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변명하자면 나는 좀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 정도야 뭐. 싶었던 것이다.
물론 아빠가 반응이 없으리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생각했고…….
대가는 혹독했다.
“……뭐?”
“아, 말이 좀 이상했지. 정확히는 신랑이 생겼어.”
이미 아빠의 목소리에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내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다.
“다시.”
……그리고 나는, 아빠가 진정 화가 났을 때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잠깐, 잠깐만 아빠! 아빠 스톱! 물의 힘을 바로 그렇게 쓰면…….”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듣고 싶은데.”
등골이 오싹해졌다. 방을 가득 지배한 물의 힘.
‘아빠가 완쾌되었다는 신호를 이렇게 보고 싶지는 않았어!’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그간 병으로 얼마나 억압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지만.
역시나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20년쯤 잠들어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음. 잠들었던 시간이 한 삼 일쯤 되나?
“그, 그렇지? 아니, 아빠. 스승님. 아니, 아빠! 일단 힘부터 빼고 얘기해. 또 아프면 어쩌려고!”
“내 평생 이토록 몸이 가벼웠던 건 처음이니, 편히 이야기해도 좋다.”
……틀렸어. 말이 통하지 않아.
그 외에도 수없이 아빠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결국, 나는 단 10분 만에 아빠에게 백기를 들었다.
다음으로 부스스 일어난 에키온과 눈을 마주치고는,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등 뒤로 더욱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만 같았다.
* * *
오래전 지구에서 당시 아빠가 남자 친구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렇게 말한 적 있었다.
“우리 시은이 남자 친구는 아빠의 시험 백 개쯤 통과해야 돼. 알았지?”
그때는 그저 웃고 넘어갔고, 또 그 후로 내가 이성적으로 누군가와 엮인 적이 없었기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갔지만.
‘사실 아빠들은 누구나 딸의 이성 문제 앞에서 이렇게 변하는 걸까?’
아니지. 이건 성급한 일반화다.
그렇다면 음, 지구에서의 아빠나 지금 이 세계에서의 내 아빠나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게.
사실 조금 묘한 기분이긴 했다.
물론, 지금 내가 아빠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은 상황과는 별개로 말이다.
‘제자로 훈련받을 때 이후로 이런 자세는 또 처음인데 말이지.’
나는 푹신한 카펫, 그 위로 몹시도 폭신폭신한 방석까지 깔린 자리에 얌전히 앉아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빠가 심상치 않은 낯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이 카펫이며 쿠션이며 모두 아빠가 준비한 것이긴 했다만은……. 아빠의 눈빛만은 차디찼다.
아빠가 지그시 노려보는 건 내가 아니었다.
졸지에 눈을 뜨자마자 내 옆에 앉게 된 웨일 쪽이었다.
그리고 아빠 옆에는 레바이가 차가우면서도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정중하게 서 있었다.
‘혹시, 이게 상대편 집에 인사드리러 가는 기분인가.’
……아닌 것 같다.
그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할 리가 없잖아.
‘그, 결혼은 대체로 행복하려고 하는 거니까 이런 자리도 좀 하하호호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이 세계는 정략혼도 만연하니 꼭 그렇다고 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웨일에게 몸이 괜찮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손을 살짝 들고 말했다.
“레바이, 웨일은 찬 데 앉아도 돼? 몸은 괜찮은 거야?”
“웨일의 몸은 아주 괜찮습니다. 공녀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흰수염고래의 몸은 매우 튼튼합니다. 정말 튼튼하다 못해 건강하니 걱정 붙들어 매시지요. 오히려 공녀님께서 걱정하실 건 이쪽이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
음, 괜찮은 거군. 다행이다.
그래도 인정은 있는지 웨일이 앉은 쪽에도 방석을 깔아주었다.
내 거보다는 얇은 것 같지만 말이다.
“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웨일과 공녀님께서 맺어 버린 그 관계.”
“부부 말이야?”
“……예.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혼이나 부부 관계랑은 조금 다르지만 아무튼, 예.”
“그거, 어떻게 물리는 거지?”
“물리, 예?”
레바이가 막 설명을 하려던 찰나에 불쑥 아빠가 개입했다.
레바이가 제 안경을 추켜 올렸다.
“……일단 물리는 방법은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아빠의 얼굴이 더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차라리 다시 아픈 게 낫겠군.”
