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같은 날 밤.
나는 자기 전에 침대에 앉아 등받이에 기댄 채로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황실, 에서 초청장이 도착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회의실은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다.
하기야 다른 곳도 아니고 황성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정확히는 황실에서 새로운 가주의 등장을 축하하며.
황실에서 축하연을 열어 줄 테니 한번 인사 오라는 초청장이었다.
“개소리하네. xx새끼들.”
초청장 내용을 읽은 아틀란이 한 말이었다. 동감했다.
내 가주 위를 축하한다?
그냥 함정이었다. 그것도 잘 파 둔 뒤에 대놓고 살랑살랑 흔드는.
아귀의 초롱불이나 다름없는 성의 없는 미끼.
아빠가 가주에 올랐을 때는 아무런 연락도 없던 주제에.
내가 올랐다고 하니 보낸 걸 보면 알 만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지.’
나는 모두가 경계하거나 혹은 분노하는 속에서 홀로 차분했다.
“준비해.”
“네? 가주님!”
“제대로 들어. 모든 인원 움직일 준비하라고.”
모든 인원의 준비.
이 뜻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런 자는 회의실에 들어오지 못했을 테니까.
이미 나는 긴 잠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찾아올 전쟁을.
마음에 걸리는 상어 새끼들이나, 본성에 남아 있던 잔챙이들을 쓸어버린 지금. 더는 걸리는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초대는 화려하게 되갚아 주겠다.
물에 푹 젖어 찢어지는 초청장을 바라보며 한 생각이었다.
끼이익.
여기까지 떠올리는 동안 테라스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났다.
흔들흔들. 테라스 문 사이로 누군가 조용히 들어왔다.
“좀 늦었네.”
문틈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용 공작이었다.
나는 잠시 용 공작을 응시했다.
“잠시 산책을 했다.”
“그런 것 같더라.”
내 방 테라스 바로 아래에서 움직이는 기척은 계속 느끼고 있었다.
아니, 아예 물줄기를 저 공작에게 붙여 놨던지라, 무슨 일이 있었으면 모를 수가 없었을 거다.
“일찍 자.”
이미 일찍 자기엔 그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용 공작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얌전히 내 옆자리에 누웠다.
“눈 감고 얼른 자.”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르륵 눈을 감았다.
나는 용 공작을 빤히 보았다.
‘황태자 놈이 초청장까지 보낼 정도로 몸이 달은 모양이네.’
이런 순순한 모습에서 에키온을 겹쳐 보았다.
나는 등을 기댄 채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바빠질 터다.
수면 보충은 필수였다.
* * *
시간의 틈에서 우린 참으로 바빴다. 그저 들어가서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으면 되는 줄 알았건만.
콰아앙!
“이제 그만 말 좀 해 줘, 투스. 혹시 시간의 틈은 아포칼립스의 또 다른 말이니?”
-투스, 그거, 무슨 말인지, 몰라!
“뭐냐고?”
나는 달려오는 거대한 존재를 보면서 이를 부득 갈았다. 주먹을 붕붕 돌렸다.
“X 같다는 이야기지!”
원심력 펀치!
내 주먹을 받은 존재가 끼에에엑 울더니 그대로 스르륵 흩어졌다.
검은 안개로 만들어진 괴물이었다. 이젠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너무 흔하게 봤기 때문이었다.
-칼립소, 멋져!
“조용히 해.”
나는 숨을 몰아쉬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곧 숨을 모두 내쉰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의 틈에서는 땀도 나지 않았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지치지도 않는다던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고.
내가 저벅저벅 걸어가자 그 끝에선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둥근 등이 휘어져 있다가 몸을 휙 돌렸다.
“칼립소!”
“오냐, 용용아. 나 왔다.”
나는 에키온 옆에 털썩 앉았다.
에키온도 꽤 바빴던지, 주변에 검은 안개 흔적이 보였다.
검은 괴물들이 사라졌을 때 잠시간 남기는 흔적이다.
시간의 틈에 막 들어왔을 때만 해도 평화로웠지만.
머지않아 저놈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이 공간은 어둡고 축축한데다 언제 그림자 속에서 좀비 같은 괴물이 툭 튀어 나갈지 모르는 환경이 되었다.
‘내가 육아물에 태어난 건지, 아포칼립스물에 태어난 건지. 쯧.’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에키온이 눈치를 살짝 보고 있었다.
사실 시간의 틈에서 이렇게 공격해 오는 놈은 어쩔 수 없는 거란다.
용이 이곳에 있으면 호시탐탐 잡아먹으려 드는 놈들이라나?
그에 반해 용은 성장할 힘을 충전할 때까지 이놈들을 쓰러트려 가면서 버텨야 하는 거고.
혹시나 잡아먹히면 어떻게 되는 거냐 물었더니.
그럼 이번 대의 용은 죽는 거고 세상엔 다음 대 용이 탄생하는 거란다.
‘참, 덧없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외로이 눈을 감을 수도 있다니.
“모든 용은 이 외로운 곳에서 늘 홀로 보내는 거야?”
“……개체, 차이는 있지만. 응.”
반드시 이 공간을 거쳐야만 성장을 할 수 있다나.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성장해야 하는 거야?”
다른 수인들은 기다리면 알아서 쑥쑥 크잖아?
다루는 힘이 남달라서 그런가?
에키온은 가만히 대답했다.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렇구나.”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응시했다. 원한다면 잠을 자지 않고도 졸리지 않는 세계.
죽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공간.
문득 내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알아줄 사람 하나 없는 건 나랑 비슷하네.”
