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타스렌은 황태자에게 답변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뒤를 쫓았다.
“저, 황태자 전하……!”
황태자가 돌아보았다. 잔뜩 짜증과 분노가 인 표정에 타스렌의 어깨가 긴장으로 더욱 굳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 했다.
“화,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쯤…… 입장을 밝혀 주실 것 같, 같습니까?”
“…….”
그랬다. 매드럼에서 자행된 인체 실험 소문이 곳곳에 퍼진 뒤로, 황실은 발 빠르게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이며 근거 없는 소문은 엄히 다스리겠다고 했으나.
이 입장을 선언한 건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였다.
황제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뒤로 쭉 침묵 중이었다.
게다가 그 이면엔 더더욱 이상한 이야기가 따라붙고 있었는데…….
바로 황제를 본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점이었다.
근 몇 년간, 아니 넓게 보자면 약 9년간 황제의 얼굴을 본 이가 손에 꼽혔다.
중요한 일과 대외적인 일은 모두 황태자가 처리했다.
황제에겐 황태자 외에 다른 자식이 없다. 즉, 황태자가 곧 차기 황제였으니, 가신들은 이상할 것 없다 생각했다.
“아버님께서는 계속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모두 자중하도록.”
건강이 좋지 않다는 황태자의 말 또한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모두 황제가 황태자를 얼마나 끔찍이 아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렇다고는 하나, 황제를 이렇게나 보기 힘든 게 정상적인 일인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이에나 수장은 이를 남몰래 미심쩍게 여겼고.
하이에나 수장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타스렌은 그런 수장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허, 감히 황제에게 요청한 것이냐?”
“네? 아니, 아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타스렌은 황태자의 예민한 반응에 얼른 손사래 치며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왜 이렇게 완강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나 싶을 정도로 의심쩍었으나.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야.”
“…….”
“너희 또한 매드럼의 수혜를 받은 이들, 아니던가?”
타스렌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이에나 직계 손들 중 어리고 철없는 아이들이, 힘을 탐내는 이들이 겁 없이 그 힘을 넘보고.
매드럼이 준 약을 먹거나 혹은 기이한 장치로 비약적인 힘을 얻었다.
이제는 그 약과 장치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지만, 발을 빼기엔 늦은 뒤였다.
무엇보다도 매드럼을 다녀온 이상 아예 몰랐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다녀온 하이에나들 모두 은근히 짐작하면서도 외면했으니까.
내가 강해지기 위해서.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
저벅저벅. 멀어지는 발소리. 곧 문이 닫혔다. 타스렌은 속으로 탄식했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그러나 어쩐지 그는, 이 강력한 황실의 우군으로 있으면서도…….
자신이 기울어진 배에 타고 있다는 직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 *
“이제 어찌하려 그러십니까.”
집무실을 나선 황태자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우아하기 짝이 없는 낯이었으나, 눈 안에는 채 식지 않은 분노가 번들거렸다.
“판테리온 공작.”
집무실 앞에는 덩치가 아주 큰 흑표범 수인, 판테리온 공작이 서 있었다.
그는 무뚝뚝한 낯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
그저 불렀을 뿐인데, 황태자는 다음 말을 알아차리고 입매를 비틀었다.
“청컨대,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역시나. 황태자 케일의 얼굴로 비웃음이 어렸다.
“이를 어찌하나, 공작. 아버님께서는 그 누구도 만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시라네.”
“…….”
“공작은 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어찌 묻는가?”
황태자가 공작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음험한 미소가 어렸다.
“공작, 그대와 나는 한배를 탔다네.”
“…….”
“세간에선 이를 ‘한편’이라고 부른다지?”
처음부터 제 계획에 협조했던 주제에 이제 와 도덕적으로 굴지 말라.
황태자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판테리온 공작이 모를 리 없는데도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전하, ‘릴리’는 언제쯤 찾아주실 겁니까?”
“찾고 있네. 곧 만나게 해 주지.”
이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판테리온은 주먹을 쥐려던 손에 가까스로 힘을 뺐다.
“예, 믿겠습니다, 전하.”
“그럼, 설마하니 내가 그대를 배신하겠나?”
황태자가 우아한 손짓으로 툭툭, 판테리온 공작의 어깨를 쳐 주었다.
“그리고 이제 황제는 찾지 말게.”
“…….”
“다 아는 사이에. 응?”
속삭이는 목소리가 송곳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황태자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황제?’
판테리온 공작이 꺼낸 이름이 우습기만 했다.
왜냐, 황제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아들아……!”
이미 그의 손에 명을 달리한 아비였다.