“그런 말 하지 마, 아빠.”
내가 고개를 홱 들고 노려보았다. 이를 꾹 깨물면서.
“그런 말 한 번만 더하면 아빠라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
아빠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얼른 다시 고개를 내렸다. 음, 제자로 살던 때가 생각나고 좋은걸.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슬쩍 입을 열었다.
“음, 신중하지 못한 방법으로 보일 수 있는데, 그땐 방법이 없었어. 이것 말곤 다른 수가 없었단 말이야.”
“…….”
“반대로, 내가 쓰러졌다면 아빠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거잖아?”
어차피 똑같이 사랑하는데 눈치 볼 필요 있나?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래서 제가 애지중지 키워 온 가족을 홀라당 잡아드셨습니까?”
“엥, 잡아먹다니…… 단어가 좀 상스럽다, 레바이?”
나는 찔끔하면서도 레바이에게 응수했다.
“확실히 서로 동의를 했다기엔, 네가 뭐라 할 수 있다고 봐. 미성년자는 아무래도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야 할 게 있으니까.”
“하아…… 너무 잘 아시는 분이 그러셨다는 거군요. 문제는, 제가 중간에 알았다고 한들. 웨일의 고집을 꺾진 못했겠지만 말입니다.”
“맞아. 형. 나 행복하게 살게.”
웨일이 눈치 없게 한마디 얹었다. 가만히 있을 것이지.
레바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음, 아주 훌륭한 범고래판인걸.
육지 동물 용어로 말하자면 ‘개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칼립소, 어찌 됐든 목숨을 빚지게 되었으니, 내가 할 말은 없겠지만. 한 가지만 이야기해 두고 싶군.”
한참 살벌하던 아빠가 돌연 표정을 풀어내며 부드럽게 물었다.
어째 나는 앞에서 입을 벌릴 준비를 한 채 태연한 척하는 범고래를 보는 기분이었지만.
순순히 아빠에게 대답했다.
“그게 뭔데?”
“한 가지만 부탁하고 싶다만. 그럼 이 관계에 대해선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
“그게 뭐길래?”
“들어준다면, 얘기하고 싶은데.”
“안 듣고 안 들어주면?”
“상상에 맡기지.”
음, 저 아빠가 나를 괴롭힐 리는 없고, 웨일이 괴로워질 모양인데.
나는 아빠에게 그런 역할을 맡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웨일이 그런 괴롭힘을 받길 바라지도 않았다.
설마하니 아빠가 내게 해가 될 약조를 시키겠나 싶어 천천히 끄덕였다. 단, 조건을 덧붙이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진 몰라도 웨일의 몸에 해가 되거나 저 애가 아픈 게 아니라면.”
“절대 아닐 거라 약조하지.”
나는 결국 아빠의 이야기를 수락했고, 아빠는 그제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어찌 보면 예상했던 이야기기도, 한편으로는 조금 의외롭기도 한 이야기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두 사람을 묶어 둔 맹약인지 힘인지 하는 걸 풀어낼 방법을 찾지. 찾으면, 쓰겠다고 약조하겠나.”
“그건…….”
“너는 혼인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
“그, 그렇지?”
“그렇다면 더더욱 이렇게 해치울 일은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지…….
“너는 굳이 정략혼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가주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나?”
“맞아.”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결혼은 딱히 추천하고 싶지 않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나는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어쩐지, 본인의 경험이 묻어 나오는 말이었으니까. 아니, 백 퍼센트 경험이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나?’
줄곧 옆에서 보며 느낀 건데, 적어도 아빠는 엄마에게 관심이 있었다.
아빠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엄마 이야기를 할 때 본인도 모를 애틋함이 묻어 나온다고.
이것이 애틋함인지 몰라, 최근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말이다.
“……피에르 님!”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웨일이 고개를 들고 무어라 말하려 했다.
나는 웨일의 손을 붙잡아 제지하고는 말했다.
“나도 동의해.”
사실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사는 건 이렇게 얼렁뚱땅 해치울 일이 아니지.
나야 가족을 구하는 이득을 보았다지만, 웨일이 얻은 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빠. 그럼 만약 아빠가 정말로 수단을 구해서 우리를 묶고 있는 힘이 풀렸고. 그 후에도 웨일이 내가 좋다고 한다면.”
“…….”
“그때는 우리 의사에 맡기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