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진짜? 우리 모친이 살아 있다고?”
“그렇다니까. 너도 왜 믿질 못하냐? 너도 진짜 아빠의 넋 나간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그 모습은 충분히 봤어.”
“언제?”
“네가 긴 잠에 빠져들었을 때.”
윽, 아픈 곳을 찌르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우리는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젯밤, 낮부터 밤까지 기나긴 대화를 나눈 아빠의 기세는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몇십 년 만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를 만난 사람이 아니라.
마치 빚쟁이를 발견한 사채업자 같은 느낌이었달까.
“어느 책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던데. 딱 그 짝이야.”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그런 게 있단다. 둘째야.”
그리고 마침내 본성에 돌아왔을 때.
나는 꽤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반란?”
나와 아빠가 없던 사이, 본성에서 반란이 일어났었다고.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반란을 막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오큘라 아콰시아델.
내 할머니였다.
* * *
사실 반란 자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나는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고 몇 번이나 이를 방관했다.
‘하나하나 소탕하느니 한 번에 모아서 치우는 쪽이 깔끔하니까.’
할머니의 치세가 워낙 길었던 탓에.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가주 자리에 내려온 것을 두고 말이 참 많았다.
아빠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이들도 꽤 되었다.
아빠는 필요하면 응징을 가했지만, 몇몇 이들은 방관했다.
강성 할머니 지지자들.
즉, 약육강식을 아직도 외치는 자들이었다.
사고방식을 뜯어고칠 수 없는 놈들은 밑에 둬 봐야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이번에 상어들의 마지막 본거지를 토벌할 겸, 놈들이 나설 수 있게 나와 아빠, 그리고 벨루스에 아틀란까지 자리를 비웠다.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도록 아게노르를 책임자로 두기까지 했으니까.
그놈들에겐 절호의 기회였을 터다.
그리고 일은 일어났다.
반란을 시작한 자들이 믿는 구석도 없이 날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단 본성을 차지한 뒤에 유배 간 내 할머니 오큘라 아콰시아델을 데려와 다시 가주 자리로 올릴 예정이었던 듯했다.
‘웃기지도 않네.’
속이 빤했다.
독재자는, 독재라는 권력을 단 한 번이라도 잃는 순간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할머니가 저들의 힘으로 가주 위에 오른다고 한들 예전 같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까.
‘뭐, 그래도 권력욕이 있다면, 복수를 생각하고 있다면 최적의 기회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 반란을 제압한 자가 내 할머니란다.
반란의 주범은 할머니의 손에 명을 달리하거나 붙잡혔다.
그놈들은 죽지는 않았지만 사지가 멀쩡하진 않았다.
도착했을 때 듣기로는.
“남은 잔당을 불려면 입이 하나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했다던데.
‘이것 참…….’
그리하여 내가 홀에 도착했을 때 꽁꽁 묶인 피투성이 범고래 방계 가주들을 보게 되었다는 소리다.
나는 자연스럽게 가주의 자리에 앉은 채 저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빠가 함께 있었으나, 아빠는 자연스럽게 내 뒤에 섰다.
대체 엄마와 어떤 이야기를 한 것인지. 당장이라도 황무지로 달려가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거기 더 있다 오지.
그건 또 한사코 싫다고 하더니, 저 모습이셨다.
일단 이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까지 꽁꽁 묶여 있는 반란 주동자들 앞에는 얌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노인이 있었다.
나이가 있음에도 여전히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오큘라.”
직위를 박탈당한 전 가주를 할머니라 부를 수는 없다.
너무 다정하지 않은가?
“왜 유배지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 있지?”
오큘라 옆에 서 있던 아게노르가 당장이라도 무언갈 말하고 싶은 듯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셋째놈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고개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들어 봐.”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척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는 듯.
눈빛만은 형형했다.
저쪽 또한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더 강해지셨군요.”
“아부는 그게 다야?”
나는 피식 웃었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데.”
물러난 가주는 현 가주에게 말을 높여야 한다.
저 사람에겐 참 힘든 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자연스러웠다.
신기하게도 늙은 기사 같은 느낌마저 드니.
어쩌면 머나먼 과거에는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모친을 섬겼겠구나 싶기도 했다.
“왜 여기 있지? 두 번째로 묻네.”
“유배지에 있는 동안 은밀한 연통이 도착했습니다.”
할머니가 말하는 이야기는 내가 아게노르에게 일찍이 먼저 들었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유배지에 있는 할머니에게 반란 주동자들이 접촉했고.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척하다 모든 인원이 모였을 때 척결했단 소리였다.
