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단 한 마디. 내 이름을 짤막하게 부른 목소리였지만 바로 알았다.
이처럼 반가운 목소리가 또 있을까?
고개를 들어 올리면, 넘실거리는 푸르른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손안에 들고 있던 걸 와르르 쏟아 내며 그대로 손을 뻗었다.
“에키온!”
하늘에서 내려온 건 역시나 에키온이었다.
이곳은 드넓은 초원만큼이나 하늘 또한 원시 자연에 가까웠다. 정말이지 결점 하나 없이 새파랗고 또 어찌 보면 예쁜 하늘빛이었다.
마치 바닷속처럼 느껴졌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네 머리카락이 마치 물속에서 바라보는 태양빛 같았다.
넌 언제 봐도 참 예쁘구나.
이 순간 차오르는, 눈 속에 고여 찰랑이는 소유욕은 내가 범고래라는 걸 알려 주는 것 같다.
너는 스스로 내 것이 되고 싶다고 했으니까, 내가 놓아주기 전까진 내 사람이지?
드넓은 자연이 나마저 원초적인 어느 곳에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본능을 모두 꺼내 놓아도 될 것처럼.
아마도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예쁜 것이겠지?
“에키온.”
에키온이 내려오는 속도가 빨라진다.
순진하게 나를 따라서 내게 손을 뻗던 에키온이 놀란 얼굴을 하는 것도 잠시.
나는 에키온을 꼬옥 끌어안았다.
나보다 커 버린 소년은 내 팔로 끌어안기 조금 역부족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 참,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이상한 일이었다.
신기하게도 조금 전 3회차의 삶에서 오랜만에 보았던 수하들보다 더 반갑게 느껴진다.
아주 조금 더.
내가 얼른 품에서 풀어주자, 에키온의 귀에는 왜인지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끌어안고 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마저도 에키온에게는 놀라웠는지, 혹은 당황한 건지 손조차 뻗지 못했다.
홍당무가 된 얼굴이야, 내가 너무 세게 끌어안았구나 싶었다.
이런, 내 힘을 간과했던 모양이네. 반성했다.
그보다 기쁜 소식이 있지 않던가. 그것도 에키온이 내게 선물해 준 것과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나, 재료 찾았어!”
“…….”
나는 활짝 웃으면서 와르르 쏟아 낸 재료를 가리키고 정말이지 아이처럼 기쁘게 떠들었다.
이건 내가 한 방에 때려잡아서 가져온 거야, 이 깃털은 날렵하게 점프해서 잡았다?
실제 이 세계에서 진짜 아이였을 때도 해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무척 즐거웠다.
아빠는 이제 살 수 있어.
살아날 거야. 그리고 난 널 만났으니 돌아갈 거야.
“이상하지. 널 만난 게 내게 정말 큰 행운이었단 생각이 들어.”
이전 세계를 멸망시킨 게 용 공작이었다. 이 점에 대한 원망은 들지 않았다.
그때도 나는 용 공작 또한 피해자이자 희생양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너도나도 못된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동시에 하나씩 바꾸고 복수하고 있는 거야.
“나는 동지라는 말이 참 좋아.”
“…….”
“아니,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드는 단어는 뭐든 좋은 것 같아.”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에키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고 나서야 내가 귀여운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너무 마구 손을 움직였다는 걸 알았다.
머쓱하게 웃으며 산호처럼 삐죽삐죽 서 버린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칼립소. 좋아?”
뜬금없는 질문에도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응, 좋아!”
나는 조금 장난스럽게 에키온의 젖살 어린 뺨을 꼬집었다.
살성이 탱탱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곧 에키온의 손이 내 손등 위로 올라왔다.
심해처럼 차가운 손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괜찮았다.
“돌아가자. 돌아갈 수 있어?”
“응.”
소년이 천천히 끄덕였다.
“칼립소가 바란다면.”
에키온이 웃으며 속삭였다.
뭐든지.
* * *
눈을 뜨면, 우리가 사라졌던 내 집무실이었다.
“칼립소!”
“여동생님!”
집무실에는 아틀란이며, 아게노르, 레바이와 웨일 등 모두가 함께 모여 있었다.
휘휘 주변을 둘러보니, 떠났을 때부터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듯했다.
“……아빠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아빠를 보고 흠칫 놀랐다.
분명 침대로 옮겼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오자마자 그런 거나 묻는 거냐? 너, 네가 확 사라지고 나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놀라기는, 이미 공유했잖아. 멸종된 동물 잡으러 간다고.”
“그게 무슨, 가주랑 갑자기 사라졌잖아!”
