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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6화 (6/238)

6화 여기부터 내 영역이야 (3)

‘그럼 그렇지.’

유진산은 산적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두 명 중 한 명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비록 거처에 창을 두고 왔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기껏해야 삼류에 불과한 수준들인 것을.

휘이익-!

날카로운 박도가 목을 향해 반원을 그리며 다가왔지만 너무나도 느릿하게 보였다.

‘다시는 이쪽으로 얼씬도 못 하도록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야겠지.’

빛살처럼 움직이는 유진산의 오른손. 그것은 어느새 박도의 날을 움켜잡고 있었다.

왼손은 여전히 뒷짐을 쥔 상태였다.

“이, 이거 왜 이래?”

산적은 몹시 당황했다. 붙잡힌 박도는 바위 사이에 낀 것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노인의 손에 이 갑자 반이 넘어서는 중후한 내기가 담겨 있음을.

카앙-!

날카로운 도 날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부러진 박도를 움켜쥔 산적은 멍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그때 뒤에서 동료가 그를 밀쳐내며 앞으로 나섰다.

“비켜!”

그 순간 유진산의 양팔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이어서 두 손이 물살을 휘젓듯 태극을 그려나갔다.

유가건곤장(劉家乾坤掌) 사초식 일후섬타(一後閃打).

푸른빛에 휩싸인 손바닥이 다가오던 산적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쩌어엉-!

마치 종소리 같은 웅장한 폭음이 산속을 진동시켰다.

동시에 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의 낙엽들을 날려버렸다.

“쿠허억!”

산적은 상체를 숙이며 반사적으로 신음을 토했다.

유진산이 한 걸음을 다가가 그의 어깨를 한 번 토닥였다.

“엄살 부리지 말거라.”

그 순간 신음하던 산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멀쩡히 일어섰다.

“……뭐, 뭐야? 안 아프잖아?”

분명 육중한 기(氣)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을 느꼈다.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혀왔었지만, 기이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쩌어억-!

산적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나무 한 그루가 뒤로 꺾이며 쓰러지고 있었다.

쿠웅-!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어, 어떻게 된 거야?”

산적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칼을 한 손으로 막고 부러트린 것도 모자라, 사람을 관통하여 등 뒤의 나무를 쓰러트리다니.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고수였다.

“마음 같아선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싶다만, 오늘은 처음이라 봐주는 게다.”

“……하,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몰, 몰라뵈었습니다, 어르신.”

산적들은 몹시 당황했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그들이 짐작하는 노인의 정체는 영락없는 강호의 은거기인이었다.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유진산은 뒷짐을 쥔 채 등을 돌렸다.

“나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느니라. 영역만 넘어오지 않는다면 다신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

그것을 끝으로 서로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터벅터벅 거처로 돌아가는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사냥은 허탕이로구만.’

더군다나 자신이 영역을 설정해 놨으니, 사냥도 쉽지가 않았다. 추격하던 고라니는 이미 영역 밖에 있었으니. 그러나 육류를 섭취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다음 행보를 결정하고 있을 때였다.

“응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유설이의 울음소리.

목소리가 크고 신경질적인 것으로 보아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금방 간다!”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방문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유설이가 후다닥 바닥을 기어오기 시작했다.

“하배!”

“오냐, 우리 손녀. 할배 여기 있다.”

양손으로 안고 간지럼을 태우자 아이가 사정없이 웃어댔다.

“까르륵.”

해맑게 웃는 얼굴이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아기 선녀 같아 보였다.

유진산은 손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린 후 바닥에 세워놓았다

“자, 오늘은 한번 걸어보자.”

걷기엔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밑져야 본전 아닌가.

혹시나 하고 세워주니 균형을 잘 잡고 서 있었다.

“하배…….”

손녀는 조금 당황했는지 큰 눈을 끔뻑였다.

“어서 할아버지한테 걸어와 보거라. 한 걸음씩, 천천히.”

유진산은 상체를 낮추고 흐뭇한 미소로 다가오라 손짓했다.

그러길 잠시 후. 드디어 아기의 작은 발이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무려 다섯 걸음을 걸어오다가 철퍼덕 넘어졌다. 물론 완전히 넘어지기 전에 손으로 배를 잡아주었지만 말이다.

“허허! 허허허……. 잘했다, 정말 잘했어.”

유진산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손녀도 자신이 칭찬받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배시시 웃으며 옹알거리기까지 했다.

“자해떠.”

“암, 그렇고말고. 이제 할아버지랑 일하러 가자꾸나.”

아기를 등에 업고 나온 그는 창고에서 도구 몇 개를 챙겨 나왔다.

가장 먼저 며칠 전에 꺾어온 대나무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리고 따듯한 햇빛 아래 앉아 대나무 줄기를 엮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연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곧 있으면 우리 유설이도 친구들이 생기겠구나.”

유진산이 만들고 있는 것은 작은 우리였다.

거처 뒤편에 닭을 키울 생각이었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닭장을 만들어냈다. 몇 마리 들어가지 않는 작은 크기였지만, 시작으로는 충분했다.

‘문제는 닭을 어디서 구하느냐인데…….’

언제 한번 날을 잡고 시장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시 거처로 들어온 유진산은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듯 그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앞에서는 유설이 다람쥐처럼 앉아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공 수련은 빨리 시작할수록 좋은 법이지. 단전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겠구나.’

나이가 어릴수록 몸속에 탁한 기운이 적어 수련의 효과가 배가 되는 법이다.

돌연 손녀의 두 눈이 스르륵 감기며 옆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혈도를 눌러 잠을 재운 것이다.

