무슨 시한폭탄도 안 이렇겠다! 왜 그리 촉박한데!’
하지만 따져 물을 시간은 없었다. 내가 가질 땅. 이제는 소중한 사람이 생긴 땅이 3회차처럼 되도록 둘 순 없었다.
무엇보다 에키온의 이번 삶은 누군가에게 망쳐지지 않고 행복하길 바랐다.
“에키온!”
마침내 에키온의 앞에 다다랐을 때, 신기하게도 에키온의 날카로운 힘이 내 앞에선 부드럽게 풀어지는 걸 느꼈다.
“젠장, 누구 맘대로 폭주하는 거야! 절대 안 돼!”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도 폭주할 수도 없어.
-칼립소, 이미 폭주가 시작되었어!
“내가 어떡해야 하는데?!”
-시간의 틈이 열릴 거야.
나는 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키온의 멱살을 쥐었다.
-폭주가 아니라 힘을 쓰는 걸로 바꿔야 돼! 칼립소가!
“내가?”
에키온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더는 나를 보지 않았다.
왜일까, 그게 열이 받았다.
늘 나를 맹목적으로 봤으면서.
-칼립소! 시간에 휘말릴 거야. 공작님, 칼립소만 생각해! 시간의 틈에서 칼립소는 공작님 만나야 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에키온! 정신 차려!”
나는 일단 냅다 입술을 들이받았다. 이걸 입맞춤이라고 해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키는 대로 했다.
그와 동시에 내 어깨를 붙드는 손을 느꼈다.
돌아보면, 정장이 벗겨진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할머니의 뒤로 보이는 거대한 블랙홀 같은 구멍도.
보고 있으려니 오싹해졌다.
“칼립소.”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에키온이 드디어 나를 봤다. 하지만 왜일까…….
서늘하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저건 시간의 틈이야.”
설명하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에키온이 가주를 슬쩍 보는 것 같았다. 용 공작이 세상 예쁘게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저거 던져 버려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