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화 (2/238)

2화 절대로 죽을 수 없다 (2)

이름 모를 야산의 어느 분지.

한 노인이 주저앉아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중후한 내공 때문에 호흡은 흔들림이 없었으나, 뼈마디와 근육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감히…….”

유진산은 조금 전의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흉수가 짐작되질 않았다.

유일한 단서는 목덜미를 휘감은 용 문신뿐.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며 정신이 없었다.

“응애.”

무릎 위에는 손녀 유설이 안겨져 있었다.

아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선음지체(仙音之體)의 근골을 갖고 태어난 아이였다.

태생적으로 신선의 오감을 보유하고 있기에, 음악과 무예에도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다.

단신으로 무림을 평정한 전설적인 고수 검후(劍后) 소소. 그녀 또한 선음지체인 것으로 유명했다.

“응애.”

“우리 손녀, 왜 울어? 할배랑 놀까?”

아기를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응애! 응애!”

유진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기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배가 고픈 것이리라.

“젖동냥을 어디서 한단 말인가.”

마을로 내려가기에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굶길 수도 없는 노릇. 한숨을 내쉰 노인은 쉴 틈도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우드득-!

또다시 뼈마디가 뒤틀리며 신음이 뿜어져 나왔다.

“끄아윽!”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삶을 정리해야 할 자신이 이런 생고생이라니.

굳어진 뼈마디를 풀어내려면 한동안은 고통이 계속될 터였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는 손녀를 담요로 감싸 등에 동여매었다.

“일단 마을로 가보자꾸나.”

절뚝거리는 걸음은 다시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흉수들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집 근처는 피해야 했다.

산비탈로 내려와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기에 거리에 인기척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졌다. 한 민가에서 암소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유설아. 할배가 드디어 해냈어.”

은밀히 우리 안에 진입한 노인은 주변에서 죽통 하나를 찾아냈다.

망설일 여유 따위는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의 젖을 짜보기 시작했다.

금지옥엽 같은 손녀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꾸욱-! 꾸욱-!

최대한 눌러 담아야 했다. 이곳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절반이 넘었을 즈음이었다.

음머어어~

“쉿. 거의 끝났으니 조용히 있거라.”

소가 연달아 울기 시작하자 유진산은 다급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배가 불뚝 나온 중년의 여성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도둑이야!!!”

목청이 어찌나 큰지 우리 안이 진동할 정도였다.

“한 번 봐주시게. 지금은 사정이 좀 있으니, 나중에 꼭 보상해주겠네.”

성큼성큼 다가간 그녀는 들고 있던 바가지를 냅다 휘둘렀다.

쉽게 피할 수 있는 일격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콰직-!

정수리를 정통으로 가격한 바가지는 산산이 조각나며 흩뿌려졌다.

“놀고 있네. 이놈의 노인네가 훔쳐 갈 게 없어서, 우리 금순이의 우유까지 훔쳐가?”

금순이는 암소의 이름인 듯했다.

얼떨결에 바가지에 얻어맞은 유진산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찌 힘없는 노인을 이리 때리는가? 잠시 빌리는 것뿐이라 하지 않았나?”

“관아로 잡아가기 전에 사실대로 말해. 아기는 어디서 훔쳤어!?”

여인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상대였다.

설상가상 이쪽으로 다가오는 다른 주민들의 기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더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한 대 맞아줬으니, 값은 치른 것으로 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유진산은 재빨리 도주를 감행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었기에 따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말년에 이런 꼴이라니. 서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색이 지방에서는 나름 이름있던 가문의 가주가 아니었던가.

“후…….”

경공을 펼치는 내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한결 가벼웠다. 사랑하는 손녀에게 먹일 우유를 구했기 때문이다.

산속의 분지에 도착한 노인은 근처의 계곡으로 향했다.

손에는 도망칠 때 챙겨나온 노구솥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깨끗이 닦고는 근처에 모닥불을 피웠다.

“생우유를 그냥 먹이면 위험한 법이지.”

죽통의 우유를 노구솥에 담아 모닥불 위에 끓여냈다.

그리고 다시 나뭇잎에 조금씩 담아 아기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배고팠지? 어서 먹어 보아라.”

“응애.”

손을 휘젓는 모습이 빨리 달라는 듯했다.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손녀의 입에 밀어 넣어 주었다.

잘 받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니 흐뭇해졌다.

“헤~”

배시시 웃는 천진난만한 모습에 그동안의 고통이 모두 사그라진 듯했다.

그때였다.

미소를 짓고 있던 유진산이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더니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끄으윽.”

유진산은 고통스럽다는 듯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기를 일다경이 지났다.

꿈틀거리던 몸이 대자로 축 늘어졌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귓가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잠시 눈만 감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거늘. 다급히 일어선 유진산은 손녀부터 찾았다.

“유설아, 우리 아가!”

다행히도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한숨을 내쉰 그는 가부좌를 틀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대로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적어도 유설이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진 내가 살아있어야 해.’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임독양맥을 타통하면 생기는 현상으로, 전신의 뼈와 살이 재구성되며 무공을 펼치기에 가장 적합한 신체로 다시 태어난다.

종양 따위는 단번에 치유될 수 있을 터.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이가 많을수록 몸속에 탁기가 가득해져 더욱 많은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환골탈태를 위해 임독양맥을 뚫으려면 삼 갑자의 내공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자면 오 년은 더 버텨야 한다는 말인데.’