‘이놈도, 저놈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뿐이다. 이가 갈렸다.
미래를 안다. 많은 것을 안다.
그런데 제약이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꼴이라니.
으드득.
역시 이건 잘못되었다.
* * *
“하하.”
“…….”
“하하하…….”
매드럼, 아니 이제는 매드럼도 아닌 도시였던 땅. 임시로 만든 건물에 나는 집무실 하나를 배정받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이 땅에 손님이 왔다.
정확하게는 그리웠던 얼굴이.
“……아빠?”
여전히 새하얗고 차가운 데다 잘생긴 우리 아빠의 미모는 여전했지만 차갑기는 북풍한설보다 더한, 싸늘한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분명 오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나름의 감격적인 부녀 상봉이었는데.
문제는 아빠가 이곳에 도착해 여기 있던 일을 모두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죽을 뻔했다고?”
심지어 좀 과장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아니, 내가 언제 죽을 뻔했다고.
웨일이 있는 걸 알고서 움직인 건데.
물론 아빠 입장에선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인 것 같긴 하다.
또 다른 문제는 이거 하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함께 들켰다는 건데.
아빠가 잔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아틀란과 벨루스가 온 틈을 타 슬쩍 도망 나왔다가 에키온에게 갔는데.
에키온이랑 손잡고 있다가 딱 걸렸다.
‘신기하기도 하지.’
에키온과 손잡는 정도야, 사실 어린 시절부터 무수하게 있던 일이었는데.
아빠는 신기하게도 나와 에키온의 모습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우리의 관계가 전과 다르게 변했다는 것을 말이야.
‘무섭다, 무서워. 이게 바로 부모의 감인가?’
설마하니, 나도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감이 예리해지는 걸까?
전생엔 입양아, 이후 세 번의 생을 반복하는 내내 구박데기로 자라 왔던지라. 아이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아 모르겠다.
아무튼 간에 여러 복합적인 문제로 아빠가 지금 복잡한 표정, 아니 싸늘하다 못해 영하에 이를 것 같은 온도의 낯으로 앉아 있단 거다.
“……몸은.”
“아하하, 오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주 멀쩡해. 아빠도 겪어 봐서 알잖아. 웨일의 치료는 완벽해.”
“정작 그 흰수염고래는, 자신은 정신적인 후유증은 치료할 수 없으니 지켜봐 달라고 얘기하던데. 내가 잘못 들었나?”
“…….”
웨일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구나. 혼내 줄 테다.
나는 범인을 알고서 남몰래 치졸한 응징을 결심했다.
“하아.”
작은 한숨 소리에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어째 싸움이나 전투보다는 내 사람의 한숨에 가슴이 더욱 떨리고 신경이 쓰이는 기분이었다.
혼이 나려나? 이리 생각하고 단단히 각오를 하는 순간, 머리 위로 다정한 손이 내려앉았다.
슥슥.
익숙한 쓰다듬이었다.
“고생 많았군.”
“…….”
“하지만 다음엔 되도록 함께 있는 자리에 있거나,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
“…….”
“그게 부모 마음이니까.”
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응.”
아무리 몸이 커져도 나는 양부모님 앞에 가면 어린아이로 돌아가곤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신기하리만치,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저씨!”
아주 조그마한 몸으로 아빠를 올려다보는 기분.
“그럴게.”
내 대답이 흡족했는지, 아빠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흰수염고래를 데려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웨일은 아콰시아델에 와서 참으로 많은 걸 해 주었다.
수년이 지나 존재가 알려지면서 웨일의 공로를 모르는 이가 없을 터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탐내고 있는 거겠지.”
“응?”
“더는 숨기지 않은 탓에 능력이 알려지지 않았나. 흰수염고래를 영입하려는 세력이 절대 소수가 아닐 터다.”
“아하…….”
정확히는 수중 동물 수인들 간에 알력 싸움이 꽤나 대단하단 이야기란다.
하기야 아무에게도 없는 치유 능력이니, 그럴 법했다. 아빠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가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이라서, 라는 점도 적지 않을 거다.”
“아, 응.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니 죄다 혼인으로 엮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되면 네 골치가 꽤 아프겠군.”
“응?”
“그 흰수염고래가 누구든 간에 다른 가문과 혼인할 경우. 그 능력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경우를 생각해 봤냐는 소리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빠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 답은 지금 듣지 않겠다는 듯이.
오히려 웨일의 이야기를 꺼낸 건 오직 나를 치료했기 때문일 뿐. 웨일 개인에겐 관심 없다는 투가 역력했다.
“그래, 그 용 새끼와는 언제부터 그런 관계가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