“왜 거절했지? 당신에겐 좋은 기회였을 텐데.”
범고래 본성은 좋은 요새였다.
성을 차지해서 성의 인원들을 인질로 잡고 수성했다면 우리로서도 쉬운 싸움이 아니었을 터다.
“쭉정이들 손에 올라가란 말씀입니까?”
오큘라가 이를 부득 갈았다.
“지는 해는, 지는 해로 두어야 하지.”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또한 져 버린 해는 고꾸라지는 게 정상입니다. 순리를 거스를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은 참 양면적이다.
약육강식도 사실은 자연의 순리이고 법칙이었지.
이에 따라 이미 늙고 패배해 버린 자신이 역행할 생각은 없단 소리 아닌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내가 가만히 내려다보다 끄덕이자,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거지 소탕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유배지에서 나온 건 명백한 잘못이니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9년쯤 보지 못했던가.
“그래. 일단 유배지로 돌아가서 벌을 계속 받도록.”
할머니의 유배지는 그녀가 죽인 사람들의 가족이 사는 마을로 했다.
모든 사실을 알려 주고 그곳으로 이동한 유족도 있고, 할머니의 이동 사실을 알고 치를 떨며 떠난 이도 있었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온갖 노역을 하고 있었다.
가주일 때는 생각도 못 한 비천한 일과 때로는 수치스러운 노역까지도.
“어때요, 참회는 쉽지 않죠?”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려다보았음에도, 할머니는 무표정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받아야 할 것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 받아야 할 것 또한 있단 걸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유배지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저보다 훌륭한 가주가 되시겠군요.”
그녀는 이 말과 함께 허리를 깊이 숙였다.
나는 돌아가는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참회하세요. 누군가 돌을 던지면 그냥 맞고 욕을 하면 욕을 먹어요.”
억울하게 죽은 이들. 희생당한 이들. 모든 죽음을 짊어진 채 살아야 할 것이다.
죽음보다 못한 삶을 잘 안다.
“견디고 견디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할머니라 불러드릴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긴 잠에 빠져들었을 때, 저 사람의 편지를 처음 받아 봤다.
물론 눈을 뜨고 확인했지만.
내용은 간결했다. 괜찮냐는 말 한마디였는데, 아주 어렵게 쓰인 듯 종이는 잔뜩 구겨져 있었다.
“……제겐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할머니는 돌아서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아게노르만이 나중에 슬쩍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세상에, 여동생님. 나 못 볼 꼴 봤다. 울고 있던데?”
“…….”
“나는 그 할머니가 울 줄 아는 인간인 줄 처음 알았네.”
나는 작게 웃었다.
“나이가 들면 눈물샘이 약해지나 보지.”
정작 60년 넘게 살아온 나는 안 그랬던 것 같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했다.
* * *
일주일 뒤.
모든 것이 평화로운 지금 나는 상어를 때려잡을 때보다 더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미뤄 왔던 가주 계승식을 치렀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 만한 이들은 모두가 내가 원래 내 것이었던 가주 위를 돌려받았다고 알고 있지만.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외친 누구 누구들 때문에 퍽 성대하게 계승식을 치른 것이다.
‘아이고. 삭신이야.’
하루 종일 훈련하는 건 전혀 힘들지 않은데, 예식에서 온종일 서 있는 건 왜 힘든 걸까.
“가주님께서 피에 미쳐서 그렇습니다.”
“……하우저, 진지하게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다.”
“예?”
넌 진심이겠지만, 같이 듣는 애들은 미친놈 보듯이 보고 있지 않냐고.
오늘은 회의 날이었다.
회의에는 여러 중신들이 앉아 있었고, 하우저의 발언을 들은 이들이 놈을 노려보거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에 아빠는 없었다.
계승식이 끝나자마자 엄마를 잡으러 갔기 때문이었다.
‘잡으러 갔다고 하니 표현이 좀 그런데……. 쫓아갔다? 찾아갔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기엔 기세가 엄청나긴 했지.
그제야 아빠가 계승식을 위해 함께 돌아와 준 거란 걸 알았지만.
‘부모의 일은 부모님께 맡겨 두고.’
단란하게 회의나 시작해야겠다 싶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조금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 가주님…….”
허락하에 들어온 시종이 조금 떨리는 손으로 내게 뭔갈 내밀었다.
“황실, 에서 초청장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