이미 유진산은 이 갑자가 훌쩍 넘는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삼 갑자를 맞추려면 오 년 정도의 수련이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장 하루도 버티기 힘든 마당에 오 년이라니.

혼자 고민해서 답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 * *

의화당(醫化堂)의 전각.

근처에 몸을 숨긴 유진산은 그곳의 입구를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흰색 두건을 둘러맨 중년인이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석두야.

머릿속으로 말을 전달하는 무림의 기술인 전음이었다.

석두는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 우측으로 돌아 세 번째 보이는 매화나무 뒤로 와보거라.

그는 한달음에 목적지로 다가갔다.

그곳에선 담요에 쌓인 아기를 안고 있는 유진산이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이미 마을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걱정했다고요.”

“나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구나. 아무튼, 나 좀 도와줘야겠다.”

“제 아버님도 소싯적 어르신께 도움을 받았지 않습니까? 말씀만 하세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내가 오 년만 버틸 수 있게 해줘.”

“그게……. 어렵다는 거, 어르신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유진산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진지함이 가득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반드시 오 년 동안은 버텨야 한다. 네가 바로 이 마을 최고의 의원이다. 방법을 잘 생각해 봐.”

신의(神醫) 화타가 오더라도 살려낼 방도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석두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단지 버티는 것이라면 시도해볼 만한 것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장하다, 석두야. 너라면 방법이 있을 줄 알았다. 어서 말해봐.”

“독으로 독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뇌공환(腦攻丸)을 복용한다면, 어르신의 머리에 있는 종양이 힘을 쓰지 못하여 자라는 속도가 늦춰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죽기 전까지 주기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올 것입니다.”

유진산도 뇌공환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고문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독으로, 조제가 어렵지 않으며 해독약을 만드는 것도 간단했다.

“상관없으니까 어서 만들어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 모르니 해독약도 같이 조제하여 드리겠습니다.”

“해독약은 필요 없으니 최대한 서둘러. 기다리다가 죽어버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석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어제는 삶에 미련이 없다면서요?”

“우리 손녀 다 크기 전까진 절대 못 죽어.”

석두가 사라진 후 유진산은 나무 뒤에 기대어 앉았다. 곤히 자는 손녀 유설을 보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걱정하지 말거라. 할배는 반드시 버틸 수 있어.’

그도 나무 뒤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잠을 청했다.

한 시진이 지난 뒤 석두가 다시 다가왔다.

“만들긴 했습니다만, 잘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금엽초입니다. 고통이 찾아올 때 씹으면 조금 도움이 될 겁니다.”

유진산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고마움을 청했다.

“유가장의 이름을 걸고 이 은혜를 잊지 않겠네.”

“보답은 괜찮으니, 그냥 건강하기만 하십시오. 그런데 유가장이라면 무림에 아는 문파들이 있지 않아요?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숨어서 다니시는 거예요?”

“무너진 세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문파는 어디에도 없어. 게다가 어떤 고얀 새끼들이 습격했는지도 알 수가 없는데, 어찌 강호에 함부로 나갈 수 있겠나. 아무튼, 이만 가봐야겠네.”

“예. 그럼 살펴 가세요, 어르신.”

서로 작별 인사를 건넨 그들은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한달음에 야산으로 달려온 유진산은 뇌공환부터 입에 털어넣었다.

고통이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게 며칠에 한 번 찾아오는 것인지, 매일 계속되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환골탈태까지 오 년. 그때까지 버티려면 지금의 몸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우선은 체력부터 단련해야 했다.

유설을 안전한 곳에 가지런히 놓아놓고는 상의를 탈의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소싯적에 근력을 쌓아놨던 덕분이었다.

가문의 보물인 화룡신창을 움켜쥔 채 심호흡을 내쉬었다.

“후웁.”

기수식을 취하자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흩날리는 백발 사이로 드러난 짙은 눈썹. 그리고 멋들어지게 자라난 수염은 마치 신선과도 같아 보였다.

초식을 펼치는 것은 무려 삼십여 년 만이었다.

서서히 내뻗어지는 창끝에는 만 가지 변화를 담고 있었다.

소싯적에는 섬서 제일의 창잡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였다.

모든 동작과 경험이 이미 몸에 익어 있었다.

유가창법 제일초식 추일극섬(追一極閃).

섬전 같은 속도로 전면의 적을 꿰뚫는 쾌창의 초식이었다.

파아아앙-!

창끝이 공기를 갈라내며 회오리를 일으켰다. 무지막지한 내공이 담겨있는 한 수였다.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

우두득-!

“끄아악! 내, 내 허리!”

유진산은 창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초식은 분명 완벽했다. 그러나 신체가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한참을 고통스러워한 이후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이대로는 답이 없었다.

‘수련의 방법을 바꿔야 한다. 굳어진 뼈마디를 풀고, 근력부터 붙이는 것이 우선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후 계곡에 굴러다니는 거대한 돌멩이 몇 개를 옮겨왔다.

어른의 머리보다 큼지막한 크기. 시작으로는 적당했다.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머리 위로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하나-! 둘-!”

아주 기초적인 체력단련이었지만, 매 순간이 태산(太山)을 들어 올리는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