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황실의 전령도 현재 ‘매드럼’으로 가고 있다고 하네요.”
이야기가 빠르다. 결국 이쪽을 치면 황실의 치부가 나온다는 소리일 터.
‘원숭이라…… 전생부터 매우 거슬리는 놈들이었지.’
놈들은 마지막까지 용의 폭주를 도왔고, 거기에 제 생을 모두 갈아 넣고 멸망했다.
마지막까지 미친 과학자들 같은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말이죠.”
나타샤가 지도를 물렸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 말씀하시죠.”
“내 복도에서 어여쁜 남자를 울리던데.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뱀 가문 가주의 눈이 휘어졌다.
“사랑싸움인가요?”
야살스럽게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나는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해하진 말아요. 이 성의 특수한 기능 때문에 어쩌다 알게 된 거니.”
“감시는 아니었다?”
“결백하답니다. 땅의 맹세라도 할까요?”
나는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처음엔 여유롭게 넘기려 한 듯 싱글싱글 웃던 나타샤의 얼굴이 점차 굳어 가기 시작했다.
내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와 투기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가 항복을 선언했다.
“……특수한 기능은 이 성의 아주 중요한 기밀이에요.”
“…….”
“알았어요, 알았어요. 3초 정도 원하는 곳을 볼 수 있답니다.”
“그뿐?”
내 질문에 나타샤는 또 한 번 식은땀을 흘리더니, 기어이 땅의 맹세를 하고 나서야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어리니 경험은 물론 언변과 대응력도 일천할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요.”
“넘어갈 걸 넘어가야죠.”
“흐음.”
이 사람 웃기네. 나더러 근육만 있는 바보인 줄 알았다고 말하는 건가.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낸 순간 넘어갈 거라 생각한 게 우스운 거지.”
“…….”
“그래서 실없는 소릴 꺼낸 이유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에요.”
나타샤는 언제 기세에 눌려 땅의 맹세를 했느냐는 듯 턱을 괴었다.
당황은 잊고 목적을 취한다.
확실히 이쪽도 오래 버틴 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여유가 돋보인다.
“남자는 울고 당신은 단호하기 그지없으니. 혹시나…… 내부 분란이라도 있나. 궁금하지 않겠어요?”
“사랑싸움이냐면서요?”
“그 생각도 했지요.”
“그럼 사랑싸움이라 치죠.”
실없는 소리에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
내가 단호하게 흘려넘기자, 나타샤가 눈을 슬쩍 크게 뜨더니.
이내 흥미롭다는 듯 다시 웃었다.
“당신이 용을 품에 끼고돈다기에, 당연히 그쪽이 연인인 줄 알았더니. 하나가 아니었군요?”
“어째서 생각이 그쪽으로 가는 거죠?”
“그럼요?”
“한쪽이 차인다거나……. 아니, 그만두죠. 내가 왜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어머나, 허물없이 사시는 가주님인 줄 알았더니, 선이 분명하네요.”
“남에겐 그렇죠.”
너 내 편 아니잖아? 일시적 동맹이지. 이런 눈을 했더니, 나타샤가 샐쭉 눈을 찢었다.
“당신은 릴리를 아끼지 않나요?”
“…….”
“나도 자그마한 그 애를 참 아낀답니다. 그러니 우린 한편이 될 수 있죠?”
릴리를 이 뱀의 영지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모셔 두고 있을 정도라 말하면서. 나타샤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 애가 당신을 보고 싶다고 어찌나 난리인지.”
“잘하셨어요.”
“네?”
“황실이 그 애를 볼 수 없게, 숨겨 둔 거죠? 그래서 나도 볼 수 없는 거고.”
“…….”
릴리에겐 참으로 다행이었다.
뱀의 영지에서 눈칫밥 먹고 살고 있었다면 확 데려오려 했는데 말이지.
“뭐, 좋아요. 칼립소, 당신에게 더 흥미가 생기네요. 우린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친구는 쌍방이 동의해야 되는 거죠.”
“하나만 대답해 준다면 나는 마음을 더 열 수 있을 것 같아요, 범고래 가주.”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건데요?”
뱀 가문 가주는 필요한 정보를 아낌없이 공개했고, 우리가 도와줬다고는 하나 대우도 아주 극진했다.
게다가 그 누구도 우릴 차별하는 시선으로 보는 놈이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 팔라야 놈에게 아직 편견이 남아 있었음에도.
이 영지와 가주가 꽤 흡족할 만큼.
“그래서 당신 연인은 누군가요? 역시 다수인가?”
“……대화는 여기까지 하죠.”
……다음 순간 차게 식었지만 말이다.
“어머나, 사내들도 외설스러운 이야기로 친목을 다지는데, 우리라고 뭐가 어렵나요?”
“언제부터 연애가 외설스러운 이야기가 된 거죠? 뱀들의 세계는 그런가요?”
“세상에. 그런 편견을. 하지만 다르진 않을지도요. 우린 암컷이 여러 수컷과 어울리는 게 흔한 일이어서요.”
“…….”
내가 눈썹을 찌푸리는 사이, 나타샤가 활짝 웃었다.
