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83화 (183/275)

제183화

‘허어.’

아콰시아델의 현 가주. 오큘라 아콰시아델은 혀를 찼다.

분명 제 손녀인 칼립소 아콰시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갑자기 생긴 문을 붙잡는 순간, 시야가 까매지더니 어느새 낯선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답게 당황하진 않았다.

물론 이곳에 들어와서 일어난 모든 상황은 제아무리 그녀라 해도 놀랄 만한 일들로 가득했지만.

여기서는 칼립소와 있었을 때와 동일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는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모습의 오큘라.

아니, 또 다른 ‘오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

* * *

1회차의 ‘오큘라’는 한창 집무를 보느라 바빴다.

“저어, 가주님. 판테리온 공작가에 심어 둔 세작에게서 정기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비서관인 멸치 수인은 겁은 좀 많았지만 머리만은 발군으로 똑똑한 놈이었다.

겁 많은 자를 거슬려 하는 ‘오큘라’가 옆에 둘 정도로 능력이 있었단 소리였다.

“요약해.”

“예, 음……. 어, 여전히 판테리온 공작가와 음, 육지 맹수 수인들이 공녀님을 가만히 두지 않는 모양입니다.”

흑표범 가문에 약혼녀로 보낸 손녀, 아니 정확히는 팔아 버린 손녀의 이야기는 매번 심어 둔 세작을 통해 보고받고 있었다.

아콰시아델에서도 덜떨어진 손녀는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됐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보낸 지 10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기 한번 떨치지 못하고 그런 꼴이라는 게 그저 우스울 뿐.

자신의 손녀였고, 피에르의 딸이었다. 게다가 피에르의 부인이었던 자도 보통 성격은 아니었거늘. 어쩌다 이딴 돌연변이가 나온 것인지?

실패작이다.

‘오큘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소식이 도착했다.

“으음, 가주님…… 공녀님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칼립소’가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는, 얇은 보고서가 도착했다.

“그, 언제 이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신 건지. 음, 공녀님께서 유언장을 남겨 두었고 판테리온 측에서 저희 쪽으로 보냈습니다. 보니까, 유언장이라기보다는, 가주님께 보내는 편지 같은데요.”

“…….”

“버릴까요?”

‘오큘라’는 다른 날과 다르게 그 보고서를 직접 읽었다. 그리고 ‘칼립소’가 남겼다는 편지 또한 받아서 읽었다. 그저 의미를 둘 것도 없는 변덕이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이 편지를 읽을 즈음에는…… 저는 아마 세상에 없겠죠? 유언장이라고 남겼으니까요.」

종이는 꾸깃꾸깃했다. 달달 떨며 종이 끝을 구기는 가련한 여자아이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쓸모없는 내용이었다.

그만 볼까 생각할 즈음, 본론이 이어졌다.

「원망스러워요. 정말로 미워요.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미웠고 죽어서도 미울 거예요.」

덤덤한 듯하면서도 악을 쓰는 듯한 내용이었다. 군데군데 종이가 우그러진 자국. 울었던 걸까? 그럴 것이다.

쓸데없이 눈물이 많던 실패작이었으니.

「그런데 우습죠,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종이를 구기려던 ‘오큘라’가 잠시 멈칫했다.

「저도 너무 웃긴데요, 내가 이해 안 가는데요…… 할머니, 제가 살아서 본 유일한 가족이 할머니뿐이었어요. 그래서,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떠올랐어요. 할머니 얼굴이.」

‘오큘라’는 자신이 왜 이런 한심한 편지를 눈을 떼지 않고 읽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난 당신을 가족이라고 생각할까요? 보여 준 거라곤 날 쓰레기라고 부르던 얼굴뿐, 마지막까지 처절하고 비참하게 나를 버린 사람인데……. 그런데, 나는 아직도 당신이 가족이라고 믿고 있어요.」

꾹꾹 눌러쓴 글자는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었다.

