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몰라뵈었습니다, 어르신 (2)
뻐억-!
유진산의 앞발이 채주의 가슴을 걷어차는 소리였다.
“크윽!”
용케도 짧은 순간 양팔을 교차하여 방어한 채주였다.
‘노인이 뭐 이렇게 힘이 무식해…….’
발길질에 담긴 중후한 내공은 수위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채주는 뒤로 밀려나며 자세를 잃고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진산이 지면을 박찼다. 도주를 개시한 것이다.
채주를 지나친 순간 그의 앞가슴으로 도끼날이 다가왔다. 흑산도의 부채주가 휘두른 일격이었다.
유진산은 쇠사슬에 묶인 양손을 도끼날이 오는 방향으로 내밀었다.
콰앙-!
사슬이 잘려나갈 것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부채주의 공격이 그만큼 강하지 못했기에 도끼날은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그는 반격을 가하지 않고 보법을 밟았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물결처럼 늘어지며 부채주를 단번에 따돌려버렸다.
“저 노인네 잡아!”
부채주가 다급히 뒤따르며 소리쳤다.
이미 산채 안에는 백여 명이 넘는 산적이 대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산채를 두르고 있는 높은 목책은 매우 견고해 보였다.
설상가상 망루 위의 산적들이 활에 시위를 먹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유진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장기전에 취약한 자신이 손이 묶인 상태로 이들을 상대하면서 빠져나가기엔 무리수였다.
그때 어디선가 채주가 모습을 드러내며 다급히 소리쳤다.
“쏘지 마! 그냥 보내드려라!”
유진산은 산채의 정문을 향해 다가갔다.
목책은 한 번의 도약으로는 뛰어넘기에 부담스러운 높이였다.
그때 다시 한번 채주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당장 열어!”
산채의 입구가 열리기 무섭게 유진산은 그 틈으로 내달렸다.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손녀의 안위밖에 없었다.
부엌에 홀로 남겨져 있을 아기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해졌다.
그의 뒷모습은 산채에서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부채주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옆을 보며 물었다.
“형님, 왜 그냥 보내준 것입니까? 본색을 드러냈으니, 다시 돌아와 우리에게 보복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해. 그럴 분이 아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최근에 산에서 실종된 부하들이 많습니다. 저 노인네가 죽인 게 분명해요.”
채주는 듣기 싫다는 듯 왼손을 올려 보였다.
“그만. 그건 확인되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토벌대가 올 때까지 저분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우린 끝이야.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번 일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 * *
“유설아! 어디에 있느냐, 우리 설아!”
황급히 부엌에 도착한 유진산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사이 닭고기를 몇 개 집어먹은 듯 바닥이 어질러져 있었다.
뛰쳐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어떠한 기척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이런 야산에 산짐승이라도 만난다면 큰일이었다.
“어디 있느냐……. 할아버지 왔으니 어서 말 좀 해 보아라.”
주변을 수색하던 중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기척을 감지했다.
이십여 장이 떨어진 풀숲이었다. 체구가 작으니 보이지 않을 수밖에.
애타게 찾던 손녀의 모습이 보였다.
양팔을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흐이잉.”
“할아버지 여기 있다!”
한달음에 달려간 유진산은 묶여 있는 양손을 손녀의 등 뒤로 넘겨 안아주었다.
서럽게 우는 것을 보니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유진산의 눈에서도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미안하구나. 다시는 혼자 두지 않으마.”
할아버지와 손녀는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즈음이었다.
개굴-!
가슴팍에서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밤톨 같은 손에 산개구리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깜빡이는 모습이 마치 나 잘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주는 게냐. 허허헛. 일단 집으로 가자꾸나.”
언제 이것을 잡았단 말인가. 재주가 놀라웠다.
눈물을 훔친 유진산은 개구리를 건네받아 기절시켰다. 아이에게 먹일 죽에 같이 넣어서 끓여줄 생각이었다.
거처로 돌아온 이들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설이는 긴장이 풀렸는지 금세 잠들어 버렸다.
‘일단, 이 사슬부터 풀어야 할 터인데.’
유진산은 지난번 살수에게서 빼앗은 태도를 찾아들었다.
검기를 내뿜어 자르려 시도해보았지만, 각도가 나오질 않았다.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현철로 만들어진 사슬인 것 같구나.’
산적질을 하다가 보면 각종 진귀한 물품을 얻게 되는 법이다. 그중 하나인 듯했다.
방법을 찾다가 포기하고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어르신 계십니까?”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흑산도의 산적들이 분명했다.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섰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거늘, 기어코 끝장을 봐야겠느냐?”
채주가 직접 십여 명의 산적들을 이끌고 찾아왔다.
그들을 바라보는 유진산의 표정은 곱지 않았다. 산적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당파의 도사를 죽였으니, 결국엔 모두 쓸려나갈 운명들이었다.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산적집단인 녹림(綠林)도 감당하기 어려운 곳을 인지도조차 없는 흑산도가 건드린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과 엮여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오해이십니다. 단지 사슬을 풀어드리려고 열쇠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것이라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유진산이 손목을 내밀자 채주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풀어주었다.
철컥-!
그 순간 함께 온 산적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뇌공환의 고통이 찾아왔을 때 자신을 때렸던 산적들이었다.
마음 같아선 따귀를 한 대씩 날리고 싶었지만, 구태여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목을 돌려대면서 중얼거렸다.
“알았으니까, 어서 돌아들 가.”
산적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채주가 사슬을 회수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자 생활하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신지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같은 산에 사는 이웃끼리 서로 도우면 좋지 않습니까?”
유진산이 그의 속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토벌대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리라.
그가 뭐라고 할 찰나였다.