“뱀의 짝짓기 본 적 없나요?”
“그걸 내가 왜 봐요?”
황당했다. 그러자 나타샤가 ‘수인 말고, 동물요’ 하고 정정했다.
“암컷 한 마리에 여러 수컷이 달려들기도 하는 동물이 바로 우리랍니다. 사람이라고 다르겠어요?”
“애석하지만 범고래는.”
“이상하네. 내가 50년 전에 본 범고래 가주는 남편이 셋이던데?”
“……당신 대체 몇 살입니까?”
“호호.”
나타샤가 육지 거북 가문 수장보다는 어리다며 내숭을 보였다. 내숭이 아닌 것 같은데.
“뭐, 나이가 많아 남의 연애에도 주책 부린다고 생각해요.”
나타샤의 새하얀 손이 휙휙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냥 궁금했긴 했거든요. 당신의 데려온 수하들, 그들 중에서 당신의 형제와 당신의 사촌만 제외하면 모두가 당신을 열렬히 바라보니. 어찌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걸 오지랖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르신.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세상에는 단 하나만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자의든, 타의든.”
“…….”
“어린 가주님, 당신은 분명 나보다 강하고 왜인지 경험도 출중한 데다. 어쩌면 나보다 현명할지 모르겠으나.”
“…….”
“왜 복도에서 당신은 미숙한 어린아이 같아 보였는지. 그저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나는 가만히 나타샤를 보았다.
가녀린 체구. 분명 눈매가 전혀 다르건만 지켜보고 있으려니 내 첫 스승이자 생모인 시저가 떠올랐다.
“그래서 연애 상담이라도 해 주겠단 겁니까?”
“원한다면, 어렵지 않죠.”
나는 그저 웃었다.
“정말 이곳에 와 들은 소리 중에서 가장 웃기는 소리네요.”
* * *
매드럼으로 가 버린 자들의 추격이 꽤나 급해진 시점.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떠나기로 했다.
악어들의 문제가 해결된 데다가, 아틀란과 벨루스, 리리벨이 순찰했을 때.
더는 황실의 끄나풀을 찾을 수 없었던 점이 한몫했다.
“앞으로 아콰시아델에서 올 우리 본대도 뱀의 영지를 통해 올라오기로 전달했어.”
“그래.”
“뱀 가문 가주가 이렇게까지 협조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몇몇 사람을 들이는 것과 아예 병력을 도시에 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하늘과 땅 차이다.
도시 내 구조를 보여 주는 것에서 이르러, 수중 동물 병력을 받아 준 것만으로 황실에 반기를 든 걸로 취급당할 수 있으니까.
지금의 황태자라면 아무렇지 않게 반역죄도 내릴 수 있을 터다.
‘매드럼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 후에 쓸어버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뱀 가문 가주가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하나뿐인 친구한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던데.”
“어엉?”
잠자코 듣고 있던 아틀란은 물론 보고하던 벨루스조차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친구 먹었냐? 그, 나이 많다던데? 할망구 아니냐.”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 뭐 이런 거 맺기로 했어.”
“……며칠 만에?”
며칠은 무슨, 하루 만이다.
“연애 상담할 정도면 아주 절친이라던데. 나타샤가.”
“허, 언제 이름도 부를 만큼 친해졌냐?”
아틀란과 벨루스는 이상하게 보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눈치였다.
리리벨은 어째 ‘우리 가주가 또 또라이 한 건 했군’ 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며.
나머지는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무튼간에 출발하자.”
매드럼으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증거 확보는 물론 지워 버릴 수 있도록.
* * *
“죄송합니다, 소장님……!”
안경을 낀 남자는 말없이 무릎을 꿇은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덩치가 매우 커, 전사인가 싶을 정도였지만.
얼굴에 쓴 커다란 안경이 이지적이다 못해 광기마저 엿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도 그는 전사가 아니라 학자였다. 아니, 연구자였다.
도시라고 부르기보다는, 도시 규모의 거대한 연구소라 불릴 수 있는 ‘매드럼’의 총괄 소장.
고릴라 수인 ‘로랜드’였다.
“정체도 들키고 ‘샘플’도 확보하지 못했다라. 확실히 중죄이긴 하군요.”
눈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는 악어 수인들에게 황실의 전령이란 이름으로 파견된 남자로.
다섯 중에 홀로 살아남은 이이기도 했다. 그는 벌벌 떨고 있었다.
“다시 묻죠. 상대가 ‘벌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예, 예……!”
“그리고 악어들 머릿속에 세뇌와 벌레가 말끔하게 사라졌다고?”
“예! 맞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흔적조차 없이 사, 사라졌습니다!”
“…….”
사내는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로랜드가 북실북실한 털이 가득한 손으로 턱을 짚었다.
“……치료 특기자. 거기 있었나?”
“예, 예?”
“아닙니다. 뭐. 결국 좋은 정보를 주었군요.”
“아……!”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사내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었다.
바닥은 붉은 피로 흥건했다.
“드디어 치료능력자의 행방을 알았으니.”
로랜드가 평온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잡아 와.”
황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