“…….”
“회귀자인 내가 몇 번을 죽든 누군가에겐 단 한 번의 죽음일 테니까.”
괴물은 일정 시간마다 나타났으므로 괴물마저 없는 시간은 참으로 고요했다.
그래서 문득 사색에 잠기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용은 지난 회차를 기억하지 못하니?”
“…….”
가끔은 궁금했다.
너는 내가 3회차에서 겪은 시간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나?
에키온은 대답 없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 * *
-용 공작님! 무언가 들어왔어요!
사람들이 흔히들 오해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용 공작의 세대교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고 알고 있단 점이다.
물론 그 말엔 틀린 점이 없지만 정확하게는 자연스럽게 교체되는 시점이 있었다.
이는 태어난 개체마다 부여받은 시간이 다르며.
이번 대 용 공작으로 태어난 개체 ‘에키온’은 유독 부여받은 시간이 길었다.
아주 길었다.
문제는 이는 자연스럽게 교체되는 시점이므로, 이 사이에 용 공작이 타인에게 살해당하거나 자살하거나.
혹은 외부에서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로 인해 시간이 돌려지더라도.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는 시기는 바뀌지 않는단 소리였다.
용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관리하는 시간에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인가?’
문제는 에키온이라고 하여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
그는 칼립소가 한 번 회귀한 뒤, 두 번째 삶을 살 때쯤에야 칼립소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칼립소가 막 죽음에 이를 즈음에야 이를 알아차렸고, 시간은 되돌아갔다.
자신이 관리하는 곳에 나타난 시간의 법칙을 무시하는 회귀자.
이따금 다른 곳에서 온 영혼이 일으키는 부조화다.
3회차가 시작됐을 때, 에키온은 그저 눈감아 무시했다.
기록상으로 이런 이질적인 존재는 용 공작이 직접 제거하는 모양이기도 하지만.
에키온에게는 그런 의욕이 존재하지 않았다.
회귀자가 시간을 돌리기는 했지만 에키온은 어차피 되돌려지는 시간을 가뿐히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아주 오랜 시간을 용 공작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어디서 고대 기록을 읽고 나타난 황실이 시비를 걸긴 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3회차는 이상하게 돌아갔다.
어디서 고대 기록을 읽고 나타난 황실의 황태자.
이놈이 문제였다.
운명은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지 않았다.
세계에는 이따금 조금 더 빛나고 조금 더 많은 걸 거머쥔 영혼이 있었으며.
하필 황태자는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영혼이었다.
“아하하, 하하하! 용이여! 모든 것을 멸망시켜 버려라! 내가 가지지 못할 거 모두 다 죽어 버려!”
그 황태자가 설마하니 자신의 빛나는 운명을 버려 가면서까지 자신을 폭주시킬 줄 몰랐단 것.
이것이 에키온의 패착이었다.
폭주해 버린 에키온은 꼼짝없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에 바빴다.
이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미 본능대로 폭주해 버린 몸을 말릴 수 없었다.
심지어 폭주를 일으켜 버린 황태자마저 그의 손에 명을 달리했다.
에키온은 처음으로 지루함과 권태 속에서 짜증과 환멸을 느꼈다.
회귀자가 있으니 시간이 반복될 것이다.
그럼 자신은 또 한 번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단 말인가?
돌아가면 고대 기록을 싹 없애 버려야 하는가.
용은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세계에 도움이 된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에너지 덩어리. 그게 바로 용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돌아가면 황태자는 자신이 한 짓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한번 일어난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에키온은 멸망의 끝에서, 마침내 자신이 묵인했던 회귀자를 눈앞에서 마주했다.
“하……. 서울이네?”
자신을 앞두고도 두려움 하나 보이지 않던 여성이었다.
피가 얼굴을 적시고 있었지만 푸르른 두 눈만큼은 형형했으며 선명했다.
그녀는 에키온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멸망의 주체.
에키온을 응시했다.
“당신도 힘들겠다.”
피로 얼룩진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나처럼 피해자일 뿐인데.”
에키온은 멈칫했다. 아니, 그의 이성만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실제로 그의 몸은 착실하게 멸망을 수행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아주 외로웠거든. 이제야 좀 소중한 사람이 생겼더니 왜 이 모양일까…….”
느긋하게 웃는 얼굴은 죽음이 두렵지 아니하여 보였다.
“다음 생에…….”
회귀자이기 때문인가?
에키온이 그저 편하게 살게 내버려 둔 회귀자는 신기하게도 마이너스에서 운명을 극복한 채 기어이 빛나는 고지까지 올라와 버린 영혼이었다.
……흥미가 생겼다.
“또 만나자.”
스스로 멸망을 마무리 짓는 찰나, 에키온은 해선 안 될 호기심을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영혼을 이겨 버린 회귀자.
네가 주인공인 세계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잠시의 호기심과 흥미의 대가는 적지 않았다.
에키온은 시간이 돌아가는 그 순간 단지 이를 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힘을 빼앗겼다.
원인을 찾자면 조금 전까지의 폭주로 인해 힘을 통제할 수 없었고.
생애 처음으로 느낀 호기심과 흥미에 방심해 버렸다.
그에게서 빠져나간 시간의 힘이 다음 회차에 스며 버렸다.
이 탓에 회귀자가 아님에도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생겨 버렸다.
그가 방심하여 회귀자에게 자신의 힘의 터럭을 주고 말았기에.
그의 힘은 더는 외롭고 싶지 않다는 회귀자의 소망을 이루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