“음, 그래. 둘째 네 입장에선 놀랄 수도 있겠다.”
나도 가주랑 같이 시간 여행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말이다.
나는 달려온 둘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뭘 잃고 싶지 않은지 내가 제일 잘 알아. 하지만 괜찮아.”
“…….”
“난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어.”
내 말에 아틀란이 스르륵 무너졌다. 그대로 얼굴을 짚은 채 하, 한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위로해 주고 싶지만, 미안하게도 급히 해결할 과제가 먼저 있었다.
“……에키온, 가주는?”
에키온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에키온이 도착하면 알게 될 거라고 했지?’
그 탓에 대체 가주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또 어떻게 되는 건지 더는 묻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뒤쪽, 바닥에 누워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기절한 건지 잠든 건지 몰라도, 조금 엉망이 되긴 했지만 평온한 모습이었다.
“죽은 거야?”
“기절했어. 죽일까?”
“…….”
아니, 저 평온한 표정에 순간 빡침이 올라왔지만 분노를 표출할 때가 아니었다.
‘정말 ……이대로 그냥 죽일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저 할머니도 아빠와 같이 기절하면 물의 힘이 강제로 발동해 손대는 자를 공격하기라도 곤란했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의식이 없던 가주를 살해하면, 정당하게 가주 직위를 얻기는 글렀다.
할머니의 약자 도태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상태의 할머니를 죽이면.
죽은 바이얀 혹은 저 할머니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됐어. 지금은 더 급한 게 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아빠부터 치료해야 했다.
‘오히려 가주가 정신을 못 차리는 지금이 기회야.’
그래, 기회다.
아빠부터 살리자!
분명 저 가주가 깨어나면 온갖 요란법석을 떨 거다. 게다가 무례하게 군 나를 그냥 두기나 할까?
‘어떤 꼬투리를 잡을지 눈에 선하지.’
최악의 경우 이대로 쫓겨나는 것도 생각했다.
괜찮다. 어차피 거기까지 감안하고 지른 거였으니.
속 시원했으니 됐어.
어째서인지 에키온 어깨에 올라선 투스가 조금 초조해 보였다.
입을 뻐끔뻐끔하는 게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에키온이 투스를 바라보자,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가주가 기절한 사이에 아빠부터 살리자. 릴리는?”
“저기 있습니다, 공녀님.”
레바이가 설명했다. 릴리는 아빠의 기력이 더 떨어지지 않게 애쓰다가 잠들었다고.
“다친 곳은 없고?”
“예, 기력을 소진해서 잠든 것 같습니다.”
“……고생이 많네. 어린애가.”
아무리 자기 선택이라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이건 꼭 갚아야겠어.
“레바이, 들었지? 아빠를 살릴 건데 재료는?”
나는 말하다 말고 이리 물어볼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아빠 근처에 가지런히 정리된 수많은 재료. 분명 레바이의 솜씨였다.
나는 이에 품에 가득 안고 있던 재료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정말로 가져오신 겁니까?”
“어.”
나는 내가 가져온 걸 하나씩 설명했고, 레바이의 낯에는 연신 놀라움이 스쳤다.
이대로 모두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 이렇게 진행 가능하냐고 물었을 때.
레바이의 얼굴은 딱딱하기만 했다.
“죄송하지만…… 재료가 완전히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뭐?”
레바이는 본인도 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심각하고 쓰린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희망하신 기간은 2년이셨지요.”
“할머니 창고를 털었다며? 게다가 멸종된 동물 재료는 내가 다 가져왔잖아?”
“예, 가장 어려운 재료는 다 모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재료가 모인 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완벽하게 모여야만 치료가 가능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든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창백해.’
의술을 모르는 내가 봐도 심각해 보였다.
게다가 감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 꼭 해야만 한다고.
“그래도 해야 돼.”
“……공녀님.”
사실 레바이도 원해서 나쁜 소식을 전한 건 아닐 터였다.
하지만.
“해. 한다고 했어.”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기회가 또 없을 거야. 아니, 그럴 것 같아.”
“……감입니까?”
“그래. 감이야.”
레바이는 내 말을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치부하지 않았다.
“칼립소.”
그때였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웨일이 손을 들어 올린 채였다.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웨일?”
레바이와 내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으로 웨일을 응시했다.
곧 내 쪽에서 먼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어떻게?”
“알려 줄 테니까…….”
웨일이 잠깐 방을 훑는 듯싶었다.
“잠깐 나랑 둘만 이야기하자.”
어딘가 굳은 결심을 한, 진중하고도 덤덤한 얼굴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