유진산은 쓰러지는 아이의 등을 자신의 앞에 고정해 놓았다.

‘금방 끝나니 잠시만 자고 있거라.’

유진산의 오른손이 손녀의 등을 완전히 감쌌다.

그 순간 그곳에서 타고 흘러나온 진기가 점차 손녀의 등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 점차 시간이 흘렀다.

그의 모든 정신은 유설의 단전에서부터 타고 흐르는 기(氣)에 집중되어 있었다. 운기조식의 첫 번째 단계였다.

잠시 후 중후한 진기가 첫 번째 혈도에 막 당도할 무렵. 유진산은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아니, 이럴 수가……?’

유설의 혈도에는 조금의 탁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가 흐르는 혈도의 통로는 뻥뻥 뚫려 있었다. 그것은 곧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수십 배나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기의 흐름이 막힘이 없으니 무공을 펼치는 것에도 거침이 없을 터.

‘이게 바로 선음지체란 말인가?’

특이체질로 오성이 뛰어나고 근골이 튼튼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신비로움은 알수록 경이로웠다.

유진산은 무척 흥분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희에 휩싸여 있었다.

일주천(一週天). 단전에서 시작된 진기로 전신의 혈도를 통과시켜 다시 단전에 축적하는 과정을 말한다.

보편적으로 한 번의 일주천으로 쌓을 수 있는 내공을 일이라 한다면, 유설이의 체질은 이십에 가까운 내공을 축적하고 있었다.

아이의 몸에서 행해지는 것은 유가청해심법(劉家靑海心法)이었다.

유씨가문의 이 내공심법은 거대문파나 명문세가의 것에 비교하면 진전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정순함과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기본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단전을 탄탄하게 하여 내공을 축적할 수 있는 한계점을 높여주는 장점이 있다.

어차피 단점은 선천적인 체질이 해결해 줄 터. 신이 난 유진산은 반시진에 걸쳐 손녀의 내공 수련을 도와주었다.

할아버지에 의해 잠을 자면서도 내공을 수련하는 셈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신이 온종일 내공 수련에 매진한 것보다 많은 양을 쌓게 해주었다.

마음 같아선 더 해주고 싶었지만, 한 번에 너무 무리하면 단전이 버티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

“허허…… 허허허! 누구 손녀인지 거참 대단한 체질을 타고났구나!”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는 곤히 자는 유설을 반듯이 눕혀서 담요를 덮여주었다.

깨어나려면 앞으로 반시진은 더 있어야 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그는 수납장에서 칠흑처럼 짙은 흑의를 꺼냈다.

과거에 자신을 찾아온 살수를 처치하고 얻은 전리품이었다.

‘설이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있다면,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그 무엇이라도…….’

검은 흑의를 입은 그는 죽립을 쓰고 태도를 허리춤에 묶었다.

조금 전까지 인자하게 웃던 노인은, 완벽한 살수의 모습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목적지는 산적들의 산채. 그들의 세력과 동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경고는 보냈지만,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될지 판단이 안 섰기 때문이었다.

산속으로 진입한 그는 흑산도의 영역으로 은밀히 진입했다.

은신이나 잠행술 등 살수의 기술은 익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고작 산적들 따위에게 발각될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방향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러길 일각 후.

“캬아! 죽인다. 술은 이렇게 몰래 마시는 게 최고라니까.”

“나도 한 모금만 줘.”

두 명이 횃불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호리병에 든 술을 나눠마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걸 어찌한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근처의 나무 위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나뭇가지를 밟고는 새처럼 나무를 타고 넘기 시작했다.

타앗-! 타앗-!

하늘 위로 그림자가 쭉쭉 늘어지며 잔상을 남겼다.

“뭐야? 방금 박쥐 지나간 거 아냐?”

“맞아. 한 마리 잡아서 안주로 고아 먹으면 기가 막힐 텐데. 쩝.”

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릴 무렵. 유진산은 이미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산적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기에 산채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 이런 분지가……?’

예상대로 산의 정상 부근이었다.

목책으로 두른 넓은 분지였으며, 곳곳에 망루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곳곳을 어슬렁거리는 산적들과 곳곳에서 감지되는 기척으로 보았을 때, 최소한 백여 명이 넘는 규모였다.

산채 밖에 있는 자들까지 포함한다면 총인원이 두 배는 넘을 터.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세력이 훨씬 거대했다.

‘아무래도 쉽지 않겠군.’

이 정도의 산적 집단이 자신의 경고 한마디에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의 고수는 없는 듯했지만, 모두에게 무공을 익힌 흔적이 남아있었다.

우선은 돌아가서 대비책을 고민해 보아야 했다.

막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목책 주변에서 사육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냄새 때문에 밖에서 키우는 모양이었다.

돼지와 닭, 오리까지. 종류가 다양했으며 개체 수도 많았다.

‘마침 잘되었구나.’

손녀를 생각하니 빈손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호흡을 골랐다.

닭들이 놀라 날뛰기 전에 일을 마치고 도망쳐야 한다.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웁.”

크게 심호흡을 내쉰 그는 전광석화처럼 질주를 개시했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였다.

타앗-!

한줄기 빛살이 닭장을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사라져갔다.

푸다닥-! 푸다닥-!

놀란 닭들이 사방으로 날아오르자, 망루 위에서 산적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산적 몇 명이 사육장 안에 난입해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미 유진산은 산채를 벗어나 거처로 향하고 있었다.

양손으로 붙잡은 닭 두 마리는 이미 정수리를 때려 기절시켜놓았기에 조용했다.

유진산은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거처에 가까워지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허허~ 어서 일어나 보거라, 설아. 할아버지가 친구들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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