“하배!”
거처 안에서 도토리만 한 아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잠에서 깬 유설이었다.
그 순간 채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하하! 손녀인가 봅니다. 흰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으니 필시 훗날 절세미인이 될 팔자로군요.”
“신경 쓰지 말고, 이만 돌아가시게!”
완강한 축객령에 산적들도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언제든 한번 저희 산채로 찾아오십시오, 어르신.”
포권을 건넨 채주는 부하들을 이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빈자리에는 웬 자루가 하나 남겨져 있었다.
‘이놈들이 뭘 놓고 간 거지?’
유진산은 다시 가져다가 되돌려줄까 고민했다.
그때 손녀가 다가와서 자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용물이 궁금한지 연신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풀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같이 살펴보자꾸나.”
자루는 서 있는 유설보다 조금 높은 크기였다.
아이는 이미 그 안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유진산은 살펴볼 새도 없이 순서를 양보해야만 했다.
자루 속으로 파고드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자루 안에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르륵.”
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이리도 좋아하는 걸까? 유진산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할아버지도 같이 좀 보자꾸나.”
자루에서 아이를 꺼낸 유진산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얇고 긴 하얀 생명체.
혀를 날름거리는 기다란 무엇인가를 유설이 움켜쥐고 있었다.
백갑사(白鉀蛇). 섭취하면 약간의 내공까지 증진시켜주는 귀한 뱀이었다.
비록 독은 없지만, 면역력이 약한 아기가 물리면 위험할 수 있었다.
유진산의 손날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빠악-!
후두부를 정통으로 맞은 백갑사는 꿈틀거리던 몸을 축 늘어트렸다.
“미친놈들이 왜 여기다가 뱀을 넣어둔 거야?”
유진산은 아이의 손에서 뱀을 낚아채고는 자루를 계속 뒤져보았다.
귀한 약재로 빚은 술과 곰의 웅담까지. 노인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작고 붉은 산사나무 열매로 아이들도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자, 한입 먹어보자.”
유설이는 이미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나를 넣어주자 오물오물 잘 먹었다.
처음으로 먹어봤던 달콤한 과실이었기 때문일까? 양손까지 흔들며 좋아했다.
“히~”
자동으로 벌어지는 입에 과실을 몇 개 더 넣어준 후 부엌으로 이동했다. 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기에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부엌에 쪼그려 앉은 둘은 남은 백숙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허허헛. 모처럼 배도 부르고, 이제야 살 것 같구나.”
아이를 씻기고 방에 들어오니 잠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가롭게 잠잘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유진산은 가부좌를 틀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운기조식을 진행해야 한다.
언제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반드시 그 전에 환골탈태를 끝마쳐야 했다.
단전에서 시작된 중후한 기운이 전신의 혈도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일주천이 반복될수록 몸의 피로가 풀리며, 정신이 맑아졌다.
그의 혈도는 임맥과 독맥을 제외하곤 모든 곳이 타통된 상황이었다. 이 두 혈도를 뚫는 즉시 환골탈태가 진행될 것이다. 필요한 내공은 약 삼 갑자.
젊었을 때 시도했더라면 절반의 내공으로도 충분한 일이었지만, 나이가 들어 그 임계점이 높아진 것이다.
‘반드시 버텨야 한다. 나는 할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세뇌하고 있었다. 손녀 유설의 보호를 위해. 그리고 가문의 복수를 위해.
몸이 부서지더라도 정신력으로 버틸 작정이었다.
운기조식이 끝나고 눈을 뜬 유진산은 손녀부터 찾았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마치 자신을 흉내 내듯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졸고 있었다.
‘할배가 도와주마.’
아이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등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었다.
유진산의 내기가 손녀의 단전으로 타고 들어가 일주천을 시작했다.
타인의 몸속에서 자신의 진기를 조종하는 것은 심력의 소모가 엄청나다.
게다가 내공 수련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내공을 담는 그릇인 단전을 튼튼하고 부드럽게 정련시켜 주고 있었다.
‘거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선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유설은 특이체질과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매일같이 단전의 기운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작업은 반 시진이 끝나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어느새 유진산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진이 다 빠져버린 것이다.
곤히 자는 손녀를 가지런히 눕힌 뒤,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마셨다.
“아이고, 기력이 딸리니 힘들구나.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한숨을 내쉬어봐야 답이 없었다.
마루 맡에 앉아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그의 눈에 몸이 축 늘어진 백갑사와 산삼주가 들어왔다.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군침이 돌았다.
술을 입에 댄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를 않았다. 게다가 훌륭한 안주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백갑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껍질을 벗기고 꼬치에 꽂아 모닥불에 올려놓았다.
왼손에는 어느새 산삼주가 들려져 있었다.
꿀꺽-! 꿀꺽-!
극락이 따로 없었다.
모처럼 마시는 귀한 술은 단번에 취기를 끌어 올리며,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하아. 좋구나! 살아 있어야 이런 맛도 느낄 수 있는 게지. 허허허.”
귀한 술은 좋은 안주와 함께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꼬치를 움켜쥔 유진산은 한입을 깨물어 보았다.
직화로 구웠음에도 부드러운 고기의 식감은 입에서 녹는 듯했다.
혼자 먹는 게 무척 아쉬웠지만, 뱀고기는 아이에게 위험할 수도 있었기에 먹일 수가 없었다.
“허허허. 허허.”
입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소소한 삶의 행복을 느끼며 주변의 풍경을 감상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시원한 바람이 그의 백발을 흩날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깊고 차분한 눈빛. 돌연 그의 안광이 번뜩였다. 도깨비불같이 푸르스름한 기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다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거지?’