「외로워요, 할머니. 힘들어요. 너무 힘들어요. 죽고 싶은데 죽는 게 무서웠어요. 그런데 제일 비참한 게 뭔지 아세요? 모두가 나를 아콰시아델에서도 버린 사람으로 아는 거예요.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요?」

“……가주님?”

「할머니, 저는요, 제가 죽을 걸 알고 있어요. 왜냐고요? 제가 직접 선택했거든요. 이렇게라면 죽을 수 있을 거란 걸.」

얇은 보고서에는 ‘칼립소 아콰시아델’은 황태자에게 독살당했다고 적혀 있었다.

육지 맹수 수인들은 감히 황태자에게 들이댄 더러운 범고래 수인이 사고로 죽었다고 알았다.

잘된 일이라 여겼다.

그리고 ‘오큘라’에게 전해진 편지는 이 모든 것이 진실과 다르다고 알렸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노라고.

「죽어서도 원망할 거예요. 나는 가족을 가지고 싶었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요? 대체 왜, 약하면 죽어야 하나요? 왜 난 억울하게 죽어야 해요?」

‘오큘라’는 누군가는 딱하게 여길 편지를 보면서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바보 같은 건 곧 죽을 거란 걸 아는 순간에도 아직 당신을 가족이라 생각하는 나겠죠.」

그래,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멍청한 말인 걸 아는데, 보고 싶어요. 아콰시아델이 내게 무얼 해 주었다고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 멍청했다.

이따위 편지를 남길 시간에 무엇이라도 했어야지. 죽으면 뭐가 남는단 말인가?

쯧 혀를 차야 했다. 힘들면 도망이라도 쳐야 할 것 아닌가?

뭐 그리 미련하게, 참는단 말인지.

「마지막 부탁이에요. 당신이 쓰레기 같다고 한 나를 기억해 주세요. 적어도 죽음 정도는. 이런 손녀도 있었다는 걸.」

이런 말을 해 봐야 남는 건 없었다.

「기억해 주세요.」

‘오큘라’는 마지막 말을 본 후에야 피식 차갑게 웃었다.

한편 보좌관인 멸치 수인은 가주님이 저 한낱 편지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시지?

“……멸치야, 얘가 어떻게 죽었다고?”

“아, 마차 사고로 알려져 있는데 이미 그 마차에서 독을 먹고 죽은 뒤에 사고를 냈다 합니다.”

“…….”

“참, 황실에서도 지독한 독을 썼더군요. 근데 이상한 건, 그 독은 냄새가 고약해서 실수로 마시기가 힘들었을 거란 겁니다. 범고래분들은 후각이 예민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랬다.

물속 동물은 눈보다 후각이 발달했다. 따라서 후각이 예민한 건 대부분의 수중 동물 수인들이 가진 특징이기도 했다.

마지막 문장이 다시 한번 그녀의 눈에 담겼다.

「그런데 있잖아요. ……만에 하나라도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한 번만 따뜻하게 대해 주면 안 돼요?」

편지는 곧 ‘오큘라’손에 구겨졌다. 그리고 툭 책상으로 떨어졌다.

“다음 회의 준비해라.”

“예, 가주님.”

‘오큘라’는 찰나 망설였다.

본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체는 어떻게 됐느냐.”

“네? 아, 공녀님 말씀입니까? 음, 그건 모르겠습니다. 흑표범 측에서 알아서 처리하지 않았겠습니까?”

‘오큘라’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알아차리고는 찌푸렸다.

죽은 자 따윌 왜 신경 쓴단 말인가.

끝까지 멍청했고, 스스로 강해지지 못한 자가 죽었을 뿐이다.

고작 편지 따위가 ‘오큘라’를 흔들어 놓기엔 그녀는 가주로서 너무나 냉정했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건.

그 누구도 그녀를 가족이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가족이기 전에 군림하는 가주였다.

‘오큘라’는 찝찝함을 털기 위해 걸었지만, 이 미약한 찝찝함은 왜일까 흔들림에도 털리지 않았다.

‘칼립소’의 편지에 담긴 마지막 부탁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째 삶에서 또한 똑같이 흑표범 집안으로 쫓겨나 외롭게 죽었기에.

‘칼립소’는 두 번째 삶에선 유언조차 남기지 않았다.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기에.

그러나 ‘칼립소’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면. 세작들이 보고하는 주기가 빨랐다는 점이다.

이따금 아주 가끔은 세작들이 ‘오큘라’의 명으로 남몰래 ‘칼립소’를 돕기도 했다.

대체로 ‘칼립소’가 가는 길을 방해해 흑표범들과 덜 마주치게 하거나, 사람들이 많은 자리로 가지 못하게 하는 정도였지만.

그러나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보호였다.

이 탓에 오히려 ‘칼립소’가 릴리에게 실수를 했다는 오해를 사 갇히고 말았으니까.

억지로 보내 버린 사람이 보호를 명하다니, 악어의 눈물과 다를 바 없었다.

결과는 결국 아콰시아델에도 전해졌다.

“공녀님이 결국 파상풍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

“가주님?”

2회차의 ‘오큘라’는 제가 보내 버린 손녀의 죽음에 기이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잠시뿐이었다.

그대로 회의에 들어가려다, 왜인지 모르나 그저 변덕에 가까운 한마디를 뱉었다.

“……찾아와서 아콰시아델에 묻어라.”

“예?”

“범고래를 그 노린내 나는 땅에 묻어야겠냐?”

“예. 엄, 알겠습니다……!”

‘오큘라’는 왜 이리 기분이 찝찝한지 알 수 없었다.

뭐, 숙명의 라이벌이자 그 혐오스러운 흑표범 새끼들이 감히 범고래를 죽였기 때문 아니겠는가?

죽은 ‘칼립소’는 실패작이지만 어쨌거나 아콰시아델의 일원이다.

여기서 죽었다면 모를까 그 땅에서 죽었으니 신경 쓰일 법도 했다.

이기적인 작태였다.

‘오큘라’가 흑표범 저택에 있던 ‘칼립소’를 도왔다고는 하나 정작 보내 버린 것은 자신이면서 제 편할 대로 행동한 것이 과연 배려였을까.

‘오큘라’는 배려조차 제 입맛대로 저질렀다.

‘나도 늙은 건가?’

우습지도 않았다.

아들들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자신이 고작해야 어린 손녀의 죽음에 아쉬움을 느끼는 건.

‘피에르놈의 딸이었으니…….’

그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피에르놈의 딸인데, 가문에 뒀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하지만 아콰시아델에서 거래의 증표로 보낼 만한 직계 여아는 ‘칼립소 아콰시아델’밖에 없었다.

리리벨도 손녀이지만 불치병을 앓았다. 그러니 그녀를 보냈다간 판테리온 측에서 하자 가득한 사람을 약혼자로 줬다고 꼬투리를 잡았을 터다.

자식으로 장사하는 비정함 정도야 아콰시아델 가주에겐 예삿일이었다.

그럼에도 왜.

신경 쓰이는가.

천천히 사라지는 장면을 보며 오큘라는 눈썹을 찡그렸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곤 하나, 참으로 현실 같지 않은가? 모든 것이 참으로 자신이 할 법한 행동이었다.

소름 돋다 못해 거부감이 치밀었다.

‘쯧, 이따위 걸 왜 자꾸 봐야 하는 건지.’

시간의 틈이라고 했나.

이 틈이라는 게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칼립소에게 악감정이라도 있나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 전부터 그 애가 처절한 삶을 사는 것만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정작 그 애는 아콰시아델에서 천재로 이름을 날리며 잘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오큘라는 손녀가 탐났다.

아니, 그 애밖에 없었다.

날 닮았다.

그래, 그 애 말고는 안 된다.

반드시 칼립소를 가주로 내세울 거다.

다음 가주는 그 애가 될 것이다.

아콰시아델은 자신 이후로도 번영할 터였다.

그러니, 아까 칼립소와 함께 보았던 멸망 따위는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럴 것인데…….

왜 자꾸 이상한 거부감이 치미는가?

오큘라가 미간을 찡그리는 동시에 눈앞으로 한 장면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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